필서/야담설화

영월장릉 노산군단종

시인김남식 2018. 5. 10. 20:18
영월장릉 노산군단종     솔새김남식

                                                             장릉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 196호로 지정 되었다

조선왕조 518년 27명의 임금 중에서 참배객(관광객)이 제일 많은 왕은 단종이고

역사 드라마에서 단연 제일 많이 나온 왕도 단종이고 지역사회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는 왕도 단연 단종이다

그리고 단종 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사람도 무려 268명이나 된다.

 


조선국의 왕릉은 대부분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하여 백리안에 조성이 됐다.

하지만 제6대 임금인 단종(1441~1457)이 잠든 장릉(莊陵)은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다


그가 왜 이처럼 먼 곳까지 와서 묻혔는지는 역사가 말해 준다.

단종은 1457년 영월에서 사사된 후 영월호장 엄홍도가 시신을 수습하여 영흥리에 매장을 하게 된다 

 

단종이 죽은지 80년이 지난 1538년 (중종33년)때 영월부사 박충헌이 노산묘를 찾아 봉분을 정비 하면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고 하며 이후 1681년(숙종7년)에 대군으로 추봉되고

다시 1698년 (숙종 24년) 追復하여 묘호를 단종(端宗) 능호를 장릉(莊陵)이라고 추서하였다.


이는 자신이 죽은지 꼭 241년만에 왕실의 정례를 받은 것으로 단종이 생각하면 얼마나 원통하고 화가 날 일인가?

그의 아내 정순왕후 또한 청춘을 세월로 보냈던 사람이다 

 

1441년 (세종23년) 7월에 왕세자빈 권씨(현덕왕후)가 동궁(창덕궁) 자선당에서 원손 단종을 낳자

세종대왕은 “세자(문종)가 장년(28세)이 되어도 후사가 없어 염려 했는데 적손이 생겨 기쁘기 이를 데 없다" 고

했지만 기쁨도 잠시 이튿날 세자빈의 산후 통증이 심하다는 소식에 시아버지인 세종이

친히 동궁으로 병 문안을 갔으나 세자빈은 이미 사망하고 말았다. 

단종의 운명은 이때 부터 꼬이기 시작하였다


장손으로 태어난 단종은 친 어머니 품에 안겨 보지도 못한채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작은할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으며 할머니인 소헌왕후는 이런 손자를 애틋하게 여겨 더욱 정성껏 돌 보았다.

1450년 왕위에 오른 문종이 1452년 5월 18일 갑작기 승하하자 단종은 12살에 임금으로 즉위한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단종은 3년 2개월의 재위 동안 수렴 청정을 할 만한 배경조차 없었다

문종의 유명을 받든 김종서, 황보인등 고명 대신들이 단종이 어린 탓에 공신들이 인사권을 행사하자

정국이 혼란에 빠지고 종사가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한 수양대군이 1453년에 여러 대신들을 죽이고

반대파를 숙청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종친과 궁인 신하들을 유배시키고 대신들을 죽이자 겁을 먹은 단종은

왕위를 내 놓고 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조는 왕위로 즉위하자 마자 단종을 키운 혜빈 양씨 마저 청풍으로

귀양을 보내서 궁 안는 단종을 가까이에서 보살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불란을 잠재 울 날이 없던 1456년 성삼문, 박팽년등 집현전 학사출신들과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도모하려 하자

가담자 중에서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말하고 그는 다시 세조에게 고질하여 실패를 하게 된다.

여기서 발생한 獄事가 後에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김문기· 유성원) 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화를 오히려 불려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 되어서 영월 청령포로 귀양을 가게 된다


1456년 6월 어느날 드디어 단종을 멀리 영월로 유배 보낸다는 정순왕후에게 들려 왔다.
멀리 떠나는 서방님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비오듯 땀을 흘리며 버선발로 뛰어 왔지만 만나지도 못한 채
숭인동에 있는 영도교 다리 위에서 영영이별 영 이별이 500년이 되고 말았다


당시 단종 유배길은 정사(政史)에 잘 기록이 되어 있지를 않지만 한양에서 영월까지 각 지역에 남아있는

전설과 유래등을 기반으로 해서 영월문화원에서 답사한 경로를 만들었는데 대략 160Km 에 이르는 길이다

 

당시 유배길 일정 

*1일차=>돈화문-이씨종약원-정업원-영도교-살곶이다리-화양정

*2일차=>화양정-광나루-하남시 배알미리-여주군이포리

*3일차=>이포리-대신면 상구리(어수정)-주암리

*4일차=>주암리-어운리고개-안창-문막  

-> 유배 5일자 부터 산 길을 따라가는 힘든 여정이다

*5일차=>문막-부론 흥호리-손곡리-자작이고개-단강리(단정지)-법천사지-위래면-운남리

*6일차=>운남리-뱃재-덕동다리재-백운면 운학리-구력재-석동거리-신림

*7일차=>신림-배나무거리-싸리재-장촌-솔치-주천 물미(어음정)-신일리 역골(신흥역)-주천

*8일차=>주천-쉼터-거안리-군둥츠-명라곡-뱃말-배일치-갈골-옥녀봉-남애-선돌-날골-서강-청룡포



세조를 따르는 신하들은 참으로 영악했던지 어찌 천혜의 유배지를 찾을 수 있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곳은 동·북·서쪽이 깊은 강물로 막혀 있고 남쪽은 천길 절벽으로 300여 미터가 요새처럼 버티고 있다 

그리고 숲이 울창하여 사람이 접근하기 조차 어려운 마치 창살 없는 감옥같은 곳이다


그해 여름 이곳에 홍수 때문에 3개월을 머물다가 다시 관풍헌으로 옮겨와 머물고 있던 1457년 9월

경북 영주 순흥유배지에 있던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등이 또 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이 사건으로 세조는 금성대군과 단종에게 사사의 명을 내리게 된다


세조실록에는 1457년 음력 10월 단종이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숙종실록에는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역을 들고 찾아 갔지만 차마 아무 말도 못하자 그를 모시고 있던 자가 그를 害 하였다고 하니

아마 교살한 것으로 추정이 되지만 단종은 사약을 받고 승하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지..... 


단종은 눈물나는 시 한수 이른바 단종의 어시 자규시(子規詩)를 남겼다.

< 血淚春谷落花紅 >
一自寃禽出帝宮   弧身隻影碧山中  假面夜夜眼無假 窮恨年年恨不窮   聲斷哮岑殘月白  血流春谷洛花紅 
天聾尙未聞哀訴   何奈愁人耳獨聽    -端宗 子規詩-

< 피 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
원통한 새가 되어 제궁을 나오니 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
밤마다 잠들려 해도 잠 못 이루어 어느 때 되어야 이 한  다 할꼬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
하늘도 저 애끊는 소리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시름에 찬 내 귀에는 잘도 들리는고 .... 


시신을 거두는 자는 3족을 멸할 것이라 하여 당시 두렵다며 사람들이 모두 말렸으나 영월 호장 엄흥도는

爲善被禍吾所甘心 (위선피화오소감심)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 하더라도 달게 받겠다며 시신을 수습하고

단종을 장례 지낸 뒤 고향을 떠나 식솔을 데리고 충청도 동학사로 잠적 했다고 한다. 


단종은 사약을 받고 죽은 이후 가매장 되었다가, 59년 후인 1516년 (중종11년)에 봉분을 갖추게 되었으며
공적으로는 단종의 추모가 금기 되었지만 무속에서 군왕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다


그간 묘호도 없이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중종때 부터 복권 논의가 여러번 나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1698년(숙종 24년)에 묘호를 단종이라 복위 하였다


청령포 맞은편 언덕에 있는 왕방연 시조비  


금부도사 왕방연은 차마 단종에게 사약을 내밀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한양으로 돌아 오는 길에

그 심정을 노래한 시조 한 수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 고은 님 여희옵고 둘 업셔 냇의 안자시니 져 물도 여 우러 밤길 녜놋다"


이곳은 일반 릉과 달리 단종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은 "충절비각"이 여려개 있다

.

엄홍도충신정려각(嚴興道忠臣旌閭閣)은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조2년(1726)에 충신(忠臣)에 정려하고 세운 정려각이다


지금도 동학사에는 단종과 정순왕후, 엄흥도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엄흥도 해설 - 김원식 문화해설사는 솔새 김남식의 지인이다 


박충원 정여각

 


단종이 죽은지 80여년 동안 노산군의 묘는 제사도 봉양도 받지 못하고 찾는 이도 없었다.

그러다가 중종33년(1538)영월 부사로 부임한 박충헌이 꿈을 꾼뒤 노산묘를 찾아 봉분을 정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영월부사 박충원은 당시 영월에 부임하는 부사마다 임기 중에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던 어느 날 밤

꿈에서 단종을 만나 그의 억울함을 들었다고 전한다. 


낙촌비각(駱村碑閣)은 1972년에 박충원(朴忠元)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세운 비이다.


당시 노산군을 모시던 여섯 명의 시녀(궁녀1인, 시녀3인, 종인3인)가 동강에 몸을 던져 순절(殉節)하여

두견새로 환생하여 노산군이 암장되어 있는 산을 매일 찾아와 영혼을 위로하듯 슬피 울고 있었다.


정조 때 영월부사로 부임한 박기정(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은 이 이야기를 듣고 시녀들에 뜻을 기려

1792년에 배견정(拜鵑亭)이라는 정자를 세워주고



뒤편 바위에 친히 '배견암'이라는 글자를 썼다고 한다.

 

해설은 장릉 해설사 김원식님 



장판옥

장판옥은 1781년(정조5년) 정조의 어명으로 건립된 건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이곳은 충신(忠臣) 32인, 조사(朝士) 186인, 환자군노(宦者軍奴) 44인, 여인(女人) 6인 계 268인의 위패

봉안하고 있으며 매년 4월 한식날 단종제를 올린 뒤 이들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장릉배식록 수록자

육종영(六宗英)은 단종을 위해 세조와 맞서다 죽임을 당한 6명의 종친을 가리킨다.

안평대군 이용 · 금성대군 이유 · 화의군 이영 · 한남군 이어 · 영풍군 이천 · 하령군 이양

4명의 의로운 외척

판돈녕부사 송현수 · 예조판서 권자신 · 영양위 정종 · 돈녕부판관 권완

삼상신

영의정 황보인 · 좌의정 김종서 · 우의정 정분

삼중신

이조판서 민신 · 병조판서 조극관 · 이조판서 김문기
 

양운검

도총부도총관 성승 · 증병조판서 박정

사육신

우승지 성삼문 · 형조참판 박팽년 · 직제학 이개 · 예조참판 하위지 · 성균사예 유성원 · 도총부부총관 유응부

기타

형조판서 박중림 · 지평 하박 · 좌참찬 허후 · 수찬 허조 · 증이조참판 박계우 · 순흥부사 이보흠 ·
도진무 정효전 · 영월호장 엄흥도



단종 복위를 위해 희생한 사람이 모두 268명이란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충정심 이었다


이곳 장릉을 가볍게 참배만 했는데 관직의 앞 길이 활짝 열렸다는 사람도 있고 아들을 낳았다는 사람도 있고
또 자신이 하는 일이 잘 풀렸다는 사람들에 이야기가 풍문이 떠돌아서 언제나 늘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고 한다


단종이 자기 시신을 잘 거둬준 영월에 대한 보답이 아닌가 생각게 하는 대목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임금에 대한 예로 ‘사배(四拜)’를 올리면서 자신에 소원을 비는 것도 좋을듯 하다 solsae kns




2018.05.07 수정 solsae kns



'필서 > 야담설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녀 홍량의 묘  (0) 2020.09.23
양녕대군과 기생 정향의 사랑  (0) 2018.12.04
정순왕후 유적지  (0) 2018.05.07
단종과 정순왕후  (0) 2018.05.03
김래성 애인 영화  (0) 2018.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