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양녕대군과 기생 정향의 사랑

시인김남식 2018. 12. 4. 14:49

양녕대군과 기생정향(丁香)의 사랑

                                                                                                                                       정리솔새김남식

千日夜事에 나오는 재밋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초 당시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 당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는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 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 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한양으로 올려 보내라”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 곳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 했으나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 잡는 절세 美人이 나타나고 말았다.

양녕은 그날로 동침을 하고 귀신도 모르리라고 스스로 자신을 했었다.

그래서 詩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사람의 베게를 들여다 보진 못 할 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 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 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한양으로 보냈으니 그녀의 운명은 곧 죽음이었다.

 

그러나 세종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한양으로 돌아와서 세종을 알현하였다.

- 세종: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 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

- 양녕: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

- 세종: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대군은 기생이 나와서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고 세종을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 하면서 그날밤 그 기생을 양녕대군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양녕대군이 기생 정향과의 이별이 아쉬워 속 치마 폭에 써 주었다는 사랑의 노래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一別音容兩莫追          한 번의 이별로 음성 용모 듣고 보지 못하리니
楚臺何處覓佳期          초대(楚臺) 어느 곳에서 좋은 때를 찾을고

粧成面人誰見             곱게 단장한 얼굴 누가 보리요

愁殺紅顔鏡獨知          수심에 잠긴 붉은 낯은 거울만이 알리라

夜月猶嫌窺繡枕          밤 달이 수놓은 베개 엿보는 것도 미운데
曉風何意捲羅             새벽바람 무슨 뜻으로 비단 휘장을 걷는고

 

글이 끝에 이르게 되자 잠시 붓을 멈추고 정향의 이름을 물었다.

소첩의 이름은 바로 '정향(丁香) 이옵니다' 라고 대답하자 다음과 같이 썼다.

 

庭前幸有丁香樹      뜰 앞에 다행히도 정향나무 서 있는데

把春情强折枝         어찌 춘정(春情)으로 굳이 꺾지 않으리오.

 

그리고 치마폭에 아직도 여백(餘白)이 남아 양녕대군은 오언(五言)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別路香雲散        이별하는 길엔 향기로운 구름 흩어지고

離亭片月鉤        헤어진 정자엔 조각달만 걸렸어라

可憐轉輾夜        가련타 잠 못 이뤄 뒤척이는 밤에

誰復慰殘愁        뉘 다시 그대 수심 위로해 주리  

 

< 戱贈西關妓 >

別後音容杳莫追     이별 후 소식 묘연하니
楚臺無路覓佳期     초대에 만날 기약 없구나

粧成玉貌人誰見     단장한 고운 얼굴 누가 보리요
愁殺紅顔鏡獨知     수심진 홍안은 거울이나 알겠지

 
夜月猶嫌窺繡枕     달빛은 베갯머리 엿보고
晩風何事捲羅?      바람은 무슨 일로 휘장을 걷어 치나

庭前賴有丁香樹     뜰앞에 정향수 서 있기에
强把春情折一枝     춘정을 못잊어 한 가지 꺾었네

   
< 九難歌 >

難難                                           

我難 爾難

我留難 爾送難

我南來難 爾北去難

空山夢深難 塞外書寄難

長相思一忘難 今相分再會難

明朝相別此夜難 一杯永訣此酒難

我能禁泣眼無淚難 爾能堪歌聲不咽難

誰云蜀道難於乘天難 不知今日一時難又難

 

어렵고 어려워라

너도 어렵고 나도 어려워라

나는 머무르기 어렵고 너는 보내기가 어려워라

너는 남으로 내려 오기 어렵고 나는 북으로 다시 찾기 어려워라

산적적 깊은 밤에 꿈에 보기 어렵고 노중중 세상밖에 글뛰우기가 어려워

언제나 그리움에 한번 잊기가 어려웁고 이제 서로 나누이면 두번 만남 어려우리

내일 아침 떠나려니 이밤 새우기 어렵고 잔들어 이별할제 새 이슬 먹기 어려워라

내 심정 안타까워 눈물 참기가 더 어렵고 네 노래 서글퍼서 목 아니 메기 참 어려워라

그 누가 말했듯 촉나라길 오르기 하늘보다 어렵고 애끓는 오늘 이시간 참으로 어려워라

                                                               - [양녕대군]과 평양기생 [정향]의 이별가

 

 

 

하루밤 사랑에 밤새워 정향의 치마폭에다 아름다운 詩를 남기고 터질듯 영글은 가슴에 풋풋함 담아내며

동트기 무섭게 한지에다 九難歌를 남기어 주는 아름다운 사랑이었다.
기생 정향은 한양으로 와서 죽을 때까지 양녕대군 곁에 머물며 손발이 되어 주고

불나비가 되어 모두를 주었답니다
오로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

~

~


정녕 내게는 왜 이런 사랑이 오지 않을까?

春情을 못잊어 한 가지 꺾었네

꽃

을 보았으면 꺽지를 말고 꺽었으면 버리지를 말라
어느 곳에서 행복을 노래하며 사는지 모르지만 문득 세월 지나면 케케묵은 수줍은 추억이 솟습니다. solsae kns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년 ~ 1462년)

이름은 제(褆), 자는 후백(厚伯). 어머니는 민제(閔霽)의 딸이며, 부인은 김한로(金漢老)의 딸이다.

1402년(태종 2) 원자(元子)로 봉해졌으며 1404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09년 이후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일정한 범위 내에서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나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직후부터 학문에 게으르고 무절제하다고 하여 태종에게 지적을 받았으며

나이가 들면서 방종이 더욱 심해져 태학(怠學)·정강(停講)이 계속 되었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맏아들로 일찍이 세자에 책봉이 되었으나

결국 셋째인 충녕대군(세종대왕)의 현명함을 알아채고는 둘째인 효령대군과 함께 왕위를 양보한 인물이다.

그는 왕위에서 물러난 후 호방한 무리들을 모아 토끼를 몰고 여우를 잡는 등

날마다 사냥을 일 삼았고 시와 여인을 사랑하고 팔도를 유람하는 진정한 풍류객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일로 여러번 탄핵을 받았으나 아우 세종의 덕에 무사했다  

.

세종 즉위 후 얼마 뒤 양녕대군은 임금에게 평안도를 다녀오겠다고 하였으나 세종은 그곳에

어여쁜 여인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이를 만류 하였다.

그러나 끝내 양녕대군의 뜻을 꺾지 못한 세종 임금은, 만약 형님이 색을 조심하고 탈 없이 돌아온다면 돌아오는 날

잔치를 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형님의 性情을 잘 아는 세종은 평안도를 다녀오면서 술이나 여자를 대하지 못한다면 양녕에게 필시

한이 남을 것이라 생각하여 비밀리에 미색을 동침시키라는 어명을 내린다.

그러자 감사는 미색이 평안도에서 으뜸이고 기특한 꾀가 있는‘정향’이라는 기생을 준비하였다.

그리고는 이튿날 객사의 정남쪽에 울담 한 곳을 허물어서 마치 비바람에 손상된 것처럼 꾸미고 집 한 채를 수리하여

그녀가 거처할 집을 만들어 놓았다.

 

객사로 들어와 사방의 두루 살펴 바라보니 풍경이 몹시 아름다웠다.

이어서 감사가 진수성찬으로 큰 상을 내 왔지만 양녕대군은 마음이 영 통 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때 담이 무너진 곳으로 부터 고양이 한 마리가 닭다리를 물고 앞으로 달려와서

양녕대군이 앉아 있는 마루 밑으로 들어 가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어떤 여자가 장대를 들고 고양이를 쫓아 오자 포졸들이 꾸짖자 멈 추었다.

나이는 17~18세쯤 되어 보였는데 용모가 아주 뛰어났다.

그녀는 소복을 입고 뜰 아래에 꿇어 앉아 울며 하소연 하기를 ...

 “소녀는 금년 18세이옵니다. 남편을 잃고 혼자 산지 반 년도 못 되었는데 저 요망한 고양이가  

죽은 남편의 상식에 쓸 닭다리를 물고 가기에 분한 나머지 지엄하신 분이 마루에 계신 줄도 모르고 그만

이렇게 죽을죄를 지었으니 죽을 목숨을 살려 주시기를 비옵니다.”

꾀꼬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구슬피 우는 여인의 말 한마다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고운 자태의 모습에서 눈물은 뺨을 적시는 것을 바라보는 양녕의 마음을 녹이고 있었다.

포졸들이 꾸짖고 있었으나 양녕대군은 잘못을 묻어 주고 그녀를 그냥 보내 주었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객사에 홀로 앉아 있던 양녕은 오직 고양이를 쫓아 온 젊은 여인 생각 뿐 이었다.

밖으로 나와 산보를 하였으나 소복을 입은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가 끊임없이 어른거렸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서 완연하였고 잊으려고 해도 잊기 어려워 주체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양녕대군은 아무도 모르게 사립문을 열고 그녀의 집에 들어 가서 등불이 문 틈으로 새 나 있는 곳으로

들여다 보니 참으로 꽃이 부끄러워 할 미색이었다.

一見에 春心이 발동하여 갑자기 방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그를 보고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이에 양녕대군은 자신은 낮에 본 대군이라 소개하며 그녀에게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양녕대군에게 이렇게 말 하기를 ......

“소첩이 비록 어리석다 하더라도 어찌 대감의 존귀함을 모르오리까. 다만 소첩의 지아비가 혼례를 올린 지

몇 달 만에 갑자기 죽었는데 이 몸을 다시 돌아보면 큰 인륜이 이미 정해졌기에 삼가 비옵건대 대감께서는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시어 절개를 끝까지 지키도록 해주옵소서"

그리고는 벽에서 은장도를 뽑아 자결하려고 하였다.

이에 양녕대군은 황급히 그 칼을 빼앗아 던지고 그녀의 눈물을 씻어 주며

"이런 가련한 인생이 있던가 네 나이 몇인데 백년을 헛데이 늙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비천하다 하여 가문의 부끄러움이 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

그녀를 이대로는 놔주기가 너무 아까워 이렇게 간청했다.

“네가 거절하면 내가 병이 날 것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너는 내 목숨을 구해 주지 않을 셈이냐”

양녕대군의 말을 들은 그녀는 결국 소원을 들어 주기로 하고 그녀와 동침을 허락 하였다.

 

그날 밤 정향과의 동침은 마치 선녀와의 하룻밤 처럼 달콤하고 황홀하였다.

이후에도 대군은 남몰래 그녀를 찾아왔고 밤마다 온갖 교태로 대군을 기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兄을 생각하는 世宗이 꾸민 일임을 까맣게 모르는 양녕대군이었다.

대군은 어느덧 그녀에게 빠져 들었고 때는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계절이었다

양녕대군은 성천으로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자 마음을 먹고 정향에게 사실을 말 하였다.

이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대감께서 한양으로 돌아 가시는 날 소첩은 함께 따라 가서 밥 짓고 물 긷는 여비가 되어 일생을 마치겠습니다.”

그러나 동생과의 한 약조를 어길 수 없었던 양녕은 이를 거절하게 된다

그러자 정향은 흐느껴 울며 정인의 표시로 자신의 치마폭에 시조를 남겨 달라는 부탁을 한다.

양녕대군은 이별의 슬픔을 담은 시 '九難歌'를 치마폭에 써 주고는 다른곳으로 무거운 발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한양에 돌아온 양녕에게 세종은 큰 연회를 베풀어 주었으나 아무 것도 들어 오지가 않았다.

그런 양녕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던 세종은 정향을 불러들여 양녕대군의 시를 노래하게 하였다

시조를 들은 양녕대군은 어리둥절하자 세종은 그간의 사연을 이야기 하였고 

이렇게 하여 양녕대군은 세종의 배려로 사랑하는 여인 정향과 함께 백년해로 하였다고 한다.

 

 

 

 

왕이 되지는 못 했지만 시를 읊고 사냥도 하고 女色을 즐기며 인생을 제 멋대로 좌충우돌하며 

한 세상 살다간 양녕은 다행히 천수를 누렸는데

만일 당시 세종이나 세조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必雲을 격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대목이다

양녕은 27명의 수많은 자손을 남기고 떠나면서 . . . .

'나라의 예장을 받지 말며 묘비도 세우지 말 것이며 상석도 놓지 말고 산소 치장을 극히 검소하게 하라.' 하였다 

 

 

- > 상도동에 있는 양녕대군의 墓에 비석과 石物은 후에 후손들이 하였다고 한다. k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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