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기녀 홍량의 묘

시인김남식 2020. 9. 23. 13:14

妓女홍랑과 최경창의 묘  김남식

천일야사에 나오는 홍랑의 러브스토리 그의 묘를 찾아가 보자

홍랑의 묘는 최경창과 함께 경기도 파주시 다율동 야트마한 야산에 있다.

이곳은 해주 최씨 묘 10여 기가 있는 宗中山으로 본디 파주군 월롱면에 있다가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지금의 장소로 이장했다고 한다.

 

이곳을 찾아 가려면 승요차는 다율동 파주지역난방공사, 유가설농탕 집을 찾아오면 된다

대중교통은 경의선 운정역 1번 출구에서 80번 버스를 타고 파주지역 난방공사앞에서 하차하면 된다

 

운정역에서 약 25분 소요되며 차에서 내리면 온통 공사중이고 바로 앞에 보이는 곳이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이던 마을과 들판은 없어지고 2020년 현재 지금은 토지구획정리 중으로

이삼년 후에는 새로운 환경에 속에 있게 되는데 향후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맨위는 고죽 최경창과 부인 선산 임씨 합장묘 아래 기생 홍랑묘가 있고 맨 아랫 쪽은 후손이다

홍랑묘에는 詩人홍랑지묘의 부표와 그가 남긴 시조 한편과 최경창의 시조가

초입에 양면으로 색인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묘가 최씨 문중에서 잘 보존 관리하고 있다. 

 

홍랑은 함경도 경성(鏡城) 관아에 소속된 기생으로서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으로 자신의 사랑을 바칠 사람을 기다리며 정절을 지켰던

그래서 아무에게나 꺽이는 길가의 버들가지가 아니었다.

최경창과 막사에서 6개월 가량 동거를 하다가 한양(漢陽)으로 돌아가게 되자

할 수 있었던 것은 눈물로 밤낮을 지새우는 것 뿐이었다.

 

사모의 정을 가슴에 품고 두사람은 함관령(咸關嶺) 고개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 때 남긴 홍랑의 시조 한 수가 조선조 문학사 중 가장 애절한 연정가(戀情歌)로 알려진 시조이다.


묏 버들 가려 꺽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닢 나거든 날인가도 녀기소서

 

최경창은 무거운 발길을 돌리며 아래와 같이 답가(踏歌)를 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홍랑(洪娘)은 최경창을 일평생 한, 두번을 만났을뿐인데

그녀의 애절한 사랑은 죽어서도 최경창의 애첩이 되었다.

 

고운 빰에 눈물지며 봉성을 나올 적에

새벽에 울짖는 꾀꼬리소리 더욱 서러워

말 위에 비단 적삼을 강 건너에 남겨 두고서

풀잎은 아득한데 나 홀로 떠나야만 하는가

 

그대 보내기 아쉬워 보고 또 보며

그윽한 난초 건네니 이제 떠나면

그 머나먼 곳 어느 날에 다시 만날까?

함관령의 옛날 노래 다시 불러 무엇하리

지금도 궂은비 내려 첩첩 산 길 어둡겠지

 

 

고죽 최경창은 조선조 선조때의 인물로 학문과 시에 뛰어나 이율곡과 함께 문장가로 알려졌으며

29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처 1573년 (선조 6년)에 함경도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여

이곳에서 홍랑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홍량과 6개월 동거후 헤어진 그뒤 최경창은 우여곡절 끝에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가

함경도 종성부사를 거쳐 1583년 (선조 16년) 방어사 종사관에 임명되어 한양으로 올라오던 중

1583년 45세에 병환으로 객사(客死) 하였다.

헤어진지 7년만에 이 소식을 듣고 홍량은 한양으로 올라와서 시묘(侍墓)를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끓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례를 마치고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임진왜란의 변란속에서도 고죽의 시를 온전히 보존하였다가 고스란히 가족에게

전했다고 하는데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은 생애 함께 한 6개월이었고 헤어 진뒤

딱 한 두번 만났을 뿐인데 그의 묘가 가족들에 의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천일야사 홍랑의 러브스토리

 

조선조(朝鮮朝) 관기(官妓)였던 홍랑의 기록은 아무데도 없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으며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다.

그의 연인 최경창은 1539년에 태어나 1583년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세조 때 인물이다.

홍랑은 1556년 쯤 태어나 최경창과 비슷한 나이로 살다가 최경창의 묘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은 극히 짧았다. 생애 동안 함께 산 기간이 6개월이었고

헤어 진 뒤 오직 딱 한 번 더 만났을 뿐이다.

홍랑이 최경창에게 준 시조 한 수는 조선조 문학사 중 가장 애절한 연정가(戀情歌) 로 알려져 있다.


홍랑은 함경도 경성(鏡城) 관아에 소속된 기생이었다.

최경창은 호는 고죽(孤竹). 학문과 시에 뛰어나 이율곡과 함께 문장가로 알려졌다.

최경창은 29살에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거쳤다.

그러다가 34세가 되던 1573년 (선조 6년)에 함경도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한다.

군사 시설 구축 등의 임무를 돌보는 문관이었다.

최경창이 경성에 부임하면서 홍랑과 최경창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홍랑은 비록 기생이란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으로 자신의 사랑을 바칠 사람을 기다리며 정절을 지켰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꺽이는 길가의 버들가지가 아니었다.

이런 홍랑 앞에 최경창이 나타났고 시와 풍류를 아는 젊은 관리 최경창에게도

재색 을 겸비한 홍랑이 예사 여인으로 보이질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바로 정신적인 교감으로 이어졌고 깊은 사랑으로 이어져

최경창은 홍랑을 군사 작전 지역인 막중(幕中)으로 불러들여 동거를 했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국방의 요지인 군사 지역이었기 때문에

최경창은 처자가 있었 음에도 홀로 부임을 했다.


이듬해 봄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두 사람의 꿈같았던 사랑은 겨우 6개월 만에 끝이 났다.

갑작스레 다가온 이별 앞에 홍랑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눈물로 밤낮을 지새우는 것 뿐이었다.

최경창이 경성을 떠나는 날 홍랑은 잠시라도 더 최경창과 함께 하고 싶어

서울을 향하는 최경창의 뒤를 따랐다.

험한 고개를 몇 구비를 며칠에 걸쳐 넘고 넘어 드디어 함관령(咸關嶺) 고개에 이르렀다.

당시의 기생은 관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가슴에 품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 때 남긴 홍랑의 시조 한 수가 바로 조선조 문학사 중 가장 애절한

연정가(戀情歌)로 알려진 바로 그 시조다.


묏 버들 가려 꺽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닢 나거든 날인가도 녀기소서.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 홍랑도 울고 최경창도 울었다.

홍랑은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체 길 가의 버들가지 하나를 꺽었다.

그리고는 연인 에게 정표인양 전해주며 이 연정가를 읊었다.

버들가지는 잎이 시들었다가도 땅에 심으면 다시 싹이 나오는 나무다.


최경창과 헤어진 뒤 홍랑은 오직 연인을 향한 그리움의 세월을

눈물로 보냈지만 다시 만날 기약 조차 없다.

최경창은 서울에 온 2년 뒤 병들어 자리에 눕게 됐다.


풍문으로 최경창의 소식을 들은 홍랑은 만사를 제쳐놓고 서울로 떠났다.

밤낮 쉬지 않고 걷고 걸어 7일 만에 서울에 닿았다.

홍랑은 잠시도 최경창의 곁을 떠나지 않고 연인의 병수발을 들었고

최경창은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나 최경창이가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소문과 함께 홍랑은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사헌부가 최경창의 파직을 상소했다.


당시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은 서울 도성 출입이 금해져 있는데

홍랑이 그걸 어겼다는 것이다.

여기다가 설상가상으로 명종 왕비인 인순 왕후의 국상 기간이라 최경창의

처신은 더욱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상 중에 첩을 집으로 불러들였다는 구실이었다.

결국 홍랑은 다시 경성으로 쫒겨 가고 최경창은 파직을 당했다.

두 사람의 두 번 째 이별이었다.

그러나 이 이별이 이승에서 두 사람의 마지막 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최경창은 다시 복직은 되었으나 변방의 한직으로만 떠돌았다가

1583년 최경창이 44세가 되던 해 지방의 근무지에서 객사를 한다.

홍랑과 서울서 헤어진 지 7년만이었다.

함경도에서 일편단심 최경창과 만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홍랑에겐 죽음은 절망 그 자체였다.

몸 조차 가눌 수 없는 형편으로 통한의 한을 가슴에 품고 다시 걷고 걸어

홍랑은 최경창의 장례에 참석했다.

그리고 장례가 끝한 뒤 홍랑은 최경창의 묘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죽어서나마 임의 곁에 함께 있다는 것이 홍랑에겐 행복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여인이 산 속에서 혼자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얼굴에 칼로 여러 군데 상처로

흉한 모습에 몸도 가꾸지 않고 오직 최경창의 묘를 돌보는 데만 일생을 걸었다.


시묘살이는 3년을 지나고도 홍랑은 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최경창의 혼령과 함께 살다가 생을 마치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랑은 최경창이 남긴 모든 글들을 챙겨 품에 안고

다시 함경도로 피난했다.

임진왜란 7년 동안 홍랑은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 길이 없다.

오직 사랑을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쳤던 홍랑은 전쟁이 끝나자

해주 최씨 문중을 찾아가 자신이 보관했던 최경창의 글들을 전해 주었다.


참혹한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온 국토가 황폐화 된 전쟁 중에서도

최경창의 시와 문장 들이 지금까지 남아 온전히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씨 문중에 글을 전하고 홍랑은 다시 최경창의 묘소로 돌아와

그 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끓어 생을 마쳤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문중의 한 사람으로 받아드려

후한 장례를 치렀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 아래에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정조를 지키기 위해 얼굴에 상처를 낸 기생 홍랑  천일야사 
https://youtu.be/wrWWN8pWO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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