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경주유적 답사여행

시인김남식 2021. 11. 23. 07:29

경주유적 답사여행 솔새김남식

 

코로나 때문에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게 지루했기에 혼자 떠나는 뚜벅이 여행이다

아침 06시 기차를 타고 신경주역에 08시05분 도착을 했다

시내까지 택시를 타면 15,000원. KTX비용과 함께 과도한 교통비가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역전에서 10여분 기다리니 차가 도착을 해서 61번 버스를 타고 20여분 후 무열왕릉에서 하차 했다

하늘이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였고 길 건너편으로는 대구 경주 철길에는 기차가 지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큰길 옆에 있는 김인문묘를 우선 참관했다

김인문(金仁問, 629년~694년)은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문무왕의 친동생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당나라에서 사망하여 사후 시신은 신라로 이송되어 장사(葬事)되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삼국통일을 달성한 김춘주로 알고 있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2년 ~ 661년)릉

그는 신라(新羅) 제29대 임금으로 어머니는 26대 진평왕의 딸이자 27대 선덕여왕의 동생으로 이모가 된다

아버지는 25대 진지왕(眞智王)의 아들 김용춘이고 고조부가 진흥왕이다

 

왕릉은 통일신라의 업적과는 다르게 봉분 장식이 소박한 편이고 모표와 다른 시설이 없는

평범한 원형 토분 주변에 자연석으로 둘레를 돌을 돌렸고 왕릉을 알려 주는 거북이 비석이 있다

무열왕릉(武烈王陵)의 뒤쪽 언덕에는 대형 분묘 4기가 상하로 줄지어 있는 서역리고분이 있다

무열왕의 첫째 부인은 산후병으로 일찍 요절 했고

둘째부인 문명왕후(文明王后)의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김유신의 누이이고

세번재 부인 영창부인도 김유신의 누이로 문명왕후의 언니이다

그리고 무열왕의 딸 지소공주 김씨(智炤公主)는 외삼촌 김유신이 60살 되던해 결혼을 하여

외삼촌이 남편이고 처남이 사위가 되었고 두번재 부인에서 난 딸 요석공주는 원효대사와 결혼을 했다

역사를 돌아보면 당시는 어쩔수 없는 졍략 결혼이 많았다

가을 날씨는 참 따뜻하여 고분이 바라다 보이는 연꽃이 진 호숫가 의자에 앉아 간식을 먹었다

선도산으로 오르는 마을 길을 10여분 올라가면 헌인왕, 진지왕, 문성왕 그리고 진흥왕릉이 있는데

봉분 이외에는 전혀 다른 시설이 없는 평범한 원형 토분이 주변으로 소나무 숲과 함께 있다

구절초가 피어있는 산 아래 서약동 삼층석탑 주변으로 다시 몇개의 고분이 더 있었다

마을로 내려 오면서 도봉서당이 있고 더 내려오면 서약서당이 있어서 잠시 들려봤다

무영왕릉앞에서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지나서 천마총 앞에서 내렸다.

여기서 삼릉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없어서 그냥 택시를 탔다 택시비는 9,000원

 

삼릉휴계소에서 신라 제55대 경애왕(재위924∼927)의 무덤을 찾아갔다

무덤은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 안에 있으며 일반 무덤와 같이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

경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재위 4년이 되던 해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다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고 하는데 다른 이견도 있는 것 같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라가 점점 쇠퇴하기 시작은 것은 36대 혜공왕 (재위756~780)때라 한다

8살때 왕위에 올라 태후가 섭정을 시작하면서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왕권이 넘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정사를 외면하고 쥐색에 빠진 혜공왕은 김지정등 반란군 병사들에게 피살되자

김양상이 난을 평정하고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이가 선덕왕(재위780~785)이다

그런데 그들은 왕과 신하의 관계였다

결국 태종 무열왕에 의해 태평성대가 성립된 진골계 왕실은 8대 126년 만에 막을 내리면서

그 이후 왕권은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그것도 정상적인 왕위 계승이 아니고 피살, 자살, 탈권등 이었다

 

그리고 150년이 지난 신라말 927년 경애왕때 후백제의 피습으로 나라는 최대의 국란에 빠져든다

대를 이어 받은 경순왕은 어찌하든 나라를 재건하려고 애섰지만 이때는

궁예와 견훤이 대립하여 국토를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던때라 이미 국운은 기울고 있었다

경순왕(재위927~935)은 스스로 나라를 안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리고 여러 신하와 더불어 935년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

나라가 건국하고 전성기를 지나면 자연스레히 쇠퇴기 멸망기를 맞이하게 된다

어느 나라든 건국이 있으면 패망이 있듯이 어느 때 부터인가 서서히 나라가

쇠망의 길로 들어서면 민심이 떠나고 부폐의 주변으로 새로운 형태가 조성이 된다

국운(國家運命)은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서 서서히 들어난다

그래서 마지막 왕에게 그 원죄를 모두 덮어 주기에는 가혹하다는 견해이다

역사에서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망국의 한을 안고 죽음을 맞이했던

백제 의자왕, 고구려 보장왕, 고려 공양왕과는 다르게

물론 천년사직 신라를 고려에 넘겨줬다는 역사적 오명을 경순왕은 뒤집어 쓰긴 했지만

피해를 줄이는 평화적인 것을 선택했다

아무튼 천년의 역사를 지속한 나라는 전세계서 신라밖에 없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이어서 바로 근거리에 있는 삼릉을 찾아 갔다

숲길로 들어서면 인상적인 경주 남산 소나무들이 참 멋지게 왕릉 주변에 있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 한 곳에 모여있는 모두 박씨 왕릉이라고

전하는데 8대와 53대는 무려 약 700년의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한 곳에 모여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으니 차를 탈 수 없어서 여기서 포석정까지 20여분을 걸어서 도착을 했다

가는 길에 남산자락이 보였지만 시간이 없어서 산에 오를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夜雪에서 술 잔을 포석정(鮑石亭) 물에 띄워서 술잔이 자신에게 돌아오기 전

시를 지었다고 하는 이곳대한민국의 사적 제1호이다

원래 신라의 별궁이 있던 자리로 사실은 유흥을 즐겼기도 했겠지만

수많은 불적지(佛蹟地)가 많기로 유명한 남산의 신에게 제사 지냈던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은 건물은 없어지고 석조 구조물만 남아 있고 주위에 아름다운 경관이

독특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지만 사실은 패망의 흔적이 애잔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고목의 가을 단풍이 바람에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고 많이 걸어서

이제는 다리가 조금씩 아프고 기운이 떨어진다

그래서 버스를 기다렸다가 좌석버스를 탔는데 승객이 나 혼자였다

두 정거장을 지나서 오릉에서 내렸다

 

오릉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박혁거세의 왕후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으로 겉모습은

시내에 있는 다른 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 봉토 무덤으로

주변에 제향공간인 숭덕전이 함께 있다

숭덕전은 조선 세종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때 다시 지었고 이후 1759년 영조때

박혁거세와 숭덕전의 내력을 적은 신도비가 있으며 박씨 문중에서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오릉을 나오니 19,500 걸음 너무 걸어서 발이 너무 아프다

다시 10여분을 걸어서 시내로 흐르는 작은 개천 남천을 돌다리를 건너 월정교를 둘러보고

이어서 조선시대의 많은 고택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경주최부자집. 향교등

교촌 마을은 경주 신라시대의 민속촌이었다

그리고 왼쪽으로 반월성을 비롯하여 발굴하는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이어서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설화를 간직한 경주계림(鷄林·사적 제19호)을 찾아갔다

탈해왕 4년금성 서쪽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금으로 된 궤짝에서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하늘에서 아이를 보낸 것으로 믿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고 알지라 이름을 지으니

알지는 곧 우리말의 어린애를 뜻한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파사(婆娑)에게 사양하여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이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신라 13대 미추왕이다

회화나무와 왕버들, 팽나무와 느티나무 등이 환한 햇살 아래 저마다 멋을 뽐내는 계림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다정하게 방문객을 반기는 느낌이었고 숲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개울이

정감을 더해주는데 오래된 고목들로 고풍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이곳은 조용하면서도

가을 단풍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서울의 고궁 느낌이었다

느린 걸음으로 계림을 돌아보면 번잡한 도심에선 맛볼 수 없는 적요함이 좋았고 때로는

지난 날을 돌아보며 조용히 사색에 잠기는 시간도 현대인들에겐 필요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조 3년(1803년)에 세워졌다는 '경주 김알지 탄생기록비(慶州 金閼智 誕生記錄碑)'는

육각형의 비각으로 계림의 내력과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기록 되었다

왼쪽으로 반월성을 비롯하여 발굴하는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계림 뒷편에 있는 내물왕릉을 둘러보고 첨성대로 향했다

여기서 부터는 유적지가 집결해 있는 경주 대릉원과 향리단길 등 먹거리가 있는 곳이다

코로나로 외출이 어려울 때지만 남녀노소들이 거리로 가득하였다

오늘 하루 종일 걸었더니 이제 정말 진짜로 다리가 아프다

그래도 기운을 차려서 첨성대에서 사진 몇장을 찍고 대릉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여러개의 고분들이 있었고 무덤 내부를 공개한 천마총을 들렸다

경주시내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때 군데군데 집들 사이로 거대하게 우뚝우둑 솟아 있는 고분들이 신기하고

그리고 지금부터 천년도 더 넘은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과 오늘에 사는 사람들과 한데 어우러져

서로 공존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비감이 더 해지는 곳이 바로 경주이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5시가 넘어섰고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터미널앞 경주빵집에서 보리빵을 샀는데 맛은 있는데 가격이 고급이었다

시내 버스를 타고 신경주역에 도착해서 6시 KTX열차를 타고 서울에 8시 도착했다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오는 길목이 다리가 아파서 멀고 지루했지만 오늘 여행답사는 참 잘 했다

 

 

https://tv.kakao.com/v/424135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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