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朝鮮王陵)
정리 솔새김남식
조선왕릉은 조선시대(1392~1910) 왕실과 관련되는 무덤은 ‘능(陵)’과 ‘원(園)’으로 구분되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가 있다.
보기 드물게 긴 역사를 가진 왕조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백 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 왕릉이라 한다.
陵, 園, 墓의 구분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분을 일컫는다.
현재 온전하게 남아있는 서울 근교의 왕릉은 40기, 원은 13기이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조선시대의 국가통치 이념인 유교와 그 예법에 근거하여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공간의 크기, 문인과 무인 공간의 구분, 석물의 배치, 기타 시설물의 배치 등이 특색을 띠고 있다. 특히 왕릉의 석물 중 문인석, 무인석의 규모와 조각양식 등은 예술성을 각각 달리하며 시대별로 변하는 사상과 정치사를 반영하고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뛰어난 문화유산에 속한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하나의 우주세계를 반영하도록 조영되었다. 능역의 공간은 속세의 공간인 진입공간(재실, 연못, 금천교), 제향공간(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그리고 성역공간(비각, 능침공간)의 3단계로 구분되어 조성되었는데,
이는 사후의 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이다. 조영 당시부터 계획적으로 조성되고 엄격하게 관리된 왕릉 내부와 주변의 녹지와 산림은
당시에도 주요한 생태계로 작용하여 왔으며, 특히 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되고 있는 현대 한국의 대도시 서울 주변 지역의 생태적 안정성과 종 다양성을 보장하는 주요한 생태계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산릉제례는 조선왕조 60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상인 유교의 충과 효를 상징하는 예제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 오늘날까지 왕실 후손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는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터 잡기의 藝術
조선 왕릉의 터를 잡을 때에는 풍수상의 길지를 택하기 위해 신중을 다했다. 풍수에 밝은 지관이 몇 군데 후보지를 골라서 최종적으로는 임금이 가장 좋은 조건의 터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현재 많은 왕릉이 자리 잡은 도성 안팎의 장소들은 각 시대 여건에서 판단한 가장 이상적인 장소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릉을 조영할 때에는 가급적 본래의 지형 조건을 훼손하지 않고 지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최소한의 인공적인 시설을 설치하려는 자세를 갖추었다.
조선 왕릉의 조영 법칙
조선시대 왕릉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 형태는 능에서 정기적으로 치르는 각종 제례 절차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적절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왕릉은 다른 주변의 시설로부터 격리시켜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두 겹 정도의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았으며, 능 근처에는 제례를 준비하는 재실을 마련하였다. 재실을 지나 숲길을 따라가면 물길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만나고, 능역을 상징하는 홍살문을 통과하여 능역의 중심부로 접어들게 된다. 봉분 앞에는 다양한 석물과 문, 무석인 등의 기본적인 구성이 갖춰진다. 조선 왕릉은 이러한 기본적인 구성을 유지하면서 지형조건, 시대적 배경 등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어 왔다.
조선 왕릉의 문화적 가치
조선 왕릉은 유적지로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가치를 수반한다. 왕실의 장례와 제례는 엄숙하고도 완벽한 예법에 따라 행해졌으며, 이 예법의 절차와 의미, 이에 포함되는 다양한 의물들은 각기 당시의 사상과 문화를 고찰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야기를 걸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릉 조영 절차를 포함한 모든 의례 절차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있는데 이 기록물들은 자체만으로도 큰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왕의 삶과 죽음, 장례 절차, 왕릉의 조영을 살펴보면서 조선시대 왕실 문화와 그들의 정신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기준
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에서 정하고 있는 10가지의 보편적인 가치 기준 가운데 아래의 세가지 기준을 충족하였다.
첫째, 기준 3 문화적 전통 또는 살아 있거나 소멸된 문명에 관한 독보적이고 특출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 와 관련하여 조선왕조 특유의 세계관, 종교관 및 자연관에 의해 타 유교 문화권 왕릉들과 다른 자연친화적인 독특한 장묘 문화를 보여준다.
둘째, 기준 4 인류 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는 건조물의 유형, 건축적 또는 기술적 총체 또는 경관의 탁월한 사례이어야 한다. 와 관련하여 5백년 이상 지속하여 만들어진 조선왕릉은 당대의 시대적 사상과 정치사, 예술관이 압축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공간구성과 건축물과 석물 등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독창성이 뛰어나다.
셋째, 기준 6 탁월한 보편적 중요성을 보유한 사건 또는 살아 있는 전통, 사상, 신념, 예술적/문화적 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 와 관련하여 국가 제례가 정기적으로 이어지고 있고, 왕의 신위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 종묘가 설립되어 조상숭배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 왕릉의 조형 예술적 가치
이런 보편적 가치와 함께 조선왕릉 만이 갖는 고유한 가치 또한 지나칠 수 없다. 무엇보다 조선왕릉은 그 전체 형태나 석물의 예술적 표현에서 고유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능묘와 견주어 알 수 있듯이 조선왕릉의 봉분 축조방식이나 원장설치, 각종 석물배치는 주변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문무인석의 조형이나 호석과 난간석은 조선왕조 조형예술에서 달성한 독특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홍살문에서 향로를 따라 이어지는 참도와 참도 끝에 놓인 정자각의 단순하면서 절제된 건축형태는 조선 왕릉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엄숙하고 독특한 조형세계이다.
풍수 이론에 대한 고유한 해석
풍수 이론에 대한 조선 고유한 해석과 적용도 조선 왕릉이 보여주는 문화적 특징이다. 조선 왕릉에 적용된 풍수이론은 한반도의 지리특성이 고려된 조선 고유한 방식으로 구현 되었다. 중국처럼 지리적 약점을 인공적인 구조물로 보완하려는 방식 대신에 자연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조건에 구조물을 맞추어나가는 자연친화적인 방식을 선택하여 그 가치와 독창성을 더한다.
조선 왕릉과 함께 하는 기록 문화
조선 왕릉과 관련한 풍부한 기록물 역시 주목할 가치이다. 능원을 조성하면서 작성한 산릉도감의궤는 석물의 배열이나 정자각의 조성과정은 물론 산릉조성을 위해서 흙을 지어 나르는데 참여한 단순노역자의 이름까지 작성한 모든 문서가 남아있다. 산릉도감의궤는 왕릉이 만들어졌을 때의 모든 내용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따라서 설령 왕릉 중 일부가 불의의 사고로 훼손되거나 본래 모습을 상실했다고 해도 이들 의궤를 통해서 원래 모습으로 복구하는데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산릉도감의궤라는 뛰어난 기록물이 있음으로써 조선 왕릉은 그 물리적 진정성을 견지할 수 있으며 이것이 조선 왕릉이 갖는 고유한 가치의 또 다른 면이라고 생각된다.
6백년을 이어온 왕실의 제례
끝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6백년을 이어온 조선 왕릉의 제례이다. 1910년 조선왕조가 막을 내렸을 때 왕릉의 제례 역시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여건에 처했다. 그러나 전주 이씨 종약원이 어려운 소임을 맡아서 제례를 계속해 나갔으며 그것은 21세기에 접어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주 이씨 종약원은 왕릉 제례 외에도 종묘제례도 주관하면서 조선왕조의 무형적인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조선왕릉 40기》
▲ 정릉(사적 208호) : 제1대 태조계비 신덕왕후 강씨 : 서울 성북구 정릉동.
▲ 서오릉(사적198호) :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 경릉 : 제9대 성종사친 덕종 및 소혜왕후 한씨.
△ 창릉 : 제8대 예종 및 계비 안순왕후 한씨.
△ 명릉 : 제19대 숙종 및 계비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 익릉 : 제19대 숙종비 인경왕후 김씨.
△ 홍릉 : 제21대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
▲ 서삼릉(사적 200호) :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 효릉 : 제12대 인종 및 비 인성왕후 박씨.
△ 예릉 : 제25대 철종 및 비 철인왕후 김씨.
△ 희릉 : 제11대 중종계비 장경왕후 윤씨.
▲ 온릉(사적 210호) : 제11대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 광릉(사적 197호) : 제7대 세조 및 정희왕후 윤씨.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 동구릉(사적 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62.
△ 건원릉 : 제1대 태조.
△ 현릉 : 제5대 문종 및 현덕왕후 권씨.
△ 목릉 : 제14대 선조 및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 휘릉 : 제16대 인조계비 장열왕후 조씨.
△ 숭릉 : 제18대 현종 및 명성왕후 김씨.
△ 혜릉 : 제20대 경종비 단의왕후 심씨.
△ 원릉 : 제21대 영조 및 계비 정순왕후 김씨.
△ 수릉 : 추존 문조 및 왕후 신정왕후 조씨.
△ 경릉 : 제24대 헌종 및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
▲ 태릉(사적 201호) : 제11대 중종계비 문정왕후 윤씨. 서울 노원구 공릉동 산223-19.
▲ 강릉 : 제13대 명종 및 인순왕후 심씨.
▲ 홍릉(사적 207호) : 제26대 고종 및 명성황후 민씨.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 유릉 : 제27대 순종및순명황후 민씨, 순정황후 윤씨.
▲ 사릉(사적 209호) : 제6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 헌릉(사적 194호) : 제3대 태종 및 원경왕후 민씨. 서울 서초구 내곡동.
▲ 인릉 : 제23대 순조 및 순원왕후 김씨.
▲ 선릉(사적 199호) : 제9대 성종 및 계비 정현왕후 윤씨. 서울 강남구 삼성동.
▲ 정릉 : 제11대 중종.
▲ 융릉(사적 206호) : 추존 장조(사도세자) 및 헌경왕후 홍씨. 경기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 건릉 : 제22대 정조 및 효의왕후 김씨.
▲ 공릉(사적205호) : 제8대 예종비 장순왕후 한씨. 경기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 순릉 : 제9대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
▲ 영릉 : 추존진종 및 효순왕후 조씨.
▲ 장릉(사적 203호) : 제16대 인조 및 인열왕후 한씨. 경기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 장릉(사적 202호) : 추존 제16대 인조부 원종 및 인헌왕후 구씨. 경기 김포시 풍무동.
▲ 의릉(사적 204호) : 제20대 경종 및 계비 선의왕후 어씨. 서울 성북구 석관동.
▲ 영릉(사적 195호) : 제14대 세종 및 소헌왕후 심씨. 경기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 녕릉 : 제17대 효종 및 인선왕후 장씨.
▲장 릉(사적 196호) : 제6대 단종.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왕릉(王陵)의 공간구성
능역은 크게 능침(성역) - 제향(성역과 속세가 만나는 공간) - 진입(속세)의 세 공간으로 나뉜다. 풍수사상에 따라 능역 그 자체가 자연 환경의 일부라 생각되도록 조영하는 자연 친화적인 방식은 같은 동양권인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다. 능역의 크기나 봉분 조영 방식, 문 · 무석인 등의 석물과 기타 시설물 배치 등은 기본적으로 조선왕릉의 상설 제도(象設制渡)를 따랐으나 왕릉 조성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가감과 변화가 적용되었다. ‘상설’은 ‘형상을 설치한다.’는 뜻의 말로, 능역에 설치한 모든 시설물과 석물을 일컬으며, 이에 해당하는 배치 규범은 ‘상설 제도’라 한다.
상설 가운데 특히, 석물 곧, 병풍석과 난간석, 문 · 무석인 등의 크기나 조각 양식은 시대에 따라 그 예술성을 달리하여 조선왕릉을 시대적 정서를 읽어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능침(陵寢) 공간 : 능침 공간의 핵심이 되는 시설은 봉분이다. 봉분은 주변 산세와 지형에 따라 단릉 · 쌍릉 · 합장릉 · 삼연릉 · 동원이강릉 · 동원상하릉 등 다양한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왕릉 부분은 원형의 봉분 양옆과 뒤쪽 삼면으로 곡장을 두르고, 그 둘레에 소나무를 심어 봉분의 존재를 강조하였으며, 봉분 둘레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봉분을 수호하는 각 두 쌍의 석호, 석양을 세우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병풍석이나 난간석에 십이지상을 조각하거나 글씨로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연꽃, 모란 무늬 등을 새겨 아름답게 장식 하였다. 능침 공간은 가로 방향으로 장대석을 설치하여 3단계로 나누는데, 가장 위쪽은 선왕의 영혼이 깃든 상계이며, 그 아래 단(중계)은 문인의 공간, 맨 아래 단(하계)은 무인의 영역으로 표현되었다. 상계에는 곡장과 봉분, 석호 · 석양 · 혼유석과 망주석 등을 놓고, 중계에는 장명등과 문석인과 석마,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를 세웠다. 능침 공간은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므로 성역시 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다.
제향(祭享) 공간 : 산 자가 죽은 자를 맞이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가마에서 내린 왕 또는 제관이 배위에서 사배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례가 시작된다. 왕과 제관들은 참도(신도와 어도)를 따라 제수가 진설된 정자각으로 이동한다. 정자각 주위에는 축문을 태우는 예감, 능을 지키고 제수를 준비하는 수복방과 수라간, 비각 등이 있다.
진입(進入) 공간 : 평소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왕릉 관리인(능참봉이 책임자)이 머무는 재실이 있으며, 전사청이 있다. 재실을 지나 속세와 성역의 경계가 되는 금천교를 건너면 제향 공간이 시작되는 홍살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풍수상 비보를 위해 마련한 연못인 지당(池塘)이나 왕릉군이 있는 곳에 능역의 신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조성하는 외홍살문 등이 세워지기도 한다.
재실(齋室) : 능에 딸린 부속건물로 능을 지키는 참봉들이 지내는 곳, 또한 제기를 간수하는 곳이기도 하다.
금천교(禁川橋) : 배산임수의 풍수지리에 따라 물을 가로질러 놓은 다리, 사람과 신의 세계를 잇는다는 금천교,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다리라는 뜻으로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이 표시된 곳이다.
홍살문(紅箭門), 홍문(紅門)은 능, 원, 사당 등의 앞에 세우며,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놓고,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이 있다.
배위(拜位) : 홍살문 옆의 한평정도의 돌을 깔아 놓은 곳. 판위(板位), 어배석(御拜石), 망릉위(望陵位)라고도 함. 제향행사 등 의식 때 망릉례(제사를 지내러 왔음을 알리는 의식) 등을 행하는 곳이다.
참도(參道),신도(神道),어도(御道) :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돌을 깔아 놓은 길, 참도에는 임금의 혼령이 걷는 神道 (약간 높은 길), 제사를 지내려고 온 임금이 걷는 御道가 있다.
參道 왼쪽과 오른쪽에는 능 수호군이 거처하는 수복방(守僕房)과 참배 때 음식을 차리는 수라간이 있다.
정자각(丁字閣) : 정(丁)자 모양의 능의 앞 중심에 있는 건물로, 능에서 제례를 지낼 때 제례 음식을 차리고 모든 의식을 진행하는 곳이다.
신계(神階)는 혼령이 오르내리는 계단이고, 동계(東階)는 왕과 제관(祭官)이 오르내리는 계단이다. 오른발을 먼저 내 디뎌야한다.
서계(西階)는 제관이 축문을 태우기 위해 오르내리는 계단, 왼발을 먼저 내 디뎌야 한다.
비각(碑閣) : 정자각 잎이나 동쪽에 있다. 왕과 왕비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산신석(山神石)과 예감(叡感) : 정자각 뒤로 산신석과 예감이 있는데, 산신석은 산릉제례후 산신에게 제사지내는 장방형의 판석이고, 예감은 제향을 한 후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곡장(曲牆)은 봉분 정면을 제외한 전체를 담장으로 둘러쌓은 담을 말하고, 왕실의 묘인 능(陵)과 원(園)에만 설치한다.
병풍석(屛風石)은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이 병풍석이다. 병풍석은 인석, 만석, 우석, 면석, 박석으로 구분되고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에는 열 두 방향의 악재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난간석(欄干石)은 병풍석 바깥으로 띠 모양의 난간으로 빙 둘러싼 석물로서 석주, 죽석, 동자석주로 구분된다. 왕, 왕비릉에는 거의 다 있으나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릉이라는 말도 못쓸 뿐더러 (연산군 묘) 난간석도 없다.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왕을 지키는 영물들로, 밖을 향하여 언제든지 방비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양석(羊石)은 왕릉의 사악함을 물리친다는 의미와 명복을 비는 뜻을 담고 있으며,
호석(虎石)은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망주석(望柱石)은 먼곳에서 능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는 표지로서 혼령이 유택(幽宅)을 찾아오게 하는 안내 역할을 한다. 망주석에는 세호라는 것이 새겨져 있다.
혼유석(魂遊石)은 능 앞에 놓은 큰 직육면체의 돌로, 혼령이 나와서 쉬는 곳이다.
고석(鼓石)은 혼유석의 받침돌로 사악한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귀면(鬼面)이 새겨져 있다..
장명등(長明燈)은 왕릉의 장생발복을 기원하는 뜻으로 세웠다. 조선 왕조 최초로 만들어진 정릉의 장명등은 사각지붕이었는데, 초기에는 팔각지붕이다가 숙종 명릉부터 다시 사각지붕으로 양식이 변하였다.
조선후기 전에는 능침 주변은 초계(상계), 중계, 하계의 3개 권역으로 나누어지고 그 사이에는 계체석(장대석)이라고 하는 긴 띠모양의 돌로서 구분하고 있다.
초계에는 석양(양석), 석호(호석), 혼유석, 망주석을 배치하고,
중계에는 장명등, 문석인(문인석)과 석마(마석)을,
하계에는 무석인(무인석)과 석마(마석)을 배치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중계와 하계의 구분이 없어지고 문석인과 무석인이 같은 계단에 배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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