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세자로 살아가기 정리 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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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18년 동안 조선에는 모두 27명의 왕과 29명의 세자가 있었다.
조선국에서 세자로 살아 가기에는 고난과 고충 그리고 위험이 항상 따랐다.
왕비의 첫째 아들(적장자)인 원자가 세자로 책봉된 뒤 왕위에 오르는 것이 조선 왕실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왕위 계승의 실상은 달랐다.
실제 왕의 적장자로 세자가 된 뒤 왕위에 오른 이는 29왕 중에서
문종(세종父)과 단종(문종父), 연산군(성종父), 인종(중종父), 현종(효종父), 숙종(현종父), 순종(고종父)등
불과 7명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왕비의 왕자 출산이 뜻대로 되지 않은 측면도 있었지만,
후계자 선정을 둘러싼 권력집단 간의 갈등이 중요한 변수가 됐기 때문이었다.
적장자로 태어나 세자로 책봉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세자가 된 뒤에도 무사히 살아 왕위에 오르기 까지의 과정이 첩첩산중이었다.
태종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과 자신의 비행으로 폐세자가 됐으며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와 명종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와 효명세자는 왕위에 오르기 전 단명했다.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에 의해 독살당한 것으로 전하며
광해군의 세자 이지는 인조반정으로 인해 아버지가 왕위에서 쫓겨난 뒤 폐세자로 전락했다.
그래서 인조(광해군이 伯父)는 후한이 두려워서 유아인 어린 세자 이지(인조와는 사춘지간)를 사사했다
조선에서 어쩔 수 없거나 종법을 무시하고 동생이 형 대신 아우가 왕이 된 경우가 있는데
이방과(정종)와 이방원(태종),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세종), 의경세자와 예종, 연산군과 진성대군(중종)
인종兄과 경원대군(명종), 임해군兄과 광해군, 소현세자兄와 봉림대군(효종),
경종兄과 연잉군(영조)등 제법 많이 있지만
이방과는 계약직 임금이었으므로 둘의 사이는 형식적인 우애였고,
양녕은 조선 최고의 패륜아로 김종서가 사사하라는 주청까지 있을 정도로 개망나니였고
세종이 죽고 난 후까지 그 자손들을 괴롭혔으니 세종과는 사이가 별로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진성대군(중종)은 연산군 때문에 항상 두려움에 떨고 살았으며
반정 이후 조카들 넷을 사사하는 몰인정을 베품으로 절대적 사이가 나빴다
인종과 경원대군(명종)은 나이 차이가 20살로 상대가 안 되었을 것이고,
임해군은 양녕과 정안군은 조선 3대 개망나니로 광해군과는 당연히 사이가 무척 나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초반엔 형에게 충성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지만
청나라 볼모생활로 인해 서로 서먹해진 사이가 됐다.
그리고 경종만 혼자 지극히 아낀 연인군이 있던 반면 연인군은 어머니 숙빈 최씨가
희빈장씨와의 관계로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배반하는
면종 복배의 모습을 보여줬다.
연인군 英祖는 조선조 최장수 (83세) 임금으로 52년의 최고 재위 기간이었지만
첫째아들은 효장세자는 일직 단명했고 작은 아들 장헌세자는 뒤주에 가두어 사사하는 나뿐 아버지로
왕위는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에 아들 소헌세자(정조) 손자가 왕위를 이어갔다
대부분 사이가 좋은 형제들은 없었다.
하지만 월산대군과 성종은 이들과 달리 굉장히 우애가 깊었고 학식도 높고 인품도 훌륭하여
성종이 지극히 받들어 모시고 존경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군묘 중 월산대군의 묘가 으뜸이라고 한다.
정리 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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