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화순 조광조유배지

시인김남식 2009. 6. 22. 09:47

조광조(趙光祖 1482~1519년)와 기묘사화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전남기념물 제41호


조선의 문신이며 사상가이자 교육자이고 성리학자, 정치가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다.


조선중기 이상적인 개혁정치를 꿈꾸었던 조광조는 38살의 짧은 생의 마지막으로 보낸 곳이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金宏弼) 유숭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등을 단행하여 정치개혁을 하려다가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를 한다.


당시 남곤등이 조광조등에게 교류를 청하였으나 조광조가 허락지 않자 유감을 품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 네 글자를 써서 벌레를 놓아 먹게 하고는 자연적으로 생긴 것 같이 하였다.


​그리고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안 어구에 흘러 보내 중종이 이를 보고 놀라게 하고는

남곤등 훈구세력의 모함으로 조광조등 사림세력이 투옥되는 사건을 기묘사화라 한다

走 肖 爲 王

주초(走肖) 두글자를 합치면 趙가 되고, 위왕은 왕이 된다는 뜻으로 조광조가 반정을 모의했다는 것이다


중종이 조광조를 발탁한 이유는 훈구파를 견제하여 군주의 통치권을 되찾으려고 그에게 힘을 실어 주었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정치 초년생이 용기와 학문과 능력은 뛰어 났지만 사리를 잘 분별하지 못 하였다 


그로 인하여 기득권층의 거센반발을 불러왔으며 또한 중종에게조차 완벽한 도덕적 군주를 강요한 것이 패착이었다  


조광조는 33세의 나이에 권력을 장악하고 꿈을 앉고 등극하여 급진적 사회개혁을 추진했지만 당시의

정치상황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지 못하여 결국 4년 만에 그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 하게 된다


그를 추종하던 젊은 유생과 관리들이 많이 죽거나 귀양을 떠나야 했던 기묘사화 원죄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화순으로 유배 한 달 만에 사약을 받아 38살에 그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시신은 학포양팽손이 수습하여 가매장 되었다가 나중에 경기도 용인 선영에 안장 되었다

. 

조광조의 절명시 -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라 -


인종 때 복관되고 명종 때에 몇 번의 논란이 일다가 선조初에 기대승 등의 상소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667년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짖고 동춘 송준길이 글씨를 썼고 능주목사 민여로가 비를 세웠다



      조광조 유배지에서



그의 墓는 "광교상현IC"  전방 1키로 지점 신분당선 상현역 부근에 있다


                                                                        조부와 부친 그리고 형제등 주위에 선대의 묘와 함께 있다


조광조묘 부근에 있는 심곡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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