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다산유적지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 다산정약용선생유적지
소개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다산 유적지는 나라의 부패를 꾸짖던 선생의 쩌렁쩌 렁한 목소리와 꼿꼿하고 검소한 그의 생활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생가 여유당, 이백 년 세월의 흐름 앞에 절로 고개 숙여지는 다산의 묘,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업적과 자취가 전시된 다산기념관과 다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는 다산문화관이 있 다. 한 걸음이면 뛰어 넘을 것 같은 여유당의 낮은 담장에는 허물없이 백성들의 기쁨 과 아픔을 함께하고자 했던 다산 선생의 마음이 담겨 있다. 매년 9월 다산유적지에서 펼쳐지는 다산문화제는 다채로운 시민행사와 공연 등 모두 함께 어우러지는축제의 한 마당으로 다산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문화적 시각으로 재조명, 우리 문화를 통해 다산 선생을 직접 체험하는 시민문화축제이다.
위치 :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11
시설내용 : 다산 정약용선생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7호), 다산 정약용선생의 생가, 문도사(사당), 기념관, 문화관, 문화의 거리
전시물품 : 총4종 30점(동상, 영정, 목민심서등 저서, 거중기, 녹로, 디오라마, 영상자료 및 조형물)
상세 정보
여행스케치
다산 유적지 입구 '다산문화의 거리'에 다산선생의 얼이 느껴지도록 수원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 전시 및 동판에 선생이 집필하신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이 새겨져 있다. 다산 기념관 내에 들어서면 다산선생의 일대기를 디오라마로 연출하였으며, 생가에는 당시의 생활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연출되어 있다. 생가 뒤 나지막한 언덕위에 다산선생과 부인(풍산 홍씨)의 합장묘가 있다.
관람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1월~12월) (입장가능시간 : 오전 9시 ~ 오후 5시30분)
- 휴관일 : 신정(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 매주 월요일
입장료
무료
다산생가-여유당(與猶堂)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 있다. 그 옛날에는 이곳을 소내(苕川) 또는 두릉(杜陵)이라고 했고 다산의 5대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다산의 생가인 여 유당이 고졸한 자태로 은근히 나그네 유혹하지만 정작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는 곳은 여유당의 오른편을 돌아 뒤편 동산의 다산묘소이다. 다산은 여기서 세상을 떠났고 이 집 뒷산에 묻혔다. 모진 비바람에도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박한 護石의 보 호아래 부인 풍산 홍씨와 함께 조용히 누워있는 다산선생은 여유당을 휘감고 도는 한 강의 여유로운 흐름을 관망한다.
다산기념관
다산기념관에는 다산의 친필 서한 간찰(簡札) · 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 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실물 크기의 4분의 1 과 2분의 1크기의 거중기와 녹로가 눈길을 끈다. 97년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 으로 등재된 화성(수원성)을 쌓을 때 역학적인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데 사용되어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던 거중기와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일종의 크레인인 녹로는 바로 실학정신에 바탕한 다산의 설계로 제작된 기계이다.
다산문화관
다산 기념관 옆에 있는 다산문화관에는 다산의 인간적 고뇌와 삶의 철학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하여 다산의 꿈, 새로운 학문의 세계로, 유배지에서 그리운 마현, 새로운 조선의 발견, 다산 근대의 길 등 5가지 주제를 가지고 그래픽 패널로 전시하였고, 다산의 사상과 삶의 철학이 잘 드러나는 '다산의 삶'이라는 애니메이션 영상물이 자동으로 상영되고 있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찾아오시는 길
- 다산유적지입구 하차(도보 20분)청량리에서 167번, 8번 (배차간격 10~15분) (청량리 - 구리시 - 덕소 - 다산유적지 - 양수리)
- 강변역에서 2000-1번 (배차간격 20~30분)(강변역 - 구리시 - 덕소 - 다산유적지 - 양수리 - 양평)
- 철도(중앙선) : 팔당역에서 하차 → 양수리행 버스 승차 → 다산유적지입구 하차 (도보20분) (용산역 - 회기역 - 구리 - 덕소 - 팔당 - 국수) 용산역에서 국수행 열차(배차간격 1시간 2대)
- 철도(중앙선) : 운길산역에서 하차 → 다산유적지행 56번 버스 승차(20분)
1789년(정조 13년),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승정원의 가주서, 예문관 검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1년에는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활용하였다. 30세이던 1792년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돌아가신다.
다산의 사상을 연구하는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에 의하면, 다산 선생은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공렴,公廉)으로써 불평등하고 부패한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부자의 것을 덜어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손부익빈(損富益貧)으로써 소득불평등을 풀어가고자 했고, 사회경제적 약자들을(4대 궁인(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노약자, 어린이,초상을 당한 사람, 질병을 앓은 환우, 재난피해자)사회와 국가에서 배려하는 애민(愛民)사상으로써 조선이 복지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6]
과학기술[편집]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해 거중기를 고안하였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여유당전서가 있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 관계이기도 하다.
평가[편집]
정약용은 무언가를 만들던 발명가였다.정약용은 유형원·성호 이익을 통해서 내려온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했다. 한국 근세에서 남인학파의 불평의 비판과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인 태도에 비하여, 다산은 남인학파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다분히 실제적인 경험을 지녔고, 자기의 학문·사상의 체계화를 정리한 귀양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보내기까지의 중앙 관리의 경력, 지방행정의 경험, 연천(連川) 방면의 암행어사 행각, 청년 시절의 왕환(往還)과 부친의 임소(任所)에 수행한 견문, 그리고 귀양살이 등은 그대로 생생한 교훈이며, 평생을 통하는 힘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에 현실적인 인식과 자료로 제공되었다. 다른 실학자들처럼 성리학·천문·지리·역상(曆象)·산학(算學)·의복(醫卜)에 관련된 저서는 물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은 모두 ‘다산학’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사상의 총괄 편으로 정박명절(精博明切)하며 탁견(卓見)이 아님이 없다.
이러한 사상이 급속도로 붕괴해 가던 조선사회에 적절히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다산이야말로 조선조 학계에 전개된 진보적인 신학풍을 한 몸으로 총괄·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인 것이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 선생(茶山) 1인에 대한 요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明銳) 내지 전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
누이 : 이승훈(李承薰)에게 출가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펴던 정조는 노론 진영에서 천주교성리학이 바르게 교훈된다면 성리학에 반하는 천주교는 스스로 없어질 것이니 탄압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윤지충[3] 과 권상연이 천주교 예식으로써 모친의 장례를 치른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관련자들을 처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천주교가 성리학정조가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교회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이를 신유박해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4] 노론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거리를 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
말년[편집]
흔히 나랏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공복이라고 합니다. 공복은 국가나 사회의 심부름꾼이라는 뜻으로,요즘은 "공무원"을 달리이르는말 로 쓰이기도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직자의 역할은 매우중요합니다 특히 높은권력을 가진 공직자가 공정성을 잃고 자신의 이익에나 눈독을들이게되면 나라는 혼란스럽고 온갖 범죄와 사고가 난무하게됩니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그러한점을알고 공직자와 갖추어야할 덕목과 의무를정리하였슴니다. 그것이 바로"목민심서"입니다. 다산정약용은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며 동시에 정치와 행정에 관한전문가 이기도 했슴니다 목민심서는 정치가와 행정가들이 해야할일과 하지말아야할일을 실증적이고 구체적으로 정리한책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전에 쓰인책이지만 이책을읽다보면 지금의 현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오래전 정약용이 지적한 정치와 행정의 과제가 여전히 진행중인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