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光陵) 세조
광릉(光陵)은 사적 제197호로, 조선 제7대왕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의 능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바람이 차가운 날이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꽤나 많이 찾고 있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세조와 단종과 얽힌 이야기는 여러번 들었기에 함구 하는 게 좋을듯 하다
그러나 그 피바람 불던 세월을 호령했던 왕도 누우면 허망한 것, 휘돌아 나가는 바람 처럼
앞으로 또 이 만큼의 세월이 흐른 뒤 여기 모습은 어떡해 변해 있을까 생각해 본다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고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
능하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수양대군 세조는 할아버지 태종의 행동을 익히 알고 있었다.
태종은 동생을 죽이고 왕이 되었고, 이어 맏아들이 아닌 셋째 왕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만약 세종이 태종처럼 병약한 문종을 외면하고 둘째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 줬다면
일은 아주 순조롭게 잘 되었을 것이다.
또한 문종이 큰할아버지 정종이 아우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 줬듯이 아우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주었다면
일은 아주 수월하게 잘 되었을 것이며 또한 자기 아들 단종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아버지 세종과 형 문종이 나이 어린 조카 단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는 바람에 결국 또 다시
나라에 혼란이 생겼고 많은 인재를 잃었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그것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는 몸소 실천을 하게 된다
즉 숙질간에 왕권을 다투지 않도록 세조는 병약한 큰아들 덕종이 죽자 그 아들 세손에게 왕위를 주지 않고
작은 아들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