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대역사

대조영과 밀양대씨

시인김남식 2012. 6. 4. 17:00

대조영과 밀양대씨

 

대조영은 밀양대씨(密陽大氏)의 후손이다.

밀양은 경남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신라 법흥왕 때 추화군이 되었다가 후에 밀성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때에는 밀주로 하였고,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공양왕 때 밀양으로 개칭되었다.

대씨(大氏)는 중국 동래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연해주와 한반도 동북에

걸쳐 있었던 발해국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大仲象)은 중국 당나라 무장으로 말갈부락을 다스렸으며

당왕으로부터 진국공(震國功)에 봉해졌다.

그의 초명(初名)은 걸걸중상(乞乞仲象)이다.

걸걸(乞乞)은 우리말로 ‘걸지다’, ‘걸걸하다’는 뜻이다.

이 이름 앞에 대자(大字)를 붙여 비로소 대씨(大氏) 성이 되었다.

그의 아들인 대조영이 발해 태조가 된후 14대에 걸친 229년 동안 왕권을 유지해 왔다.

그 뒤 요나라에게 멸망하자 발해 왕국의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고려에 망명한 것이 우리나라 대씨(大氏)의 시초가 된다. 

 

일설에는 발해의 마지막 왕인 애왕의 아들 대탁(大鐸)이 발해국이 망하자

자손들을 거느리고 밀양에 토착하여 밀양대씨의 연원을 이룬 것으로 전한다.

대씨의 본관은 밀양을 비롯하여 대산(大山)이 있으나 선계와 연원에 대해서는 미상이다.

대탁(大鐸)은 고려조에서 이부상서를 역임하고 대덕세(大德歲)는

조선조에서 밀양군에 봉해졌다. 대문기(大文記)는 한성판윤을 지냈다.

첨지중추부사에 오른 대중택은 호조판서를 역임한 대국언(大國彦)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밀양대씨는 남한에 2000년 현재는 총 162가구 492명이 있다. 

전남 영광군 백수면 일원, 전북 익산시 신룡동, 전남 영광군 낙월면 상낙월리가 집성촌이다

그리고 대산대씨는 2000년에는 총 30가구 109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영순태씨

 

본관은 영순(永順)·협계(陝磎)·남원(南原)이다.

태씨는 모두 발해를 세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후예라고 하며 대조영의

아버지인 대중상(大仲象)을 시조로 삼고 있다.

발해가 멸망한 후 세자 대광현(大光顯)과 대화균(大和鈞)·대원균(大元鈞) 등이

유민들을 이끌고 고려에 망명하자 고려 태조가 대광현에게 원보수(元甫守)라는 벼슬을 내리고

태씨를 사성(賜姓)함으로써 이때부터 대씨가 태씨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동사통감 東史通鑑〉에 발해 고왕에 관한 일을 기록할 때 태조영(太祚榮)이라 썼기 때문에

후손들이 이에 따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영순태씨는 태금취(太金就)를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있는데, 그가 1259년(고종 46) 후장군(後將軍)으로

몽골군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오르고 영순군(永順君)에 봉해진 연유로

후손들이 영순(지금의 尙州)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계대(系代)하고 있다.

협계태씨는 대화균의 8세손 태집성(太集成)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그가 1231년(고종 18)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몽골군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워 수사공(守司空)에 오르고

협계군(陝磎君)에 봉해진 연유로 후손들이 협계(지금의 沃川)를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남원태씨의 중시조는 태맹례(太孟禮)이다. 그가 조선 단종 때 함경북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된 뒤

그의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면서 협계에서 분적하여 중시조의 출생지인 남원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가구수 2,546호와

인구수 8,165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117위이다.

.

 

 

 


 

'역사 > 고대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조영  (0) 2012.07.04
발해를 우리 민족 국가로 볼 수 있는 근거  (0) 2012.06.30
발해 왕실 연대표  (0) 2012.05.29
백제왕조 계보  (0) 2012.01.04
우리나라 역사의 연표 시대흐름도  (0) 201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