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대역사

대조영

시인김남식 2012. 7. 4. 17:04

대조영(大祚榮) 솔새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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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시조(699~719 재위).

왕호는 고왕(高王). 아버지는 걸걸중상(乞乞仲象)이다.

그러나 그의 가계나 고구려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는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구당서 舊唐書〉 발해전(渤海傳)에는 그를 고구려인의 별종이라고 했고,

〈신당서 新唐書〉 발해전에는 원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족속인데 나중에 고구려에 부속되었다고 했으며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 渤海考〉를 비롯한 우리의 선인들은 모두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고 있다. 
 

 

[주변정세]

 

당은 668년(고구려 보장왕 27)에 수도인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사실상 당이 장악한 곳은 요동(遼東) 일대에 불과했고, 압록강 상류와 동북 만주지방에는 여전히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 고종은 고구려가 망한 그해 12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고자 했고

아울러 고구려의 잔여세력을 강제로 분산시켜 거세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강행하여

고구려 유민 3만여 호를 요하(遼河) 서쪽인 당의 영주(營州) 지방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 3만 호 중에 대조영의 일가도 끼어 있었다.

즉 그는 당의 전후(戰後) 수습책에 희생되어 요하의 서쪽 영주에 옮겨 살게 되었던 것이다.

영주를 중심으로 한 요서지방은 일찍부터 지정학적 또는 국방상의 가치 때문에

전국시대 연(燕)의 진개(秦開)가 정복한 이후 역대 한민족 왕조에서 동북과 서북에서 남하하려는

비한족세력(非漢族勢力)을 가로막는 요충지였으며 동방 침략의 근거지였다.

 
[발해 건국과정]

대조영은 이와 같은 당나라 동북정책의 혼란과 이진충의 반란을 기회로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했다.

이에 당황한 당의 측천무후는 회유책으로 이전의 행동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대조영에게는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여 다시 복속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를 거부당하자 당은 추격군을 파견했다.

거란족 출신 장군인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 군사가 공격해오자 말갈족이 먼저 교전했으나

대패했으며, 걸사비우도 전사했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 군대의 예봉을 피해 동으로 이동하면서 한편으로는 흩어진 말갈족을 규합했다.

당 군대가 계속 추격해오자, 대조영은 지금의 훈허 강[渾河]과 휘발하(輝發河)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의 밀림에 둘러싸인 산악지대로 유인하여 크게 격파했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당 군대는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이해고는 겨우 몸을 피해 되돌아 갔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대조영으로 하여금 발해 건국의 지도자가 되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요서지역 거란족의 난으로 신성(新城)의 안동도호부가 공격을 받게 되어,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돌궐의 힘을 빌렸던 당이 결국 이 지역에 있어서 거란 및 해족(奚族)까지 포용한

돌궐의 세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당 본국과 요동의 교통이 두절되면서

당으로서도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건국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천문령 전투에서의 승리와 함께 발해 건국의 객관적 정세를 형성한 것이었다.

 

천문령 전투 후, 대조영은 동부 만주 쪽으로 이동하여 699년 지금의 지린 성[吉林省]

둔화 현[敦化縣]인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했다.

이곳을 터전으로 정한 것은 고구려의 고토(故土)라는 점도 있지만,

요서의 영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밀림지대여서 방어상 유리한 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만주의 지리적 가치는 비단 전략상의 이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조영은 동모산에 진국을 세우고 자립하자 곧 돌궐과 손을 잡았다.

돌궐과 손을 잡음으로써 당시 동북아시아에서의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났고,

당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던 돌궐을 통해 당의 침략야욕을 막아 내고자 했던 것이다.

 

 

"돌궐"

터키를 한자로 突厥(돌궐)이라 표기한다.

우리 한민족과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으로 고구려 전성기엔 글안, 여진(숙신)과 마찬가지로

일부는 고구려의 민중에 속했다.

터키인들이 우리 민족의 나라인 고구려의 구성원이었다. 말그대로 고구려 시민입니다

터키는 과거 고구려의 기층민중이었으며, "돌궐 제2제국' 을 같이 한 우리 한민족에 대해 깊은 유대감과 함께

형제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6ㆍ25때 북한이 남침하자, 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미국,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군대(1만4936명, 전사 721명, 부상2147명)를 파견해 우리를 도왔던 것이다.

파병이 늦어지자, 터키의 고등학생들이 『왜 형제의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데모를 벌였다는 말도 있다

7세기 때부터 문자를 갖고 있는 그들은 역사를 통해 터키와 한민족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kbs 역사 대하드라마 대조영이 2007년 134회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대조영이 신하들과 함께 광개토대왕비를 찾아가 고구려의 기상을 계속이어 갈 것을 다짐하는 모습을 끝으로

1년여의 긴 여정을 마쳤으며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역사를 왜곡한다는 말을 가끔씩 합니다만

드라마를 보면서 역사교과서를 읽듯이 할 수는 없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가 학교 다닐때는 고구려 역사는 배웠지만 발해의 역사는 겉으로만 배운 기억이 있다

solsae.k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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