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왕조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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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온조왕.( bc18~ 28년 44년집권)
백제건국의 시초로써 비류와 함께 고구려에서 빠져나와 남하한다. 그과정에서 마한의 땅에 도착에 마한의 왕은 마한땅 북쪽의 색리국의 영토를 내주고 그 영토를 다시리게 한다.(이것으로 보아 마한은 백제 위의 말갈과의 접촉을꺼려 내주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그후 세력을 키운 온조는 마한을 통일하게 되고 그과정에서 광대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전국의 영토를 4부(동서남북)으로 나뉘어 관리하며 나라의 기초를 닦는다.
2.다루왕 ( 28년~77년 49년집권)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거이 몰락한 마한을 흡수하게 되고 말갈의 잦은 침입을 모두 막아내고 남쪽과 동쪽으로 영토를 확대하기 시작하며 복암성을 두고 신라와 국경분쟁을 하게 된다. 계속되는 공방전 끝에 다루왕은 점령하지 못한체 세상을 뜨게된다. 하지만 이시기에 좌 우보제도(2인협의체제)가 성립되어 나라가 운영된다. 생활면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쌀농사가 대대적으로 보급시키는등 백제의 영토와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3.가루왕 (77년~128년 51년 집권)
성격부터가 온순하여 신라에 사신을보내 이사금에게 화친을 요청하였고 말갈의 침략을 받은 신라가 백제에구원병을 요청하자 다섯장수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는등 친선관계가 된다. 하지만 그재위기간동안 천재지변은 끊이지 않게된다. 지진이나 땅이 갈라지고 봄에는 가뭄이들고 여름에는 태풍이불어 백성이 서로잡아먹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장남의 난의로 6년간왕좌를 빼았기다 개루왕의 도움으로 다시 왕위를 찾게된다.
4. 개루왕 (128~166 38년집권)
가루왕의 맏아들. 즉위이후 신라와는 단 한차례도 사신을 주고받는 일이없다. 신라의 반역자 길선이 백제로 도망치자 신라는 환송할것을 요청하고 백제가 이를거절하자 신라와의 전투까지 일어나게 된다. 결국 개루왕의 방어로 신라군은 한발 물러서게된다.또한 그재위기간동안 말갈군의 남진을 막기위해 북한산성을 쌓았다.
5.초고왕 (166~214 48년집권)
개루왕의 아들.재위 초부터 신라와의 전투가 끊이질 않는다. 더군다나 국란에 버금가는 메뚜기 때가 밭과 논을 휩쓸자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사태까지 벌어지며 나라가 혼란이 왔다. 이후초고왕은 얼마되지않아 사망함으로 구수왕이 집권하게 된다.
6. 구수왕 (214~234 20년집권)
초고왕의 장남, 키가 2미터가 넘고 얼굴이 신기할 정도로 재밌게 생겨 백성들과 신하가 그를 잘따랐다고 전해진다. 그는 키와 얼굴에 걸맞게 줄기차게 신라와의 전쟁을 하였으나 봉산아래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고 백제가 크게 패함으로서 신라와의 전쟁은 멈추게 된다. 그의 재위기간에는 천재재변이 끊이질 않았다. 전염병이돌고 홍수가나 여려집이 무너지더니 가뭄이와서 직접 기우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또 ㅎ밤 정도의 우박이 떨어지는가 하면 왕성서문에 화재가나 말갈족이 침략하였다.
7. 사반왕 (234~234 5개월집권)
구수왕의 맞아들. 왕위에 오래있지 못한다. 그는 어린나이로 집권하게 되었고 그 원인으로 난이 일어나 폐위당했다.
8. 고이왕 ( 234~286 52년집권)
사반왕을 폐위시키고 직접 왕이 되었다. 고이왕은 대륙백제의 시작점이 되고 초기에는 신라에게 강경책을 말갈에게는 회유책을 쓰다가 신라와도 다시 화친을 맺게 된다. 그는 대륙백제에서 북위와의 직접 전쟁을
치뤘고 중국의 낙랑까지 칩임하는 등 영토확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그는 6관등제를 도입하고 16품제를 도입하여 백제 정부의 서열정리에 힘썼다. 또한 관리로써 재물을 받거나 도적질을 한자는 누구든지 그세배를 배상시키고 종신형에 처하는등 강한 법을 만들어 관리의 기강을 확립하였다.
9. 책계왕 (286~298년 11년집권)
고이왕의 아들. 중국의 5호16국시대에 대륙백제를 거점으로 영토확장을 한다. 하지만 고구려와 연합한 낙랑과 맥족(예맥족)이 침입하여 적변에서 사살당하였다. 책계왕의 대륙백제 영토확장은 그당시 삼국사기 필자들은 백제의 대륙백제를 몰르는 무지에서 비롯되어 자료가 별로 없다는것이 아쉽다.
10. 분서왕 (298~304 6년집권)
책계왕의 맏아들. 그도역시 책계왕의 아들로써 대륙백제 영토에 힘썼다. 책계왕시기에 낙랑까지 침입한 덕에 분서왕 시기에도 낙랑과는 적대적이였다. 분서왕은 낙랑을 침략하여 중요지를 빼았았고 낙랑은 첩자를 보내어 자객에 살해되고 만다. 그후 분서왕의 자식들은 나이가 너무 어린까닥에 백제는 왕위를 이을자가 없어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11. 비류왕 (304~344 40년집권)
분서왕의 자식들이 어리자 한성을 장악하고 왕위에 올름. 그결과 책계왕과 분서왕을 따른 자들은 백제대륙으로 넘어가 한반도 백제와 다른 왕조를 구사하며 백제에 2왕조가 생기게 된다. 비류왕은 이러한 혼란기를 안정시키기 위해 말갈 낙랑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신라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는 천재지변을 피해가지 못하였다. 대궐에는 심한화재가 나고 여름과 봄에는 심한가뭄이 들더니 메뚜기가 들어 곡식을 다 해쳤다고 전해진다.
12. 계왕 (344~346 2년집권)
분서왕의 아들. 비류왕이 죽자 대륙백제를 근거지로 하고있던 계왕은 명분을 내세워 백제의 왕임을 공포하고 한반도 백제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이미 백제내에서 강한힘을 가지고 있던 근초고왕은 계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고 계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올른다. 그결과 대륙백제와 한반도백제는 다시 통일된다.
13. 근초고왕 (346~375 29년집권)
비류왕의차남. 백제의 최대의 전성기를 구사하는 왕이다. 이는 고구려를 침입해 고국원왕을 목을 베었다. 이로써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으로 다시 떠오르게된 백제는 내부의 혼란을 잠재우고 대륙확장에 앞장서게 된다. 그는 20여년동안 대륙백제에 머물르며 친정에게 한반도 백제를 맞겼는데. 그친정이 한반도 내에서 횡포를 부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근초고왕은 대륙에 있었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신이 죽을때까지 벌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일본과의 관계를 맺고 역사서인 서기를 제작하게 하는한편 대륙백제의 땅이 넓어지자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떠올르게 된다. 그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노란색 깃발을 사용함에따라 자신이 황제임을 칭하였다.
14. 근구수왕 (375~384년 8년집권)
근초고왕의 아들. 실질적으로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지휘를하여 고국원왕의 목을 따온 장본인이다. 하지만 지병을 앓아 빨리 죽었다. 그는 대륙백제를 위해 대륙에서 살다시피 하였고 외척에게 한반도 백제를 맞기었다.하지만 그도 천재지변을 이기진 못하였다 전염병이돌고 땅이갈라지는등 심한 가뭄이 찾아왔다.
15. 침류왕 (384~385 1년집권)
근수구왕의 장남. 이도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이는 병을 낮기위해 인도승려 마라난타를 불러 백제에 불교를 퍼지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봐도 자신의 병을 낮기위해 불교를 받아드렸다고 봐야할것 같다. 그는 끝내 죽고 짧은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16. 진사왕 (385~392 7년집권)
근구수왕의 둘째아들. 침류왕이 빨리죽자 둘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는 근초고왕의 태자에게 밀려 왕구실을 못하는 허수아비 왕이였다. 고구려가 백제를 쳐도 그는 사냥을 떠날뿐이였따. 고구려는 이시기에 대륙백제를 침략하여 요동의 발해만 근처를 획득하였다. 진사왕그는 그때도 사냥을 떠났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는 사냥터에서 피살되어 끝내 왕위를 물려주고 말았따.
17. 아산왕 (392~405 12년집권)
침류왕의 맞아들. 그는 진사왕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왜를 끌어들여 진사왕을 제거하였는데 외세는 이를보고 왜가 백제를 쳤다는 표현까지 하며 백제를 비웃었다. 이로인해 백제는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진사왕시기에 빼았겼던 중요한 요새인 관미성회복을 나선다. 하지만 고구려의 완강한 방어로 끝내 실패하고 고구려의 역공을 맞아 항복식을 올렸다. 하지만 왜에 태자를 보냄으로써 정예병을 받아 고구려와의 끝없는 전쟁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그는 가야 백제 왜 동맹으로 신라를 병합하려 했으나 고구려의 도움으로 또 실패하는등 광개토 대왕에게 참패를 맞았다. 하지만 그는 왜에 왕인과 아직기를 보냄으로써 일본에 큰 문화를 전파하였다.
18. 전지왕 (405~ 420 15년집권)
아산왕의 맏아들. 그시기에 상좌평 제도가 자리잡게 된다. 그는 어린시기에 왜에 보내졌으며 왜인과 결혼하였다. 그가 왜에서 아산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에 돌아가 왕이되려 하였지만 돌아가는 과정에서 백제의 대표적 외척가문인 해씨와 진씨가 전쟁을 하게되고 결국해씨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아산왕은 백제에 돌아와 왕이되었다. 하지만 이름만 왕일뿐 모든세력은 해씨가 가지고 있었다. 이시기에 전지왕은 주변의 여러나라와 친교를 맺고 안정을 찾기위해 힘썼고 왜와 사이가 각별해 진다.
19. 구이신왕 (420~427 7년집권)
전지왕의 맏아들. 나이가 어려 왜인인 어머니 태후팔수가 섭정을 하게된다. 그는 왜의 제도를 받아드린다며 백제에서 횡포를 일삼았다. 결국 그는 민심을 잃어 비유왕의 정변으로 왜에 도망가고 그사이게 구이신왕은 사망한것으로 보인다.
20. 비유왕 (427~455 27년집권)
전지왕의 둘째아들. 즉위한지 두달만에 전국을 돌고 곡식을 나눠주며 민심회복에 힘썼다.그는 남송에 사신을보내 국제적으로 백제의 왕임을 인정받은뒤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신라의 눌지왕과 동맹을 맺게 된다. 그는 말년에 아마도 말년에 반란에 휩싸여 죽은것으로 추정된다.
21. 개로왕 (455~475 29년집권)
비유왕의 맏아들. 초기에는 반란군 집압을 못하여 고난하였다. 결국 반군을 제압하고 왕위에 앉아 북위에 사신을 보내어 같이 고구려를 치자는 내용을 전한다. 북위는 이에 응하고 백제에 사신을 보냈지만 고구려의 방해로 사신은 백제로 가지못하고 개로왕은 거부의 뜻으로 알고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긴 비운의 왕이다. 고구려의 승려 도림의 꾀에 넘어가 백성을 각종 공사에 이용하였다. 도림은 이를 고구려에 알렸고 고구려는 한성으로 대군을 이끌고 내려왔다. 그는 북위에 원서를 보내 군사요청을 하였지만 그전에 한성을 점령당해 얼굴에 침을 세번맞은뒤 장수왕에게 끌려가 화를당한다. 이때 개로왕의 자식들도 대부분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2. 문주왕 (475~477 2년집권)
비유왕의 아들. 개로왕시기에 신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가서 구원병 일천을 대리고 한성에 왔지만 모든것은 잿더미였다. 더군다나 개로왕은 끌려가 화를 당하여 백제가 혼란하였다. 한성은 불타 무너지기 직전이였고 백제는 고구려가 언제 침략할줄 모른다는 생각에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하지만 이때 권력은 해구(해씨세력중 고위관리직 군사를 주로담당)에게 권력을 빼았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구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곤지를 내신좌평에 임명하였으나 해구에게 살해당한다. 문주왕 역시 사냥길에서 살해되며 집권이 끝난다.
23. 삼근왕 (477~479 2년집권)
문주왕의 맏아들. 문주왕이 살해당하자 13살의 나이로 왕권을 잡았다. 이미권력은 해씨에게 있어서 왕은 허수아비와 같았다. 하지만 진씨세력이 변을 일으켜 모든권력의 중심인 해구를 죽임으로써 다시 진씨세력의 시작이 오게되는 시기이다.
24. 동성왕 (479~501 22년집권)
비유왕의 아들. 웅진천도이후 백제의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하는 왕이다. 그는 남제와 고구려를 치려했으나 실패하자 신라와 결혼동맹을 하여 한반도 백제를 안정시킨뒤 대륙백제로 넘어가 영토회복에 힘쓰게 된다.하지만 그는 말년에 사치와 항략에 빠져 신기한 동물을 키우고 호수를 만드는둥 백성을 어렵게 하였다. 결국 사냥길에 그는 피살당하여 사망하게 된다.
25. 무령왕 (501~ 523년 21년집권)
개로왕의 아들. 백제의 전성기를 이어온 왕이다. 그는 섭라(임나)지역을 점령하여 고구려을 난혹하게 하였다. 그당시 고구려는 위에 금과 옥을 받쳤는데 금이나오는 발해가 북방에서 밀리고 옥을파는 임나가 점령당하자 위나라에게 심하게 까여 국제위상이 떨어졌다. 그결과 고구려와 적대가 되고 서로 끊임없이 싸우게 되낟. 그는 왜의 친백제파를 양성하여 백제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하여ㅑㅆ으며 백제는 그를 황제라 칭하였다. 그리고 무령왕릉의 주인공이다.
26. 성왕 (523~554 31년집권)
무령왕의 아들. 그는 백제에서 최고 책략가로 불리었다. 나제동맹으로 한강을 획득하였지만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고구려 신라동맹이 체결되어 고구려가 백제를 치러가는데 길을 터준다. 또한 대륙백제에서도 고구려에게 대패하여 영토 대부분을 잃게된다. 그는 고구려를 잠시 재껴두고 신라를 치기위해 관산성을 직접 처들어 갔지만 신라장군도도의 손에 죽게된다. 백제는 이에 빠져나오려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는등 다시 부흥을 꾀하였다.
27. 위덕왕 (554~598 44년집)
성왕의장남. 그는 관산성싸움을 강하게 주장하며 성왕과 함께 침략하였다. 하지만 성왕이 관산성에서 죽자 그는 죄책감을 느끼게되고 중이되여 출가하려하자 신하들이 그를말려 뜻을 굽히고 왕이 되었다. 그는 3년상을 치루고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가야백제왜연합군을 만들어 신라를 쳤으나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으로 밀리게 되고 가야는 끝내 신라에 흡수하게 된다. 그결과 백제와 왜만 남은 상황에서 다시 왜와 깊숙한 사이가 된다.
28. 혜왕 (598~599 1년집권)
그는 성왕의 둘째아들이다. 늙을대로 늙어서 채1년을 집권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는 욕심에 위덕왕의 태자가 왜에 파견되는데 이틈을타 왕권을 잡아버린 왕이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일없이 죽게된다.
29. 법왕 599~600 5개월집권)
혜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사촌을 죽이고 불법적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런그는 뭐가 두려웠는지 불교를 국교로 정해 살생을 금지하고 도축하는 도구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그는 불법적으로 왕이 되더니 민심과 반발세력에 의하여 피살당하게 된다.
30. 무왕 (600~641 41년집권)
백제 마지막전성기. 위덕왕의 서자이다. 외교에 뛰어난 무왕은 외교를 통해 수나라와 고구려가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아시아의 주목이 고구려와 수나라로 간사이 갑작스럽게 신라를 쳐 땅을 획득하였다. 또한 계속되는 전쟁으로 한반도 백제의 땅을 대부분 회복하는등 전성기를 이루었다.
31. 의자왕 (641~660 19년집권)
어머니는 선화공주 왕 재위 초기에는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에 큰 타격을 주고 국위의 만회에 힘썼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 ·당 연합군의 침공을 맞았으며, 끝내 항복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삼국사기의 자료로만 평가되어 많은 오류가 있음을 짐작하는데 삼국사기. 즉 신라의 후손 김부식이 신라의 위주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직감 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