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대역사

발해를 우리 민족 국가로 볼 수 있는 근거

시인김남식 2012. 6. 30. 16:54

발해를 우리민족국가로 볼있는 근거 - 지식코너에서


중국과 일본은 발해의 역사를 우리 민족의 역사로 인정하지 않고 만주족의 역사로 보고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 민족이 만주를 지배한 역사가 단축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발해의 민족 구성에서 말갈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를 둡니다.

첫째:
발해 지배층의 90% 이상이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고구려 예당에서는 고구려를 부흥 시키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멸망이후,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대해 저항을 계속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698년 고구려의 장군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둘째: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발해 왕이 자신을 고구려 왕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발해의 3대 문왕이 일본에 국서를 보낼 때 자신을 "고려국왕 대흠무"로 표기했습니다.

이것은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이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발해와 일본은 200여년간 발해가 35차례(동란국 1번 포함.),일본은 13차례사신을 파견하였습니다.

이런 관계는 811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셋째 :
발해의 미술 양식에 고구려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에서 발굴된 돌사자상을 보면 고구려의 미술의 웅장한 멋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넷째 :
발해 지배층의 무덤양식은 고구려의 돌방 무덤을 그대로 닮았다는 것입니다.
발해고분은 축조의 재료와 규모로 볼 때 돌방무덤.돌덧널무덤.돌널무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이 밖에도 널무덤.벽돌무덤 등도 있습니다.

돌방무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돈화현 육정산고분에서 발견된 정혜공주무덤과 삼령둔고분군에서

발견된 삼령고분을 들수 있습니다.

특히 1949년에 발견된 정혜공주 무덤은 천장이 말각천정(묘실 네 구석 위에 삼각형 받침을 얹은 형식)의 구조인데,

이것은 고구려 후기의 큰 봉토돌방무덤의 구조와 같은 것입니다.

 

다섯째 :
발해의 온돌 양식 또한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였습니다.

중국은 발해의 생활양식에 온돌이 남아있는 것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온돌은 중국인에게는 없는 우리 고유의 생활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사실들은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 편입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제시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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