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귀인정씨 묘

시인김남식 2014. 5. 31. 10:49

선조 귀인정씨(貴人鄭氏) 솔새김남식

 

귀인 정씨(貴人 鄭氏 1556 ~1579)는 선조의 후궁으로 그의 묘가 고양시 벽제IC 부근 신원리 송강골 뒷산에 있다 

 

기묘년(1579, 선조12) 4월 임인일에 죽으니, 그때 귀인의 나이 23세로 선조가 부음을 듣고 슬퍼해 마지 않으면서

염습(殮襲) 때부터 잇따라 세 차례에 걸쳐 치제(致祭)토록 했으며 

그해 6월 임인일에 예법에 따라 경기 고양(高陽) 조묘(祖墓)의 옆에 장사 지냈다.

 

묘는 송강문학관 바로 뒷산에 있으며 의기 강아의 묘 부근에 있다

 

아래 비석은 연일(延日)정씨 가문에서 세운 것 같다.

 

 

귀인 정씨(鄭氏)의 묘비 내용 

우리 성상(聖上)께서 대통(大統)을 이어받으신 뒤 상제(喪制)를 다 마치고 중궁(中宮)을 세우시고 나서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에 명족(名族)의 규수를 뽑아 숙의(淑儀) 두 명을 책납(冊納)토록 하셨는데,

그때에 정 귀인(鄭貴人)도 여기에 실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계유년(1573)에 이르러 천자(天子 명(明)나라 신종황제(神宗皇帝)를 가리킴)의 등극에 따른 은사(恩賜)를 받고

소의(昭儀 정2품 내명부(內命婦)의 직위임)로 올랐으며, 정축년(1577)에 인순왕후(仁順王后 명종의 비)의 상제(喪制)가

끝난 뒤에 그야말로 귀인(貴人)의 명을 받게 되었다.
정씨의 관향(貫鄕)은 영남(嶺南) 영일(迎日)이다.

먼 조상으로는 고려 때에 문하평장(門下平章) 정균지(鄭均之)와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사도(鄭思道)가 유명하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정홍(鄭洪)이 있었다.


증조부인 정위(鄭潙)는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이었고

조부 정유침(鄭惟沈 1493-1570)은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이었으며 부친 정황(鄭滉1512-1560)은 안악 군수(安岳郡守)였다.

모친 한씨(韓氏)는 모관(某官) 모(某)의 딸로서, 가정(嘉靖) 정사년(1557, 명종12) 10월 을유일에 귀인을 낳았다.
귀인은 용모가 아름답고 천성적으로 영민하였다.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게 되면서부터는 어버이를 공경해야 한다는 사실을 함께 깨달아,

날씨가 차고 더움에 따라 의복과 이부자리를 마련해 드리면서 반드시 문안을 드리고 보살펴 드리곤 하였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맛있고 연한 반찬을 먹여 드리려 하였으며

비록 자신에게 주시는 일이 있어도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말씀드리며 사양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조금 장성해서는 여자가 지켜야 할 법도를 마음에 새겨 몸가짐을 단정하게 지니고서 실없이 장난하는 일은 전혀

좋아하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궁중에 선발될 즈음에도 나가고 들어오는 것과 나아오고 물러가는 것과 몸을 꺾고 돌리는 행동등을 모두 원래부터 익힌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하였으므로, 내정(內庭)에서 이를 보고 탄식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그리고 일단 궁중에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소학(小學)》 책을 받아 읽기 시작하면서 그 의리를 몸소 알고 행동으로 실천하게

되었는데, 그런 뒤로부터는 더욱 엄숙하게 자신을 단속하며 몸가짐을 조심하고 과묵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매일 아침마다 위의(威儀)를 잃는 일이 없이, 종일토록 나태해지려는 뜻이 깃들이지 않도록 함으로써,

한번 앉고 한번 서는 순간에도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하는 일이 전혀 없게 하였다.
또 상의 총애를 받게 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도 마치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황공한 태도를 취하였고, 물러 나와

여러 사람들과 어울릴 때나 시비(侍婢)와 함께 있을 때에도 절대로 웃거나 떠드는 일이 없었으며,

무성하게 쏟아져 나오는 별의별 이야기들도 귀담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지엽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구차하게 취하려 하지를 않았으니

맛이 야릇하면 맛보려 하지 않고 색깔이 변했으면 입에 대려 하지 않고

출처를 물어서 온당치 못할 경우에는 먹으려 하지를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을 대할 때의 안색이나 목소리는 온유한 분위기가 물씬 배어 나왔으므로, 귀인과 함께 처하는 자들은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는 한편으로 속으로 꺼리는 바가 없게 되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귀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상이 귀인을 매우 끔찍이 총애하여 어서(御敍 시침(侍寢))하는 일이 가해질 때에도 더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면서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행동하였으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개인적인 편의를 도모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경우에는 감히

입을 열어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부모 외에는 문안을 하거나 선물을 보내 서로 통하는 경우가 있지 않았으며

궁중 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비록 부모라도 전혀 들을 수 없도록 하였다.


일찍이 병이 들어 말미를 얻고 사실(私室)에서 쉬고 있을 때, 상이 보낸 중사(中使 환관(宦官))가 위문하러 올 적이면

문득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복을 갖추어 입고 일어나서

마치 처음부터 병고(病苦)를 겪지 않은 사람처럼 중사를 맞이하곤 하였으며, 상으로부터 음식과 약물(藥物)을

하사받는 일이 있게 되면,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받고서 근심하는 것이 오히려

병든 것보다도 더 심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임신하여 달수가 차자, 상이 궁중에 산실(産室)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이런 때에는 모친인 한 부인(韓夫人)이 궁중에 들어와서 도와주도록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귀인은 외부의 부인(婦人)이 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예법상 안 될 일이라고 극력 간청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짐에 따라 크게 마음을 상하게 되자,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모부인을 궁중에

들어오게 하도록 권했으나 귀인은 끝내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상이 궁 밖의 사저(私邸)로 나가 조리하도록

명함으로써 이제는 모부인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나, 그때는 이미 귀인이 인사불성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친인 군수공(郡守公) 역시 바야흐로 임소(任所)에 가 있는 때였다.
기묘년(1579, 선조12) 4월 임인일에 죽으니, 그때 귀인의 나이 23세요, 아들은 끝내 두지를 못하였다.

상이 부음을 듣고 슬퍼해 마지않으면서 염습(殮襲) 때부터 잇따라 세 차례에 걸쳐 치제(致祭)토록 하였다.


귀인은 궁중에 있었던 9년 동안 누구보다도 검약을 신조로 삼아 스스로 지켜 나갔다.

 그리하여 죽고 난 뒤에 보니 의복도 겨우 염습할 것만 갖추어져 있었고 재물 역시 남겨 놓은 것이 없었으므로

내외(內外)의 사람들이 모두 일컬으며 탄식하였다.

그해 6월 임인일에 예법에 따라 경기 고양(高陽) 조묘(祖墓)의 옆에 장사 지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산과 못에 주옥이 있게 되면 / 山淵有珠玉
그 주위가 한결 돋보이듯이 / 光氣美
이제 귀인이 이곳에 묻혔으니 / 貴人葬于玆
신령스런 이적(異蹟)이 당연히 보이리라 / 宜靈異
아아 천년만년토록 / 於乎千萬年
감히 훼손치 말지어다 / 無敢毁

 

이 가문에서 두명의 후궁을 보낸 것으로 조선 12대 인종과 조선 14대 선조에게도 후궁을 보냈다.

선조의 후궁 귀인정씨는 송강정철(1536년 ~ 1594년)의 형(兄) 정황의 딸이며 정절의 조카이고.

인종의 후궁 귀인정씨(貴人鄭氏 1520-1566)는 정철의 누나이다.

 

두사람 모두 왕에게 자녀를 얻지 못 했으며 인종의 귀인정씨는 46세에 선조의 귀인정씨는 23세때 병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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