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임고서원 臨皐書院 솔새김남식
임고서원은 영천시에서 약 7km 영천땜 가는 임고면 소재지 양항리 462번지 69번 지방도 길목에 있다
임고서원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 하기 위해 1553년 명종때 고향인 영천시 임고면에 창건한 서원이다
임고서원 경내에는 포은정몽주 유물관을 비롯하여 포은선생 신도비(神道碑) 단심가비 백로가비 등이 있으며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임고서원을 지키고 있다
임고서원 경내의 500년 은행나무 옆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이 피살 되었던 개성 선죽교를 재현해 놓았다
비가 오면 피로 얼룩진다는 선죽교. 정몽주의 한이 서려 있어서인지 피로 얼룩진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정몽주는 고려말 사극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로 우리들에게는 '이몸이 죽고죽어....' 로
시작하는 단심가로 잘 알려져 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시대 3장의 장원급제를 한 학자로서
24세 되던해인 1360년(공인왕9년) 과거 시험에서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삼장(三場)에
잇달아 그것도 장원으로 급제를 하여 명성을 떨치고 벼슬길에 오른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충신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현리에 있다
정몽주선생이 선죽교에서 순절하고 처음에는 황해도 풍덕군에 묘를 썼다고 합니다
후에 고향 영천으로 이장하기 위해서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 앞을 지나게 되는데 행렬 앞
명정(銘旌:다홍 바탕에 흰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려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묘를 써 달라는 뜻으로 알고 고향 영천을 가지 못하고 능현리에 묘를 썼다고 한다.
포은정몽주 유허비는 영천시 임고면 효자로(우항리 662번지) 에 있다.
임고서원에서 그리 멀지않은 2키로 지점 우향리에 정몽주 선생의 生家가 있다.
새로운 국가를 창조하려는 신진세력과 손을 잡지 못하고 그는 왜 망해 가는 고려를 붙잡으려 했을까
그것도 힘이 미약한 자신이 혼자 희생을 하면서 말이다.
정도(正道)가 아니기에 고려국에 역적이 되고 싶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뭘까
불의를 거부하는 걸까? 그래서 고려의 충신으로 남길 원 했을까?
민초를 위하는 선택은 왜 못 했을까
이번 여행에서 포은 정몽주 선생의 발자취를 임고서원에서 다 찾아 볼수는 없었지만 참 뜻있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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