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 ― 자야 김진향여사 회고록
1995년 발행 문학동네
김진향은 김영한여사의 妓名이다
나는 시인 백석과 1936년 가을 함흥에서 만났다. 그의 나이 26세, 내가 스물 둘이었다. 어느 우연한 자리였었는데, 그는 첫 대면인 나를 대뜸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자기의 술잔을 꼭 나에게 건네었다. 속으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의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그는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의식은 거의 아득해지면서 바닥 모를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했다. 그것이 내 가슴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애틋한 슬픔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함흥 교사시절 그는 하숙을 했고, 나도 하숙생활을 했다. 영생학교는 반룡산 밑에 있었고, 그의 하숙은 학교에서 한 오 리쯤 떨어진 함흥 근교의 중리(中里)라는 곳에 있었다. 그때 나는 함흥의 히라다 백화점에 볼일이 있어서 갔었던 것이다. 그의 첫 인상은 외국 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스물 댓밖에 안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란 말을 썼었는지……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 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했는데, 나는 그 말이 뜨끔하긴 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늦은 밤이면 반드시 내 하숙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때 하숙집 부근 길목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그곳 진열대에는 젊고 예쁜 여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그 앞에만 오면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지나갔다. 마치 '당신 밖의 아무 여자도 나는 싫소.'라는 뜻을 나에게 보여 주려는 듯이……
어느 날 내가 서점에 들렀다가『당시(唐詩)선집』하나를 사왔는데, 백석은 그 책을 한참 읽고 나더니 문득 나에게 '子夜(자야)'란 호를 지어주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백석의 '자야'가 되었고, 이 호는 아마 지금도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이름일 것이다. '자야'란 물론 당나라 시인 이백의「자야오가(子夜吳歌)」란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시는 중국 동진의 한 여인 '자야'라는 이가 변경으로 수자리하러 간 남편과의 생이별을 서러워하는 민요풍의 노래이다.
"長安一片月 / 萬戶 衣聲 / 秋風吹不盡 / 總是玉關情 / 何日平胡虜 / 良人罷遠征"
나의 이 깊은 외로움도 그때 백석이 이 '자야'란 호를 나에게 붙여 주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고 마련된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아직도 그의 원정(遠征)이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937년 늦가을이었다. 그는 어느 날《여성》잡지 한 권을 들고 싱글싱글 웃으며 찾아왔다. 그는 책을 뒤적뒤적하더니 한 곳을 펼쳐 코밑에 쑥 들이밀었다. 보니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바다」라는 제목의 시였다. 작품 아래쪽에는 한 남자가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빈 백사장에서 우두커니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그림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시를 읽다가 문득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 당신이 이야기를 귾는 것만 같구려" 란 대목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는 대뜸 말꼬투리를 잡아 "내가 끊긴 무얼 끊어요?" 했더니 그는 "밤낮 날더러 장가들라고 했잖았소!" "당신 머릿속에서는 지금도 나를 떠나라 하고 있지?" "왜 내 말이 잘못되었소?"라며 연거푸 정색을 하고 빠른 말로 말했다. 사실 나로서도 그런 말 하는 것이 무척 싫었지만, 나는 그에게 장가들기를 권하곤 했다. 그럴 적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백석의 어머니는 그때 쉰이 넘어서 손자 없는 것을 늘 허전하게 여겼다고 한다. 겨울방학이 되어 백석은 서울 그의 부모 슬하에 가서 여러 날 있다 오게 되었다. 불과 며칠을 서로 떨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함흥으로 줄곧 편지를 써 보내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신문이 배달되어 오는 것처럼. 편지글은 다정다감한 문체였으며 '오늘은 누굴 만나고……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오……' 라는 식의 하루의 일과를 모두 깨알같이 써서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편지가 뚝 끊어지더니 열흘 정도 소식이 없었다. 몹시 궁금히 여기고 있던 어느 날 그가 에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부모가 하도 맞선을 보라 해서 맞선을 보았다는 것과 그게 가책이 되어 편지를 못 내었노라는 내력을 말했다. 그는 평소 부모의 말씀을 퍽 두렵게 여기는 듯했다. 나와 함께 살면서도 부모가 새악시 선을 보라 하면, 그는 그것을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런 성품을 알면서도 자꾸만 울화가 치밀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서운했다. 나는 속으로 '흥, 그대가 총각이라지…… 야,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그래, 내가 피해줄게……'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허전한 마음이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뒤에 알고 보니 그는 편지가 끊어진 그 열흘 동안 맞선만 본 게 아니라 초례(醮禮)까지 치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장가든지 사흘 만에 집을 나와 함흥의 나에게로 달려왔던 것이다. 각시의 얼굴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행위가 너무도 야속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가 학교에 출근하는 걸 보고 그 길로 이불이랑 짐 보따리를 꾸려서 낮 11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아주 내려와 버렸다. 1937년이 저물어가던 무렵이었다.
그 몇 달 뒤인 이듬해 봄, 어느 주말 오후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청진동에서 11칸짜리 아주 작은 집을 구해 살고 있었는데, 사동(使動)이 웬 쪽지를 들고 찾아왔다. 펴보니 백석이 보낸 메모였다. "몇 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사동에게 물어보니 그는 지금 우편국 앞 제일은행 부근의 한 오뎅집에 있다고 했다. 내 가슴은 사뭇 그리움으로 두근거려 왔다. 부리나케 그의 앞에 가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노라니 그는 다시금 지난해의 사건을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반갑고 기뻤지만, 그의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그가 무작정 좋아지고, 또한 우쭐거려오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동안 쌓인 모든 含怨(함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튿날 그는 출근하기 위해 밤차로 함흥으로 떠났고, 나는 서울에 남았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절대로 갈라설 수 없는 하나임을 새삼 느꼈다. 그해 초여름, 서울에서는 전선(全鮮)고교대항축구대회가 열렸는데, 백석은 함흥 영생고보 축구부 학생들을 인솔하고 서울에 나타났다. 약 한 주일가량의 출장인 것 같았는데, 그는 오던 첫날만 학생들을 연습장에 데려다주고는 줄곧 나의 청진동 집에서 기거하다시피 했다. 내가 "학교 아이들은 안 돌보고 왜 자꾸 여기만 계셔요?"라고 재촉도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인솔교사를 잃어버린 학생들은 모처럼 상경한 기분에 들떠 떼를 지어 유흥장으로 몰려다녔다. 이들 중 몇몇이 서울의 학생지도 합동단속교사에 적발되었고, 교사는 학생들을 힐문하기 시작했다.
"어느 학교 학생이야?" "함흥 영생고보입니다." "서울은 무슨 일로 왔지?" "축구시합에 출전하러 왔습니다" "인솔교사는 어디 갔어?" "몰라요, 저희들도 오던 날 운동장에서 한 번 뵌 후론 다시 못 만난걸요."
일이 이렇게 되자, 함흥 영생학교는 온통 벌집 쑤신 듯하였고, 특히 고참교사들의 노여움은 대단하였다. 당시 영생학원 이사장으로 있던 이 모 씨는 평소 학교일에 매우 열성적이었던 백석을 퍽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다른 교사들 보기에도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일이라 해서, 같은 영생학원 계열의 여학교로 전보 발령을 시켰다. 그 난감한 경황을 무릅쓰고, 백석은 다시 함흥으로 돌아가 영생 여고보에서 한 학기인가를 근무했다. 방학 때 다시 서울에 왔었는데, 그때 이미 함흥으로 돌아갈 생각을 안했던 것 같다.
그는 사표를 써서 우편으로 부쳤다. 그런 며칠 뒤에 조선일보 출판부 옛 직장에서 나와 달라는 연락이 왔고, 이로부터 백석의 서울 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함흥 영생학교시절 아동문학가 강소천과 목사 김관석이 백석에게 영어를 배웠다. 지난날 함흥에서 거주한 적이 있는 시인 이기형은 그 무렵 백석이 '함흥 최고의 멋쟁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백석은 한 평범한 교사에 불과했지만, 이미 시집『사슴』을 내어 문학적 명성이 높았던 터라, 그는 함흥의 문학 지망생들의 詩 뿐만 아니라, 습작소설까지도 자상하고 꼼꼼하게 지도해주었다고 한다.
백석과 나는 앞서 말한 나의 청진동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 함흥시절은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나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무데도 구애받지 않아서 좋았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에 딸린 작은 찬방(饌房)이 하나 있어서, 우리들에겐 그지없이 단란한 보금자리였다. 그의 詩「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청진동 집을 말한 것이다. 몇 해 전에 나는 친구와 이 집을 일부러 찾아가 보았는데, 뜻밖에도 그곳은 꼬리곰탕을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는 식당 안방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놓고 옛 청진동 시절의 추억에 젖었던 적이 있다.
그 시절 우리 둘은 참으로 행복하였다. 워낙 서로 만족하였고, 아무런 빈틈이 없었으며, 오직 서로에게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밖에 아무런 것에도 무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늘 나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려고 세심한 배려를 했던 것 같다. 그는 나의 어떤 일에도 절대 간섭을 하지 않았으며, 불편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단정한 젠틀맨이었고, 매사에 열정적이었다. 비록 밖에서 화난 일이 있었어도 혼자 가만히 참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언제 화를 내고 있었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았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말수도 적었고, 어떤 경우에도 남의 결점을 화재로 떠올리는 법이 없었다. 이런 그의 성격을 까다로운 편이라고 할까. 물 한 방울 종이 한 장조차 누구에게 신세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으며, 또한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때 청진동 집에는 늘 와서 부엌일을 보고 잔심부름도 해주는 찬모가 있었는데, 나는 그가 찬모에게 무엇을 시키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처럼 말수가 적던 백석도 일단 시에 관한 화제로 옮겨지면 갑자기 눈빛을 반짝거리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요절한 일본작가 아꾸다까와(芥川龍之介)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고, 또 다른 일본 문인들의 이야기도 재미있게 했던 것 같다. 내가 문학을 모르니 다만 웃기만 하고 들을 뿐, 절대 아는 척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 무렵 《삼천리(三千里)》지에 두어 편의 수필을 필명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종로 네거리 한청빌딩 부근에서 과일 파는 상인들의 밤 풍경을 쓴 것인데, 나의 글이 실린 책이 나오던 그날은 하루 종일 함박눈이 펑펑 왔다.) 일본의 문인들을 화제로 떠올리긴 했지만, 그는 일본말 쓰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일찍이 일본 유학도 다녀왔으니 일본말도 잘했을 것이나, 그는 일본말을 써야 할 때, 거기에 바꿔 쓸 수 있는 우리말을 애써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보통 담화 때는 주로 표준말을 썼지만, 그의 억양은 짙은 평안도 말씨였다. 무슨 일로 기분이 상했거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때, 그는 야릇한 고향 사투리를 일부러 강하게 쓰는 습관이 있었다. 한 예를 들면 천정을 '턴정' 정거장을 '덩거장', 정주를 '덩주', 질겁을 '디겁', 아랫목을 구태여 '아르궅' 따위로 쓰는 식이었다. 그의 식사 공궤(供饋)는 매우 수월한 편이었다.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잘 들었지만, 육류보다는 나물반찬을 비교적 더 좋아했다.
한번은 함께 시내 나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푸줏간 앞을 지나는데, 그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시뻘건 고깃덩어리를 어떻게 똑바로 쳐다볼 수 있어?"하고 말했다. 정말 그는 푸줏간을 제일 질색했다. 함께 살면서 보니 그에겐 이처럼 드러나 보이는 이상한 습관이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집 안방의 창문을 여닫을 때도 그는 잠금쇠 만지기를 피하여 손이 잘 닿지 않는 창문틀의 위쪽이나 아래쪽을 겨우 밀어서 여닫곤 했다. 한번은 함께 전차를 타고 어디를 가던 길이었다. 전차가 길모퉁이를 돌 때 갑자기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 쏠렸다. 그때까지 머리 위의 손잡이를 불결하다며 아무것도 잡지 않고 그냥 서 있던 그는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창유리에 갖다 대면서 몸의 중심을 유지했다. 또 오랜만에 놀러온 친구와 악수하고 난 뒤에는 곧 그가 눈치 채지 않게 수도간으로 나와 꼭 비누로 손을 씻곤 했다. 보다 못한 내가 몇 차례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수건을 달랄 때 일부러 안 주곤 했더니, 그 뒤 그 습관만큼은 조금 고쳐진 것 같았다.
그는 각별히 즐기는 취미나 오락은 없었다. 술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경음가(鯨飮家)는 아니었고 오히려 애주형에 가까웠다. 책으로는 모리악의『예수전』, 중국작가 변윤(邊潤)의 『요불이전(了不以前)』을 즐겨 보았으며, 심심할 때면 잡지《문에춘추》를 보거나 일본시집을 뒤적거릴 정도였다.
그의 목소리는 참 다정스럽고 부드러웠으며, 청으로서도 괜찮은 편이었으나, 내가 아는 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집에 빅터상표의 고급 유성기가 하나 있었지만 한 번도 거기에 손대는 걸 못 보았고, 가요·창극 같은 데도 무관심했다. 그 무렵《조광》지가 요청해온 설문란에 그가 자신의 취미를 '潟唱(서도창)'과 '타이프라이팅'이라 쓴 것을 보았는데, 이 '서도창'이 직접 부르는 걸 말하는 것인지 소리꾼의 노래를 듣는 걸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는 다만 말없이 묵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러다가는 잡지보고, 시집보고……하였을 뿐이다. 그의 본명이 백기행(白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무렵 청진동으로 그에게 부쳐져오던 편지의 겉봉에는 '백기연(白基衍)'으로 씌어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그가 몹시 기뻐하던 모습을 꼭 한번 본 적이 있다. 언젠가 내가 시내 본정(명동의 일제 때 이름) 부근엘 나갔다가 상점의 쇼윈도에서 넥타이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옅은 검은색 바탕에 다홍빛 빗금 줄무늬가 잔잔하게 박힌 것이었다. 얼핏 그것이 백석에게 매우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심코 사와서 드렸더니 그의 얼굴 표정에는 기뻐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튿날 그는 내가 사온 넥타이를 매고 출근 했는데, 저녁때 와서는, "여보, 오늘 ××를 만났는데, 이 넥타이 참 좋데" 라고 했다. 그는 그 뒤 여러 날 동안 줄곧 그 넥타이만 매었고, 퇴근 후에는 예의 그 말을 꼭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어제 그 소리 오늘 또 하네. 어쩌면 그게 그렇게도 좋을까' 했지만, 내심 그 말이 듣기에 즐거웠다.
이 넥타이 이야기는「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라는 시에서 "언제나 똑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흔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로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백석은 사람을 만나 그가 먼저 주도해서 교제를 이끌어간다거나, 누구를 새로 사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인간 백석이나 그의 시에 홀딱 반해버린 사람이 아주 그에게 제 스스로 엎어져오기 전에는 도무지 사교의 능력이라곤 없는 사람이다. 얼른 보기에 무심한 편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는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친밀감을 표시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한 중에서도 함대훈, 허준, 정근양, 그리고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조○○는 비교적 가까이 지내던 친구였다.
도쿄 외국어학교 노어과를 나온 일보(一步) 함대훈은 황해도 풍천 출생의 노문학자로서 소설도 몇 편 썼다. 그는 조선일보 출판부 주임으로 있었으며, 편집국장을 지낸 함상훈과 형제지간이었는데, 괄괄한 성격에다 대단한 호주(豪酒)였다. 당시 그는 청운동에 살았는데, 우리의 청진동 집에 가장 자주 놀러왔던 백석의 친구였다. 나중에는 그가 아무 때건 불쑥 찾아오는 것이 너무 싫어서, 내가 백석에게 "함대훈 씨가 싫어요"라고 말하면, "그는 당신이 좋다고 하던걸" 하면서 꼭 친구와 나를 함께 두둔하곤 했다. 그래도 줄곧 내가 못마땅한 얼굴로 "함씨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에요?"하면 "아냐, 그는 정말 당신이 좋대"라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함대훈은 그때 무슨 잡지를 만들던 최남주의 여동생 최옥희와 열애에 빠져 있었다.
평안도 용천 출신 소설가 허준은 1935년 10월 조선일보에 시「모체(母體)」를 발표하면서 백석과 비슷한 시기에 문단에 나왔는데, 이듬해《조광》지에「탁류」란 단편소설을 쓴 후 아주 소설 쪽으로 돌아섰다. 백석과는 같은 직장에 있으면서 서로의 심지(心志)가 꽤 잘 들어맞았던 것 같다. 그는 낙원동에 살면서 자주 왔었는데, 매우 큰 체격으로 다정다감한 성격이었으며, 술을 좋아했다. 백석이 허 씨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시까지 쓴 걸 보면, 그와 남다른 우정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의사로서 문필생활을 겸하던 정근양, 그는 앞서도 말한 바처럼 백석과 조선일보 장학생 동기였고 청진동 집에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나중에 백석이 만주로 떠났을 때, 정도 서울을 떠나 북지(北支)산서성 임분현 이라는 곳에 가서 병원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또 한 사람의 친구는 서울의 어느 중학 영어선생을 하던 조○○였다. 그는 우리 집에서 놀다 밤이 늦어 돌아갈 때면, 그때마다 우리를 앞에 세워놓고 "그대들 둘은 어찌 그리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인고……"하면서 부러운 듯 말했다. 사실 백석과 나는 서로 다른 기질 때문에 오히려 잘 맞았는지 모른다. 한쪽이 뾰족한 성품이면 다른 한쪽은 좀 둥글둥글한 것이 인간관계의 조화가 아닐까.
그밖에 백석과 평소 가까이 지냈던 이들은 문학평론가 백철이 있다. 그는 백석보다 네 살 위였지만 동향선배로서 친밀하게 지냈고, 함흥 영생학원에도 한때 같이 있었다.
1935년 시집『사슴』이 나온 직후, 서울 태서관에서 가진 출판기념회 발기인 명단의 이름들은 몇몇을 빼곤 대부분 백석과 조선일보에 함께 몸을 담고 있던 문인, 화가들이었다. 또 그들은 대개 백석의 시를 남달리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안석영(安夕影)은 서울 토박이로 본명이 석주(碩柱)였다. 일찍이 1921년 나도향(羅稻香)의 동아일보 연재소설『환희』의 삽화를 그렸던 그는 한국 삽화계의 선구자이다. 30년대 중반 안 씨는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냈는데, 워낙 잘생긴 얼굴에 다재다능하여, 나중에는 언론계를 떠나 전적으로 영화에만 몰두하였다. 백석보다는 11년 위였는데, 서로 각별히 따르고 위하였다.
김규택(金圭澤)은 웅초(熊超)란 호를 가졌던 분으로,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나와 역시 조선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던 화가였다.
일본 호세이대학 불문과를 나온 여천(黎泉) 이원조(李源朝)는 경북 안동사람으로 시인 이육사(李陸史)의 아우였는데, 그때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다. 언제나 한복차림이던 그는 늘 자신이 양반고장 사람임을 자랑삼아 말했고, 그것을 날마다 들어온 사람들은 "여보, 그 양반타령 좀 작작허우"하며 싫은 소리를 하였다. 깔깔한 샌님 같던 그도 일단 술이 취하면 주사(酒邪)가 대단해서 모두들 슬금슬금 뺑소니치는 모습이었다.
함경도 출신의 시인 편석천(片石村) 김기림은 백석보다 4년 위였는데, 그도 일찍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다.『사슴』시집이 출간되자마자 즉시 서평을 써줄 정도로 그는 백석의 시를 좋아했다.
정현웅은 1931년 선전(鮮展)에서 작품「여인상」이 특선으로 뽑힌 서양화가로서 당시 백석과 함께《여성》지의 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어느 잡지의 삽화로 백석의 프로필을 그리면서 "미스터 백석은 바로 내 오른쪽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오리기도 하고 와리스케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밤낮 미스터 백석의 심각한 얼굴만 보게 된다. 미스터 백석은 서반아 사람도 같고 필리핀 사람도 같다. 미스터 백석에게 서반아 투우사의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삽화의 말을 썼다.
한편 백석이 평소에 문학적 재능을 자주 칭찬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동문학가 강소천이다. 용률(龍律)로 함남 고원 태생인 그는 백석보다 불과 3년 밑이었으나, 만학으로서 백석에게 직접 문학을 배운 제자였다.
1939년 서울 명동입구 미도파 건너편에 '제일다방'이라고 있었다. 이 다방은 당시 경성일보 학예부에 있던 일본인 기자 기쿠지(菊池)으 아내가 경영하던 곳으로, 이른바 재경(在京)문인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언제 어느 때건 가보면 낯익은 문인 몇몇은 꼭 눈에 띄었다. 공작새의 꽁지깃으로 장식한 세련된 실내장식에다, 이름 있는 유화도 여러 점 운치 있게 걸려 있는 꽤 분위기 있는 다방이었다. 한번은 그곳으로 오라는 전갈이 와서 가보니 백석은 함대훈, 백철 등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정쩡하게 합석이 되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양인은 번갈아가며 나의 얼굴이 예쁘다느니 어떻다느니라는 말을 자꾸 거듭하여 면전에서 몹시 난처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백석은 혼자 웃고만 있었다. 나중에 백석이 만주로 떠난 후에 길에서 허준, 정근양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도 "김(金)은 어째 갈수록 예뻐져?" "백석이 장가를 두 번씩이나 들고도 곧장 도망 나온 까닭을 인제야 알겠구먼."이라고 큰소리로 떠들어 그때도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른 적이 있다.
1939년 유월 어느 아침이었다고 생각된다. 백석은 그날 충청도 진천으로 한 주일 가량 출장을 다녀오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여자의 육감으로 그가 먼젓번처럼 필시 장가들러 가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약속한 한 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번에도 좀 늦어지긴 하겠지만 틀림없이 돌아오리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에 달갑지 않은 것에 대한 그의 차디찬 성질, 그리고 나를 향한 열정을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청진동 집에서 조선일보까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나는 찾아가기는커녕 전화 한 번 조차 걸지 않았다. 점차 매섭게 타오르는 내 가슴속의 독(毒)과, 또한 나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나의 성격을 백석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또 몹시 초조하게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없는 빈방에 혼자 남아서 무척 공허한 심정이 들었고, 내 가슴 속의 공허감은 차츰 매몰찬 복수심으로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매몰찬 복수라는 게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기껏해야 연전에 내가 몰래 함흥을 빠져나오던 것처럼, 나는 그에게서 한동안 멀리 떠나 있고자 했던 것뿐이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채로…… 웬만한 살림을 대충 챙겨서 나는 명륜동 언덕으로 숨어버렸다. 지금의 성대 뒤쪽이었는데, 1930년대 후반 그곳 부근의 앵두나무, 능금나무, 배나무 따위를 심어놓은 과수원이 많았고, 주택들도 드문드문 서 있는 변두리에 불과했다. 지난 날 부통령을 지냈던 장면(張勉)씨의 집이 바로 길 건너편에 있었다.
어느 석양 무렵이었는데,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누가 "자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된 일일까? 그는 내가 잠적한 이곳을 모를 텐데……(그가 어떻게 나의 거처를 찾아내었는지 나는 지금도 그것을 불가사의로 생각한다.) '자야'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백석뿐일 텐데…… 부르는 소리는 두 번 세 번 거듭 들렸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망설이다가 '에라, 어찌 되었건 나가놓고 보자' 하고 중얼거리며 황급히 나갔더니, 그가 석양을 등지고 퀭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두 달 만에 다시 만났다.
나는 그때까지도 무척 독이 나 있었지만 막상 얼굴을 대하는 순간 다시금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좋아서 마음이 시루리 풀리듯 스르르 풀려 버렸다.
그러나 나는 백석의 부모가 못내 원망스러워졌고, 또 예의 그 독한 마음은 불쑥불쑥 치밀었다. 그는 본시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족두리를 풀어 내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색시를 내버려두고 집을 나온 것이다. 내가 알기로 백석이 사모관대하고 장가를 든 것은 두 번이다. 그러나 그는 그 때마다 부모가 정해준 배필을 마다하고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1939년 동짓달이었을 것이다. 나는 중국의 북경, 소주(蘇州),항주(杭州) 상해 등지를 거쳐 한 달 만에야 돌아왔다. 떠날 때 나의 행선을 백석에게 알리지 않았다. 다녀와서도 나는 그에게 여행 이야기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그 또한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알리지도 않고 중국을 다녀온 처사에 대해 상당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앵돌아진 속으로 '당신께선 지금 저 때문에 화나시게 해서 송구스럽지만, 당신도 제가 겪은 고통을 한번쯤 겪어보셔야 해요'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그저 묵묵해지기만 했고, 서로의 일과를 화제로 떠올리지도 않았으며, 이런 우리들 사이는 심상찮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하루는 그가 보낸 메시지가 왔다. 왕십리역 대합실 구내다방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때의 왕십리란 보잘것없는 초가와 들판뿐인 아주 시골이었는데, 동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종점인 왕십리까지 가서 내리면 사방에서 거름 썩는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그 변두리 먼 곳까지 나오라 했던 것 같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대뜸 자기와 함께 만주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실 이러한 권유는 함흥시절부터 심심찮게 들어오던 터라 조금도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그의 표정은 너무도 심각한 듯 여겨져서, 나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나는 그때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그는 만주 신경(新京)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나에게 단 한마디의 그 어떤 기별도 남겨두지 않은 채…….
돌이켜 보면 그의 만주행은 함흥에서부터 계획해오던 것이었고, 또 그가 재차 서울로 와서 옛 직장을 다시 나가고 한 해를 머무른 것도 결국은 나 때문에, 내가 마음에 걸러서였던 것 같다. 나 아니었으면, 그는 진작 함흥에서 만주로 곧장 떠나갔으리라. 그가 만주 땅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깊은 속뜻을 내 얕은 여자의 소견으로 어찌 감히 짐작인들 했으랴만…… 그는 내가 자기 권유대로 쉽게 만주로 따라오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에서 이런 대목을 본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그때 만주로 함께 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진작 그곳 생활이 지겨워진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를 만주에서 온갖 고생을 하게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한 것도 나였고, 국토가 둘로 쪼개어져 그를 다시는 북에서 서울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도 모두 내가 미욱했던 탓이다.
만주 신경시절 백석과 같은 집에서 살았다는 작가 송지영(宋志英)씨의 술회로는 백석이 그때 만큼은 고향의 부모에게 매달 약간의 송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괜찮았다고 한다. 그 무렵 항상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송씨가 "그 옷, 서울의 김이 보냈구려"하고 농을 걸면, 백석은 갑자기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 이후 백석은 실직상태가 되어서 만주의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몹시도 고달픈 생활을 하게 되었던가보다. 그가 이렇게도 모진 고생을 했었다는 생각을 하면 온통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 시절 만주의 쓸쓸한 하숙방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 그의 詩「흰 바람벽이 있어」를 통해, 나는 필시 나의 모습으로 짐작되는 부분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때가 해방 직전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생활의 외로움과 고달픔은 그의 마지막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낱낱이 그렁그렁 박혀있다. 깊은 밤에 그의 전집을 끌어안고 이 시를 혼자 목이 메어 읽어가노라면 주체할 길 없이 솟구쳐오는 뜨거운 눈물을 나는 참지 못한다. 이 시에서 그의 맑고 고결한 정신은 이미 세속을 훨씬 떠나 있는 듯하다.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 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흡사 그가 눈앞에 당장 되살아 온 듯 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 말 속에는 평소의 그의 성품, 현실에 임하던 그의 모습 같은 것이 그대로 생생하게 스며 있다.
그와 헤어지고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러갔다. 시간이란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이날 이때까지 온갖 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것도 헤아려보면 모두가 백석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고, 또 그를 향한 반발심이 물 끓듯 끓어 넘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내가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고, 나 또한 서럽게 살아왔다. 어찌 모든 것을 이대로 마감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 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의 텅 빈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의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 나온다.
사실 10여 년 전부터 나는 그의 전집을 내 손으로 엮어보려고 틈날 때마다 흑석동 살던 백철 씨와 의논해왔었다. 그 무렵, 백철은 어느 신문칼럼에서 시인 백석을 일컬어 "한국시사에서 소월 다음가는 귀재"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뒤 병을 얻어 나의 포부를 도와주지도 못하게 타계해버렸다. 이미 그의 전집이 세상에 나왔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 끝 -
백석과 자야의 사랑이야기 솔새김남식
기생과 동거를 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하자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 갈등 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도피 하자고 제의 한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함흥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백석 혼자만 떠나게 된다
해방과 625의 혼란으로 둘사이는 연락이 끊기고 서울로 돌아온 자야는 고급요리집 대연각의 주인이 된다
바삐 사는라 백석을 잊었던 그가 나이 70이 되어서야 그 사람을 떠 올리며 회한을 하게 된다
.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그때의 실책으로 백석을
비운(悲運)에 빠뜨렸다고 자야은 늘 후회하며
살았다고 전하며 백석이 그립고 보고 싶을땐 줄담배를 피웠다던 자야!
그녀는 전재산을 백석을 위해 내 놓고 요리집은 길상사로 바뀐게 된다
삶이 무어냐고 묻고 싶거든 길상사를 찾아가면
수목 우거진 언덕 한켠에 김영한의 비석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삶이란
그저 그 언덕 위로 불어 오는 바람 같은 것
백석을 위해 전생의 삶을 보낸 멋쟁이 여인 그 여자 김여사 자야는
길상사가 문을 연지 2년만인 1999년 83세에 훌훌 서방 정토 세계로 떠난다
백석은 어찌보면 운좋은 남자임은 분명하다
사랑하는 여인 자야가 그를 평생 잊지 못했으니 말이다. solsae.kns
세월의 흔적 내마음을 적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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