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값 솔새김남식
요즈음은 아이들에게 심부름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다. 집안에 아이들도 예전처럼 많이 없거니와 시대가 변했는지 아이들이 심부름하던 때가 아닌 것 같다. 옛날에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심부름은 거역하지를 못 했다. 이른 새벽에 아버지가 일어나셔서 머리맡에 담배가 없으면 곧 아이들을 부르곤 하였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가기 싫은 눈치가 보이면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더 커졌다. 아랫마을에 있는 담뱃집에 심부름을 가면 나보다 더큰 개가 짖어대면 무서워서 가까이 접근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밥 지을때 부엌 아궁이에 불 때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이런저런 잔 심부름을 많이 시키곤 하였다. 추운 겨울이 되면 누구나 움직이기 싫다. 사람이나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목이 좀 칼칼해서 우유를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늘 마시던 우유가 없었다. 핵가족으로 살다보니 누구하나 심부름을 대신할 사람이 없는게 보통이다.
칼바람이 부는 이른 아침 대충 옷을 입고서 집을 나서 우유를 사러 가게로 나 갔다. 시간은 그렇게 이른 아침도 아닌 오전 9시쯤 이었다. 마침 주인아주머니가 가게에서 밖으로 나오고 있어서 우선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우유 사러 왔는데 마침 나 오시네요' 웃는 얼굴 하면서 곧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문을 열더니 자기만 들어가고 그냥 문을 확 닫아 버리는 것이다. 얼떨결에 다시 열려고 하니까 이번에는 옆으로 미는 반대편 문을 재빨리 내 앞으로 밀어서 내가 들어가려고 하는 쪽은 막혀서 들어 갈 수 없게 되었다. 집에서 그리멀지 않은 오르막 골목길에 있는 슈퍼이다. 가게는 미닫이 문으로 양쪽으로 여닫는 가게로 종종 그래도 자주 이용하는 단골 가게이다.
순간 들어오는 걸 싫어서 하는구나 싶어서 그냥 가만히 있으니까 '무슨 우유요' 하면서 우유를 꺼내 작은 틈으로 내 주었다. 그래서 '그거 말고요' 우유를 달랐더니 멸균 우유를 주는 것이다. '멸균 말고 둥근 통에 있는 우유 주세요.'라고 다시 말을 했더니 그건 없다면서 이거 그냥 가져가라고 문틈으로 다시 주는 것이다. 그래서 잘 먹지 않던 멸균 우유를 사고 돈을 문틈으로 주고 왔다.
약 20㎝ 정도의 문틈을 열고 돈을 받으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느꼈다. 그 작은 문틈은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주로 담배를 사는 사람들이 돈을 내밀고 담배를 받는 곳이다. 그날 영하의 추운 겨울 날씨에 밖에서 한참을 덜덜 떨게 하였다. 그런 게 아니라면 들어 오라고 했을 텐데 운동복 옷차림으로 갔다가 얼어 죽을 뻔 하였다. 안 살까 하다가 또 첫 손님부터 그냥 갔다고 욕할까 봐서 모르는 집도 아니고 동네 슈퍼인데 거의 매일 가다시피 하는 곳인데 할 수 없이 그래서 그냥 그걸 사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온종일 기분이 안 좋아서 그냥 혼자 투덜거렸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면서도 너무 불쾌하였다. 원래 모난 성격이라서 다른 사람들과 잘잘못을 다투는 그런 체질이 아니기에 더욱 속상 하였다.
일요일 아침 아내는 볼일이 있다고 아침 일찍 나갔다. 일어나 보니 화장대 위에서 굴러다니는 임자 없는 돈을 꼬불처서 새벽바람에 목이 말라서 가게를 갔던 것이다. 집안에 식구가 없다 보니 심부름할 사람이 없는 게 요즈음의 일이다. 그래서 겨울에는 노인이 굶어 죽는다는 말이 맞은 것 같기도 했고 하여튼 그날은 기분이 별로였다. 누군가 그러는데 술 먹고 난 뒤에 목이 마를 때 해장으로 우유가 좋다기에 그래서 사러 갔던 것이다. 기분은 상했지만, 차가운 우유를 큰 컵에 따라 한 잔을 마시니 속은 아주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이유를 알아냈다. 바로 그 원인은 우리집 외상값이었다.
가끔 기분이 꿀 하거나 인생이 외롭다 생각되면 술 한 잔으로 지부 지쳐를 하는데 내가 그동안 외상으로 갖다 먹었던 막걸리 값이 많이 밀려 있었다. 막걸리는 다른 술보다 마시기에 편하고 목 넘김이 부드러워서 부담 없이 먹기에 아주 딱 좋은 술이다. 또한 먹을 만큼 따라서 먹고 남은 양은 다시 냉장고에 넣어 두면 며칠은 요긴하게 목마름을 덜어 드리는 약술이 되었다.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외출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슈퍼를 지날 때면 꼭 들리는 곳이다.
외상으로 술을 사면서 "아줌마 그냥 갈게요" 하고 마치 내가 주인처럼 냉장고 문을 열고서 막걸리 한 병씩 가져간 게 여러 번 이었다. 또한 안주 부스러기로 바닐라맛의 웨아스와 새우깡과자 까지 덤으로 가져간 게 꿰 많앗던 것이다. 돈으로 계산을 하면 불과 칠팔천원 정도이지만 호주머니가 빈털떨이가 될 때도 간혹 있었다. 외상값은 내가 갚기도 하지만 거의 마누라가 대납해주기에 항상 그리하는 줄 알았엇다. 사실 이유인즉 집안에 잠시 돈이 마르면 잊은 채로 그냥 며칠 지나가고 그랬던곳 같았다. 그러던 지난 가을인가 여름내 먹었던 외상값 팔만사천육백원을 대신 대납하고는 술값 없으면 외상 먹지 말라고 마누라가 엄포와 함께 친찮을 주었는데 그걸 까막힌 잊었던 것이다.
하긴 여러 번 외상값을 갚아 주는데 놀 백수가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날의 진실을 알고 난후 그저 눈치 없이 슈퍼 아주머니에게만 욕했던 꼴이 되었다. 그래서 며칠 후 밀린 외상값 오만구천백원을 공손히 갔다 주면서 오히려 내가 사과를 해야했다. 그러고는 절대 외상을 하지 않겠다고 웃으면서 그랬더니 슈퍼 아주머니 하는 말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동안 얼마나 내가 그리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을까 생각을 하며 어째거나 폐박스라도 열심히 주워서 막걸리 값은 벌여놔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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