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솔새김남식 암울했던 시기에 향수를 달래던 노래 '찔레꽃'은 1942년 백난아가 부른 노래이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 노래로 대신하였다 항시 서러운 눈물과 시련으로 가득했던 공간으로서 어렴푸시 기억속에서 찔레꽃은 언제나 향수의 단골 테마로 떠 올랐다 一說에 따르면 김교성과 백난아가 만주 공연을 다녀온 뒤 만주 독립군들이 고향을 바라보는 3절 가사는 우리에게 그리 익숙하지 않지만 분명히 너무 아름답고 애잔하다. 아련한 추억의 스크린에 고향의 모든 것은 온통 그리움의 대상으로 떠 올랐다 백난아의 창법과 잘 어우려져 한국적 정서와 망향의 아픔을 상징하는 唱歌가 되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발표된 곡이라서 북한에서도 불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제 강점기때 일본은 중국에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서 우리 조선땅 북간도 서간도를 중국에게 넘겨 주었고 일본은 대륙 침략의 발판을 삼았다. 당시 만주에는 수백만명의 우리 민족이 살고 있었다
노래中 臺詞에 나오는 목탄차는 짐 칸에 보일러를 싣고 나무를 태운 가스를 엔진에 주입하여 운행한다
1절 2절 3절
* 동무야, 세동무 = 북간도 이북말 * 천리객창(客窓) = 천리 머나먼 여관 방문의 창 단1곡만 들어있는 옛날유성기용 판 세월이 지나면서 현재는 원래 가사에서 조금씩 변형되어 부르고 있어서 좀 혼돈된다 그런데 여러 형태의 가사로 변형에서 불러도 손색없이 어울리는 노래가 되었다 아래 영상에서 각기 다른 노래의 맛을 보기 바랍니다. solsae . 1절 찔레꽃 붉게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언덕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2절
1절 찔레꽃 붉게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언덕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가를 불러 주던 못잊을 사람아 2절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동창생 천리객창 북두별이 서럽습니다 작년봄에 모여 앉아 찍은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 보니 즐거운 시절아 찔레꽃 대사는 풀레이를 누르세요 찔레꽃노래 대사 이른바 대동아 전쟁의 풍운이 휘몰아치든날 우린 그 어느때 보다 슬픈 별아래 살아야 했다 광난의 전쟁앞에 바처진 슬픈 제물이었다 젊은이들의 충렬한 눈동자가 그 절망의 황혼을 보고 있었다
왼종일 이른바 나래비를 서고 처녀들은 정신대에 뽑혀 갈까바 시집을 서들렀지 못 견디게 가혹한 그 계절에도 찔레꽃은 피었는데, 가요무대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를 발표했을 때 1위는 울고넘는 박달재에 이어서 2위로 이 노래가 차지했을 정도로 오랫 동안 애창되고 있다. 2007년 백난아의 고향인 제주도 한림읍 명월리에 찔레꽃 노래 공원과 노래비가 세워졌으며 근대 100여 년간 직업별 제주여성 1호를 발간하면서 백난아를 언론·문학·체육 분야 1호여성으로 선정했다.
백난아(白蘭兒 1923 ~ 1992년) 제주 한림읍 출생 본명 오금숙(吳金淑) 1940년에 광주여고보을 졸업하고 태평레코드와 조선일보가 공동으로 주최한 콩쿠르 대회에서 2등으로 입상했다 주로 극장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심장병이 겹쳐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가사에 나오는 찔레꽃은 우리가 알고있는 그 찔레꽃이 아니다 이 노래에 나오는 찔레꽃은 속칭 "때찔레"라고 부르던 따뜻하고 양지 바른곳에서 서식하며 매우 이른 봄에 붉은색 꽃 피던 나무로 이걸 모르는 대부분 사람들이 "찔레꽃 붉게 피는" 가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요즘 흔히 말하는 찔레나무와 전혀 다른 나무이다 이것을 부를때 발음을 길게 하여 "찌일레"라고 일반 찔레나무와 구분하여 불렀다 때찔레, 해당화(海棠花), 해당나무, 매괴(玫瑰), 열기나무로 부르기도 한다 . 이 꽃은 물 빠짐이 좋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떼를 지어 자라며 키는 1~1.5미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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