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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을 다녀오다 솔새김남식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4박 5일 고구려 유적지와 백두산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여행전 날은 잠이 오지 않아서 설레이다가 새벽 4시에 일어나 인천에 도착해서 같이 여행을 할 친구를 만났다. 여행기간 동안 말 동무할 친구들과 함께 떠나게 되어서 무엇 보다도 마음이 편했다. 1998년 아주 오래전에 모 산악회를 따라서 백두산 북파 여행을 떠났는데 날씨 때문에 그때는 안타갑게도 천지를 못 보고 돌아 왔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백두산에 대한 그리움을 열병처럼 앓고 있었다. 늘 기회를 보며 망서리는 나에게 더 나이 먹기전에 다녀 오라고 등 떠미는 아내 덕분에 대련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인천공항을 출발한지 한시간 남짓해서 11시가 좀 지나 대련 공항 도착을 하였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출구로 나오니 애인을 기다리듯 현지 가이드가 핏켓을 들고 서 있었다. 친구들과 다른 일행을 포함해서 모두 12명이 5일간 동행을 하며 여행 할 사람들과 서로 인사를 하고 공항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에 올랐다. 서울을 출발 할 때 부터 비가 내렸는데 중국 대련에 도착하니 바닷가라 그런지 이곳도 안개비가 내려서 앞이 보이지를 않았다. 버스에서 북한에서 태어난 화교 2세라고 가이드가 자기 소개를 하면서 운전기사는 중국 사람으로 한국어 발음으로 유부랄이라고 소개를 하니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아마 우리를 즐겁게 해주려고 우수게 소리를 한 게 분면한데 우리는 그것을 믿기로 하였다. 언젠가 중국 여행길에서 운전기사 성은 양씨고 이름은 딱거 그래서 양탁거라고 해서 배꼽을 잡았던 기억이 생각났다.
안개비가 내리는 대련시 차창밖으로 보이는 고층 건물과 한자 간판을 바라 보니 조금전 인천공항에 내가 있었는데 어느새 중국에 와 있다는 게 실감 났다. 우리는 공항을 빠저 나와서 차로 25분 거리에 있는 성해광장에 도착했다. 대련은 1899년 러시아가 침략하면서 건설된 제법 규모가 큰 항구 도시로서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 성해광장을 자랑하고 있다. 천안문 광장보다 몇 배 더 넓다고 하는데 해안에 설치한 반달형 거대한 책의 조각 모형은 도시 발전을 위하여 한페이지의 장을 열었다는 의미라고 한다. 성해광장은 1999년 시 건설 백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백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을 지나왔다는 상징으로 일세부터 백세 까지 백쌍의 발 모양을 광장 바닥에 새겨 놓았다. 광장 중심에 위치한 각각의 조각품들은 세계를 향해 전진하는 중국의 기백을 표시한다고 한다. 광장은 대부분 잔디가 깔린 공원으로 사람들이 쉴 수 있는 나무 한그루가 없는것 같았다.
대련은 우리와는 고대사에서 부터 밀접한 관계로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는 짙은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데도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나와서 여휴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약 30여분 광장을 둘러 보고 점심을 먹기 위해서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 새벽에 나와 비행기에서 달랑 주먹밥 하나 먹어서 인지 중국 음식이었지만 아주 맛있게 먹었다. 단둥까지 4시간이 걸리는 장거리인데 교통 수단이 우등 고속버스도 아닌 승합차라서 힘들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을 해 본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시내를 통과 할 때는 섰다 가다를 반복한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우리나라 와는 전혀 다르게 차들이 없어서 한가했다. 그런데 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가이드가 어제 먹은 술 때문에 길에서 토하느라 잠시 갓길에 정차하였다. 가이드 할 사람이 책임감없이 밤새 술 먹었다기에 혹시 가이드를 대충하지 않을까하는 염려에서 뭐라 말할 수도 없었고 타국에 온 우리들은 그냥 눈치만 보며 걱정을 하였다. 이윽고 차가 출발하고 차창 밖으로 산을 보기 힘들 정도의 넓은 들판으로 대부분 어린 옥수수가 자라고 있었다. 우리나라 어느 시골처럼 느껴지는 농촌 마을이 지나고 또 지나가고 있었다.
여행을 같이 할 일행 12명은 주구장창 5일간 같이 할 동지였기에 처음 만난 낯선 사람들이지만 버스를 4시간 타고 오면서 오래전 같이한 친구처럼 동병상련의 대화가 통해서 단동에 도착 할 쯤에는 어느새 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단동에 도착을 하여 저녁 식사전 압록강철교 유원지에 우리는 맛보기로 들렸다. 제법 비가 많이 내리는 압록강 철교를 하염없이 바라 보는데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어오고 있다. 강건너가 북한땅 신의주라고 TV에서 여러번 보았던 장면처럼 단둥과는 전혀 다르게 불이꺼진 어둠이 짙은 미로속 이었다. 저녁식사를 위해서 식당에 도착하니 한국 사람들 위해서 향료를 덜 넣고 우리 입맛에 맛도록 음식을 준비했다고 해서 그런지 중국 음식에 대한 별 거부감없이 맛나게 또 잘 먹었다. 우리는 단둥 역전앞에 있는 단철대주점 호텔에서 짐을 풀고 내리던 비가 그치기에 친구들과 다시 압록강 유원지로 밤 풍경을 구경 나 갔다. 강변에 나와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중국사람 한국사람 북한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서로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 어우러저 살아가는 곳이 이곳이 아닌가 말이다. 단둥은 북한과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한 도시다. 압록강변에 있는 선창가 주점에서는 여러가지 다양한 노래를 들려 주는데 그 중에서 우리에 아리랑 노래도 익숙하게 들려왔다. 갖가지 물건을 파는 노점들이거리에 많았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북한 지폐를 파는 상인들이 있었다. 어디 가서도 쓸 수가 없는 북한지폐 아마 한국 관광객들이 호기심에 사 가는 모양이다.
다음날은 5월 26일 월요일 여행 둘째날이다
여행을 나오면 왜 잠이 오지않는지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단둥역 그리고 시외버스 정류장 오늘도 바쁘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압록강 철교가 있는 유원지를 걸어서 아침 산책을 다시 나갔다. 오늘은 날씨가 맑아서 파란하늘이 머리위를 지나고 아침 햇살도 강물 위로 예쁘게 비추이고 있었다. 강건너 신의주땅도 어제와는 달리 아주 잘 보이는데 강변 숲속으로 놀이기구 시설이 보이는 것을 보면 아마 그쪽 신의주에도 강변 유원지가 있는 모양이다. 단둥은 현대식 고층 건물이라면 어제는 날씨가 흐려서 잘 볼 수 없었지만 신의주 쪽으로 보이는 것은 시골 읍내처럼 한가하고 초라하게 축축한 모습으로 그렇게 내눈에 보였다. 거리를 산책하는 사람 모여서 기공체조를 하는 사람등 유원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새벽시장인듯 갖가지 먹을 것들 파는 노점들이 강변을 따라 열리고 있는데 남방에서 올라 온 듯한 복숭아를 사 먹어 보니 우리 것과는 맛이 전혀 달라서 먹을 수가 없었다. 가볍게 아침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고 7시 30분 단둥을 출발하여 집안으로 향했다. 어제와는 달리 날씨가 맑으니 일행들은 기분이 모두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단둥에서 집안으로 가는길 압록 강변을 달리고 가이드는 강건너 신의주쪽 위화도 월량도를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집안(集安)은 중국명으로 지안시를 가리키며 단둥에서 거리는 314km로 승합차로 5시간 대련에서는 9시간이 소요되는 장도의 거리이다. 집안시는 압록강을 끼고 있는 국경 도시 북한과 맞닿아 있으며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이 있던 곳으로 인구 20만의 중소도시이다. 원래는 절반 이상 조선족이었으나 동북공정이 시작된 2004년 부터 고구려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다른곳으로 이주시키면서 한족으로 대체 했다고 한다. 현재 조선족 인구는 집안시 전체 인구의 10% 가 안 된다고 전한다. 집안시에 도착해서 춘남강이라는 곳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사후 근처에 있는 수자원보호지역이라고 하는 압록강변에 잠시 들렸다. 북한쪽은 만포시라고 하는데 파란 지붕으로 보이는 북한 주택이 멀리 보이지만 차와 사람은 잘 보이지를 않았다. 이곳은 강폭이 매우 넓었으며 중국쪽에는 하천 부지에 야채를 심었다. 강폭이 넓은 만큼 깊이는 낮을것 같아서 강 건너에서 죽기 살기로 뛰면 충분히 이쪽으로 탈북해서 건너 올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멀리 강 건너 북한의 산들은 어디를 가나 모두 화전처럼 벌거숭가 되었다. 농사 지을 수 있는 전답은 모두 국영이라 자기 소유가 없지만 산을 개간해서 먹을 수 있는 농사를 지으면 개인 소유로 허락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뉴스에서 들은 북한의 식량난이 바로 이것 이었다.
여기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찾아 갔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상가는 영어나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 간판으로 웬지 낯설지 않았다. 유네스코 등재로 인해서 그런지 경관도 좋고 공원 내부는 아주 말끔하게 잘 정돈 되어 있었다. 광개토대왕비는 1982년에 중국 당국에 의하여 새로 건립된 유리로 된 단층 사각 건물 속에 있었으며 장군총과 함께 200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고 한다. 유리로 된 사각 건물안에서는 사진 촬영을 못 하도록 공안원이 지키고 있었고 밖에서는 공산당 직원인듯한 사람이 감시 하는 비디오 촬영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자료가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동북공정으로 우리 역사를 뺏았고도 모자라 이제는 한국 사람들에게 입장료 100元씩을 받아서 챙기고 있는 꼴이 되었는데 우리가 언제쯤 찾을 수 있을지 걱정 해 본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 가장 위대한 고구려의 왕으로 칭송받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 능으로 비의 높이가 6.39m에 이르고 무게가 37톤으로 추정되는 세계적 규모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비는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으며 비문은 고구려 건국 과정과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사업과 업적, 수묘체계 등 세 부분으로 그 내용은 민생을 편안하게 보살핀 하늘과 같이 큰 왕 호태왕의 업적을 기록한 기념비 라는 뜻이라 한다. 광개토왕의 시호를 따라서 중국에서는 호태왕비라고 부른다.
다시 공원 길을 따라서 태왕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고구려의 기백이 서려있는 땅 그 옛날 광복을 위해서 먹을 것을 찾아 조국을 떠나서 이곳에 살았던 선열들이 생각 나기도 하고 공원안에는 천리먼길 이곳 중국 지안시에도 서울처럼 토기풀등 자연 초목들은 언제나 똑같이 피어지는 것을 보니 맴이 좀 그냥 그랬다. 느릅나무가 대왕릉으로 가는 길에 양쪽으로 예쁘게 서 있는데 느릅나무 껍질은 염증치료 한약재로 쓰인다고 한다. 대왕릉에는 안내자도 감시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다. 묘실 내부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다만 철문 안에는 왕을 모신 자리에는 두개의 관이 있었다. 무덤 주위로는 정리되지 않은 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고분으로 들어가는 입구도 어둠고 습기가 있는지 침침해서 원형을 점점 퇴색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대왕비는 유리벽 안에넣고 공안원이 지키고 있는데
대왕릉은 페허로 관리를 하지않고 버려두고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 흩어지는 비바람의 세월속에서 역사를 챙기지 못하던 그 시대가 있었기에 오래전에 도굴 당했다고 한다. 사실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은 1930년대만해도 아무도 돌보지 않은 잡초만 무성했다고 한다. 중국과 수교가 되면서 우리나라 사학자들이 방문하자 동북 공정이 시작 되었고 그래서 관심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는 중국과 소극적인 우리가 역사를 좀더 논리적으로 학술적으로 연구해야 하는데 오랜 세월 지나서 도시 개발로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된다.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지안시 국사에서 배운 옛 지명은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 국내성이다. 중국과 쌍벽을 이루며 동북아의 패권을 다투던 고구려인들의 숨결이 있는 곳으로 광개토대왕이 시퍼런 칼을 휘두리며 호령하던 고구려 북방의 옛 영토이다. 김유신, 김춘주를 삼국통일 위업을 달성한 영웅이라 배웠지만 왜 삼국이 연합해서 당의 침략을 격파하지 못 했을까? 그 시대를 살지 않았기에 그 참 뜻은 잘 모르겠지만 찬란했던 고구려의 후예 230년 발해 역사에서 고려와 연합해서 옛 북방 영토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 중원을 지배할 야망과 의지를 왜 불 태우지를 못 했을까하는 그 시대를 걱정해 보았다.
그러나 세계사는 어느 제국도 어느 왕국도 영원히 존재하지 못 하는 것 때로는 어느 시기가 도래하면 역사는 필연의 법칙에 따라 중국도 일본도 미국도 무릎을 꿇을 것이다.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살수에서 승리한 을지문덕 장군, 백제 근초고왕은 요서 산둥반도에서 영토를 넓혔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북진을 외치며 울렸던 찬란했던 그 역사가우리에게 분명히 있었다. 우리는 항상 그것을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광활한 영토와 13억 중국은 부정 부패와 수많은 소수 민족들이 언제인가는 독립을 쟁취 할 시기가 되면 중국은 러시아 처럼 드디어 몰락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남북통일이라는 큰 과제를 남겨놓고 있는데 때를 기다려야하는가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때를 찾아 나서야 할지 우리는 늘 고민중에 있어야 한다. 이번에는 광개토대왕릉에서 약 2키로 거리에 있는 장군총으로 가보니 이곳 역시 여름한철 한국 관광객들만 다녀 갈 뿐 아무도 찾는 이가 없는 것 처럼 텅빈 주차장이 쓸쓸해 보였다. 장군총은 지린성 집안에 있는 고구려때 돌무덤으로 동방의 피라밋이라고 부른다.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해서 방대형 단을 7층으로 쌓고 제4층 단의 한가운데에 널길과 석실을 설치하였다.
묘실의 방향은 서남향이며 무덤의 네 모서리는 정확히 동서남북에 맞추어졌으며 석조공예가 정교하고 세밀하여 고구려 석조릉 묘중 최고로 친다. 특히 돌에 홈을파서 돌과돌이 맞물리게 하여 쌓아 올렸다고 한다. 특히 버팀돌 석축이 밖으로 밀리지 말라고 큰 자연석을 길게 뉘어서 사방으로 눌려 놓았다. 장군총 주위에는 선돌과 고인돌이 하나 있는데 원래는 4방에 각각 하나씩 이었지만 지금은 1개만 남아 있다고 한다. 무덤을 쌓아올린 돌을 보니 그 당시 이 정도 능을 쌓으려면 많은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이 장군총은 장수왕이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전 왕릉을 미리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장수왕이 세상을 뜬후 시신을 묻었을 것이라고 한다.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고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대를 이어 고구려의 대정벌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20대 장수왕릉 이라는 견해가 압도적이라고 한다.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를 거쳐서 28명의 왕이 있었는데 그중 18개의 왕릉이 이곳 집안 옛 무덤군에 남아 있다. 이곳 집안(集安)은 2대 유리왕 부터 20대 장수왕까지 420여 년간 고구려의 도읍지 국내성으로 화려한 고구려 문화가 응집 돼 있는 곳이다. 사실 고구려의 역사는 북한쪽으로 많이 있기에 우리에겐 접할 기회가 드물었다. 그런데 주차장에는 고구려의 역사를 설명하는 커다란 홍보글이 한자도 아닌 한글로 씌여저 있었는데 홍보글 첫머리에서 부터 '고구려는 중국 북방 소수민족 정권입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왜 이곳만 고구려를 부각시키는지 알수 있을 것 같았다.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고구려는 북방의 소수민족이라는 것을 상당히 부각시켰다. 집안시 '고구려 민족문화 연구센터.에서 2012년 고구려 28왕의 박람관을 개최 하면서 만든 것 인데 행사가 끝난지 2년이 지났지만 철거 하지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우리역사를 훼방하는 중국과 어떻게 고구려 역사를 발굴해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할지 심히 고민해야 할 일로 역사를 두번 죽이는 것으로 그저 걱정일 뿐이다. 장군총을 내려 오는데 무덤 주위로 찔래꽃과 과일수들이 봄을 맞이하여 곱게 피고 영글어가고 있었다. 이어서 우리는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찾아갔다.
국내성은 평시에 사용하는 집안시 읍성이고 환도산성은 전시나 비상시에 사용하던 방어적인 성이었다. 국내성은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개국한 첫 도읍지 졸본성에서 유리왕 22년 AD 03년에 환도산성과 같이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천도 할때 까지 약 420여년 고구려의 도성이었다. 중국 정부에서도 국내성을 성급문물보호(省級文物保護) 단위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읍성이라 그런지 성벽 안으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많이 훼손 된 흔적을 간간이 볼 수가 있었고 성의 원형은 그래도 많이 손상되었지만 고구려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국내성은 평양천도 뒤에도 고구려 3경(三京)의 하나로 정치적·군사적 중심지였으나 연개소문이 죽은 뒤 보장왕 25년 666년에 권력싸움 과정에서 국내성을 근거지로 삼았던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 당나라로 투항해 버림으로써 이곳은 고구려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고 막리지로서 왕권을 누렸고 세아들 남생 남건 남산도 많은 권력을 가졌다. 연개소문 사후 맏아들 남생이 막리지 자리를 이어 받아서 서로 협력하며 국사를 도왔지만 삼촌 연정토와 권력 이간질로 싸우다가 결국 연개소문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고 남건은 끝까지 당나라에 항전했으나 남산과 남건은 28대 보장왕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을 한다. 이후 남생과 남산은 당나라에서 잘 살다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남건은 당나라에 포로 잡혀서 귀향을 갔으나 이후에 삶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집안시에는 고구려 400도읍지로서 많은 왕릉과 유적이 있지만 우리 것으로 하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곳이다.
이번에는 환도산성을 찾아 갔다, 집안시에서 2.5km 떨어진 환도산(丸都山)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환도산성은 압록강 지루인 통구강을 따라서 반원형 산봉우리와 주위 능선을 이용해서 만든 총 둘레 7km의 산성으로 이곳도 많이 훼손이되었지만 삼면이 가파른 경사와 절벽으로 쌓인 환도산 해발 676m 의 천연 요새지역이라고 한다. 성 바깥쪽 강가 산 아래에는 400년 도읍지 답게 많은 고분들이 흩어저 있었고 입장료 100元을 받는 관리사무소가 멀리 보이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돌아왔다. 이곳도 찾는 이는 우리 한국 사람들뿐이라고 하는데 남의 나라 땅에 우리 선조들의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 하였다. 왜 우리 선조들은 애써 얻은 영토를 지키지 못하고 후손들이 남의 나라에 와서 학습을 하고 가야하는지 심히 원망스럽다. 이제 와서 우리의 역사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을까마는 고대 역사를 재 조명하여 새로운 미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게 지금의 세대가 해야 할 막중한 과제이다. 자칫 잘못 하다가는 우리의 역사가 영영 남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우리 것이라고 고작 관광이나 하고 있으니 지금 현재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국사를 멀리하는 요즈음 교육세태를 보면 역사를 제대로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깨달아야 한다. 환도산성은 일부 훼손됐지만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으로 현재 약 5m 높이의 북쪽 화강암 성벽과 말에게 물을 먹이던 음마지, 전투를 지휘하던 점장대를 비롯하여 병영터와 궁전터 흔적들이 일부 남아 있었다. 넓은 분지위로 고분군과 성의 잔재 돌무지가 여럿
보였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동명왕 주몽(朱蒙)이 동가강 유역 졸본 지방에서 일어나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지방을 무대로 영토를 넓혔지만 668년 나당 연합군에게 28대 보장왕을 끝으로 700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집안에서 역사 흔적은 학습하고 내일 백두산 출발 때문에 통화를 가기 위해 고속도로에 들어 섰다. 집안에서 통화까지 두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내가 텐진에 있었던 1995년 20년전이나 지금이나 고속도로는 여전히 자동차들이 간간히 지나 갈뿐 적막이 가득하다. 중국은 땅이 넓어서 인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다른 지역으로 잘 이동하지 않으며 특히 자가용으로 여가를 위해서 도시와 도시를 왕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문화혜택을 누리는 부자 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인구에 비하여 더 많다는 것이고 특히 고속도로 통행료가 비싸서 중국인들은 이용을 안 한다고 한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일반 중하류 계급의 사람들은 태어난 곳을 떠나지못하고 살며 상류층만 이용한다는 말이다. 더 깊이 말하자면 일반 중하류 계급의 사람들은 그냥 먹고만 살고 여가와 문화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산다는 말이다. 만약 중국의 고속도로 자동차가 우리나라 처럼 가득해 젔다면 눈부신 경제발전은 몰론이고 공산국가를 버리고 자유시장국가로 세계 팻권을 찾이 했을 때이다. 휴계소의 매점과 화장실은 국가에서 관리하기에 예전과는 달리 현대식으로 깨끗하게 잘 정돈이 되어 있었다. 저녁 어둑해서 통화에 도착하여 식사를 마치고 통화 동산호텔에서 중국에서 두번째의 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여행 세째날 2014년 5월27일 화요일 드디어 꿈에 그리던 백두산 가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날씨는 구름 한점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특별한 날씨 이변이 없는한 천지를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가볍게 몸을 풀기 위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친구랑 강가에 있는 옥황산에 올랐다다. 숙소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옥황산을 30여분 오르면 통화 시내를 조망 할 수 있는 곳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거리에서 가볍게 아침 운동을 하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 오는 길 일양약품 원비디 광고 간판을 보는 순간 반가움에 사진 한장을 기념으로 남겼다. 통화에서 서파입구 산문까지 버스로 4시간 이상 소요 돤다고 해서6시 30분에 통화를 출발 했다. 가는 길목은 구름이 거의 없는 아름다운 파란 하늘로 버스를 탄 친구들 모두가 길조라고 좋은 기분이었다. 통화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2차선 길을 달리는데 포장은 되어 있으나 도로의 형편은 그리 좋지 않아 가끔 언덩방이를 찧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하는데 가는 길목에 백산시를 만났다. 이곳은 석탄이 많이 나는 곳인지 도로변에 검은색의 석탄 더미들이 여러 군데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중국에서 세번째로 큰 화력 발전소가 백산시에 있다고 하며 중국주석 장택민이 백두산을 세번이나 다녀 갔지만 천지를 못 보고 돌아 오는 길 이곳 백산시에서 하루 묵게 되는데 시당국자에게 백산시라 부르면 어떻겠냐고 말해서 그뒤 부터 백산시로 불렀다고 가이드가 설명을 해 준다.
통화를 출발후 2시간쯤 지나서 고구려 휴계소라는 곳을 들렸는데 이름이 말해 주듯이 백두산을 찾는 한국 사람들을 위한 휴계소인 것 같았다. 여행에 필요한 잡화를 파는 곳으로 고사리, 더덕,장뇌삼, 목이버섯과 과일 말린 것등 중국 교포들이 판매를 하고 있었는데 물건은 연길에서 갖고 온다고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과자랑 과일 말린 것등 군것질 꺼리로 한 보따리 를 샀다. 서울에서 출발 할 때 소주를 여러병 갖고 왔기에 간간히 목을 축이며 장거리 여행에 심심하지않게 농담을 주고 받으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버스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다시 털털거리며 마구 달리고 있었는데 시골 장날인 것 같은 낯선 거리 풍경에 다시 오지 못할 거리 모습이기에 틈틈이 사진에 담아 보았다. 푸른 초원의 고산지대를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데 날씨가 아직도 퀘청이었다. 보이는 작물은 옥수수가 대분이었다. 우리위 어느 시골 농촌 마을처럼 가끔 벼를 내는 논도 보였으며 서울에는 아카시아 꽃이 모두 젔지만 이곳은 아카시아 꽃이 지금 한참이었다. 버스는 털털거리며 어느 길을 지나가는데 장백산 비행장이 개장되어서 고속도로 공사를 한창 하고 있는지 일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심양. 장춘. 대련으로 가는 비행기가 머지않아 장백산 공항에서 백두산 여행이 시작될 것 이라고 한다. 3년후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장백산 아니 백두산 관광이 서울서 1박 2일도 가능하다고 한다.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 80% 가 한국 사람들로도 이제 머지않아서 편하게 백두산을 갈 수는 날이 곧 올것 같다.
오전 11시 조금 넘어서 식당에 도착하여 이른 점심을 먹었다. 신기하게도 수십키로 떨어진 이곳에서 멀리 정상에 하얀 꼬갈을 쓴 백두산이 보이는데 곧 만나겠지 하며 애인을 만나려는 설레임처럼 가슴이 마구 뛰고 있었다. 점심 식사후 30여분을 더 가야한다고 하니 정말 먼거리 여행으로 아주 지겹게 버스를 타고 다닌 것이다. 얼마후 백두산 초입 서파입구 산문에 드디어 도착을 하니 날씨는 초가을 날씨처럼 하늘도 맑고 바람도 시원하였다. 여름 한철에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장사진을 이룰 장백산 산문 초입에는 버스 한두대와 승용차 몇대가 전부로 지금은 주차장이 아주 한산했다. 성수기 여름 한철은 버스를 타고 내리고 기다리는데 한시간 이상 소요 된다고 한다. 우리들 모두가 평소에 덕을 많이 쌓았는지 날씨가 기대으로 좋아서 모두 상기된 얼굴이었다. 백두산에 오를 각오가 되었는지 신발 끈도 다시 매고 기념 사진도 열심히 찍어야 했다. 입장료 125원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2만원이 넘는 것으로서 해마다 입장료가 오르는데 백두산은 한국 사람들이 거의 전부니까 중국에 우리가 보태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해발 1000m 에 위치한 쉼터 휴계소 안에는 화장실과 기념품가게 그리고 백두산으로 가는 네 가지 길을 보여주는 지형 모형도가 있는데 해발 1800m 까지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다가 1800~ 2500 m 천지 입구까지는 급상승해서 천지를 만들었고 조형물이 마치 엎어놓은 종의 모습 과도 같았다.
산문에서 천지 오르막 입구 까지는 37km 이다. 천지 입구까지 올라가는 공원버스를 갈아 타기 위해서 정류장으로 갔다. 이곳에 있는 공원 전용 버스가 백여대가 된다고 하니 백두산을 찾는 한국 사람들의 숫자를 가히 짐작 할 수가 있었다. 양쪽으로 자작나무 길로 이어지는 백두산으로 향하는 초원지대를 마치 무소의 뿔처럼 생긴 백밀러가 달린 녹색 공원 버스로 갈아 탔다. 곧은 길과 굽은 길이 나오더니 활엽수로 가득하던 숲에 전나무로 보이는 침엽수가 보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추위를 잘 견디고 바람에 쓸어져도 자라나는 구부리나무라고 한다. 정상이 가까워 지면서 초원에는 푸른 빛이 많이 보이지를 않았지만 7월 여름이면 야생화가 흐트러지게 피어 있어서 백두산의 아름다운 면모를 색다르게 보여 준다고 한다. 어느덧 해발 1600m 에 오르니 저 멀리 백두산 천지에 샇인 눈이 가까이 보이는데 그냥 감격 또 감격이었다. 백두산으로 오르는 능선이 보통의 산처럼 암석이나 굴곡이 심한 계곡으로 기억했는데 화산으로 인하여 광활한 분지지대였기에 케이블카도 아닌 자동차가 천지까지 오르는 것 같았다. 산 아래로 내려다 보는 지평선은 하늘과 맞 닿아서 아마도 수십키로 끝이 보이지 않은 고원의 초원으로 되어 있었다. 강원도 대관령 분지에서 내려다 보는 태백산맥배의 모습 보다 몇백배 더 아름다웠다.
드디어 30여분 만에 천지 입구 정류장에 도착을 했다. 차에서 내리니 바람이 좀 세게 불고 있었지만 견딜만 했다. 생각 보다는 그리 춥지를 않았다. 눈앞으로 보이는 백두산의 자락은 온통 눈으로 가득했고 천만다행으로 날씨가 우리를 도와 주었기에 천지에게 온통 감사를 해야 한다. 2000m 의 천지 초입 주자장에서 1400여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평소에 정상적인 등산인이라면 30여분 정도면 오를 수가 있고 하는데 처음 가파른 오르막 길은 좀 힘 들었지만 10여분 정도 지나니까 몸이 풀려서 정상까지 무난히 오를 수가 있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우리 일행과 그외 사람들 포함하여 스무명 정도 밖에 되지를 않았다. 이 계단길은 성수기 여름 한철 백두산은 아마 많은 사람들로 몸살을 앓을 것이다.
드디어 백두산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고 멀리 천문봉을 바라다 볼 수 있는 해발 2500m 천지 정상에 도착 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최고 높은 산 꼭대기에 오늘 오르게 된 것이다. 아직 녹지 않은 꽁꽁 얼은 천지라서 푸른 물은 볼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감격 또 감격이었다. 무릎 위 까지 눈이 빠지도록 눈이 쌓여 있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는 없었지만 때이른 계절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없어서 인지 밟지 않은 눈이 주위에는 가득 하였다. 하루에도 몇번씩 일기 변하로 인하여 천지창조의 한장면을 보듯이 웅장한 모습의 백두산 한반도의 역사가 시작 되고 민족의 기백이 서린 곳 바로 백두산에 지금 내가 서 있는 것이다. 저 건너 북한쪽에 있는 2750m 제일 높은 장군봉을 비롯해서 백운봉 천문봉 비류봉 차일봉등 어느 것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앞으로 펼처지는 스펙타클한 모습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북한 경비병이 있는 조선 국경 표지석에 가서도 사진 찍고 중국 쪽에서도 한장 또 찍고 천지를 배경으로도 한장 다시 또 한장 찍고 모두들 사진 찍는라 여념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통일을 기도한다. 이곳에서는 큰절을 하는 행위, 어떤 깃발을 세우는 행위, 제사를 지내는 행위, 국기를 보이는 행위, 대한민국 만세라고 소리지르는 행위, 노래를 하는 행위, 어떤 의식을 금한다는 것을 가이드가 차를 타고 오면서 누누히 설명 하였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기도를 속으로 해본다. 세세손손 3대가 덕을 쌓야 볼수 있다는 천지! 백번을 가도 두번 밖에 볼수 없다 해서 백두산! 천지를 보러 간 사람들이 천지였는데 천지를 못 보고 내려온 사람들이 천지라고 하는 우수개 소리가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천지 정상에는 날씨가 더워서 잠바를 입지 않고 배낭에 넣고 남방 차림으로 백두산을 올라 왔는데 체감 온도는 예상외로 영상인 것 같았다. 발해가 멸망한 원인이 내부분열이 아니고 백두산의 화산 폭발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화산재에 농토가 묻히고 10여년 이상 냉해가 계속되어 농사를 지을수 없을때 거란의 침입에 아무 방비도 하지 못해서 망했다는 역사가 있다.
조선 대신 국경표지석이 대한민국으로 바뀌고 우리 땅을 통해서 배두산에 오를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해 보며 천지에서 30여분 머물다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산 하였다. 내려 오면서 눈이 녹아 있는 계곳에서 야생초를 만저 보기도 하고 계곡 물을 손으로 만저 보기도 하였다. 올라갈 때는 힘들고 정신 없어서 그저 계단만 보고 올라 갔는데 내려 오는 길은 여휴가 있어서 만나는 한국 사람들 에게 인사를 권하니 모두 기분 좋아서 고무된 얼굴로 인사하기에 바빴다.
천지 주차장에는 날씨가 너무 따뜻하고 포근해서 쌓인 눈이 계곡물처럼 녹아 흘러 내렸다. 주차장에서 백두산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버스를 타고 돌아 내려 오는데 못내 아쉬움이 가득하여 그 섭섭함은 애인과 헤어지는 것 보다도 열배 스무배가 더 아팠다. 내생에 언제 다시 또 다시 갈 수가 있을지 모르는 백두산 아쉬움이 가득해서 차창뒤로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또 보고 결국 눈시울이 맺히고 말았다. 마치 애인을 그곳에 놓고 그냥 혼자 오는 것 같았으며 무언가 아쉬움이 가득해서 차마 떠나기가 싫었지만 자동차는 산길을 열심히 달려서 내려 오고 있었다. 잘 있거라~ 백두산아 하며 인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내려 오면서 돌아 보고 또 돌아 보고 몇번을 돌아 보며 미련없이 사진에 풍경을 담아 보았다. 자동차로 30여분을 내려 오는데 멀리 멀리 보이는 백두산의 모습이 언제 다시 볼까하는 마음에 애련하였으며 한국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와서 중국에 돈을 다 갖다 주는데 북한은 뭐하고 있는지 화가 나도록 답답했다 하루빨리 남북통일로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유산으로 물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은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 동부 최고의 산맥으로 백두산이라는 이름은 화산 활동으로 부식토가 산 정상에 하얗게 쌓여 붙여진 이름으로 말 그대로 흰 머리의 산 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청나라때 부터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고 있고 화산 활동을 하는 산이었으나 250년전 이미 활동을 멈춘 사화산 이다. 백두산은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천연 식물원으로서 동북 호랑이를 비롯한 희귀한 야생 동물과 식물이 자라고 있어 국가급 보호구에 속한다. 전체 면적 중 1/3은 중국의 영토로, 2/3는 북한의 영토에 속하며 연평균 기온은 -8도로 연중 눈, 비가 내리는 날이 200여일에 달한다. 천지의 둘레는 14km이며 천지 주변에 16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7월 까지도 백두산에 눈이 남아 있고 9월에 첫 눈이 내린다. 애국가 한 소절만 떠올려도 우리에게 백두산은 어떤 의미를 지낸 산인지는 두말 할 필요가 없는 중요한 민족의 자존심과 자랑으로 내세우는 곳 백두산이다.
천지를 보고 내려온 우리는 해발 1464m 에 있는 금강대협곡에서 내렸다. 금강대협곡은 천지가 용암을 분출할 때 만들어진 V자 형태의 협곡으로 폭이 100 - 200m, 깊이가 70m, 총길이가 15km이다. 원시림 사이에 나무로 설치한 데크를 따라 가면 양쪽 숲에는 바람에 넘어졌는지 아름들이 나무들이 뿌리를 들어내고 누워있고 썩어 가는 나무에 이끼와 작은 나무들이 뿌리며 내리며 자라고 있었다. 맑은 공기와 숲 속에서 울려퍼지는 새소리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힌 채 깊고 깊은 협곡에는 기묘한 형태의 뽀족한 바위들이 서있고 천길 낭떠러지 사이로 에메랄드 빛 물이 흐르고 있었다. 검은 색의 절벽에 가끔씩은 묽은색의 암석도 보이고 바위 틈새로 자라난 야생초가 있어 더한층 신비스러웠다. 그리고 협곡 자체가 국경선이라서 건너가 바로 북한이라고 한다.
한시간여 금강 대협곡을 탐방하고 백두산 서파 산문을 출발해서 점심을 먹었던 식당에 도착했다. 갈길이 먼데 시간은 어느덧 4시가 넘었다. 여행에서 늘 있는 쇼핑센터 방문으로 이곳에서 중국 동포 조선족들이 판매하는 농산물을 샀다. 깨. 옥수수.고사리 그리고 잡곡들이 있었는데 몇가지 농산물을 이곳에서 샀다. 버스를 타고 통화까지 4시간의 먼나먼 길을 출발했다. 아침에 들렸던 고구려 휴계소에 도착 했을 때는 어느덧 해가 넘어가 어둠이었다. 볼 일을 보고 다시 또 버스를 타고 통화에 도착하여 저넉 식사를 하고 동화 동산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0시가 되었다. 백두산 천지도 보았고 저녁도 맛나게 먹었으니 피곤해서 오늘은 일찍 잠이 들었다
다음날 5월 28일 수요일 여행 네째날이다. 내일이 귀국하는 날이라 통화에 있는 대나무로 만드는 죽섬유 쇼핑센터를 아침 일찍 부터 방문했다 다 알다시피 관광객들이 쇼핑을 많이 해주어야 가이드가 좋아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별로 살 것이 없어서 몇가지 못 샀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나무로 만든 공예품과 대나무 섬유 옷등 좀 많이 샀다. 단동으로 가는 길에 조망 관광으로 되어 있는 오녀산성과 비류수를 보기 위해서 통화를 출발해서 2시간 30분 쯤 달려서 환인에 도착 했다. 오녀산성이 있는 환인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성(卒本城)있는 곳으로 중국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을 할 큼의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오녀산성은 해발 820m 오녀산에 200m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해서 성을 쌓은 천연의 요새이다. 고구려 특유에 축성 양식을 보여주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험준한 산 위에 자리했다. 산성의 길이가 1540m 너비 350~550m인 장방형으로 전체 약 8km 이며 성 안에는 천지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는데 2천년 동안 한번도 마른 일이 없다고 한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주몽이 개척한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인 졸본성은 기원전 37년 부터 기원 3년에 주몽의 아들인 유리왕이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길 때 까지 40여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다. 졸본성을 중국에서는 오녀산성으로 부르고 있는데 산성으로 가는 도로 이름도 오녀산로 되어 있을 만큼 동북공정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였다. 동북지역에 있는 100여개의 고구려 산성 가운데 오녀산성이 보존 상태가 가장 좋고 규모가 커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특히 주차장에서 999개의 급경사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산성이 인공적으로 자리한 동쪽을 제외한 삼면은 천혜의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구글지도를 검색을 해보니 정말 천에요새의 지형으로 되어 있었다. 이곳도 대부분 관광객은 한국 사람들로 우리는 시간이 없는 관계로 직접 오녀산성을 오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눈팅만 하고 돌아왔다. 비류수(沸流水)는
요령성과 길림성 접경지대를 흐르는 강으로 현재 이름은 부이강이며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 유역에 위치한다.
고구려 개국 당시에 비류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발상지 중국 환인의 졸본성 그리고 산성 주위를 감싸고 흐르는 비류수 혼강은 얼마전 mbc 주몽이라는 드라마에서 나왔듯이 삼국사기에 있는 고구려와 비류국과의 건국 신화로 역사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자. 주몽은 아버지 해모수가 햇빛이 되어 나타나 어머니 유화에게 잉태시켜 알을 낳게 했는데 여기서 태어난 사람이 주몽으로 전해진다. 부여 왕실에서 생활하는 주몽은 부여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 다. 일곱이 왕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기 힘들다는 걸 깨닫고 남쪽으로 내려가
새 국가를 세울 생각에만 골몰하였다. 재주가 뛰어난 주몽을 시기한 왕과 왕자들은 주몽에게 말 기르는 잡일을
시켰다. 주몽이 남쪽에 뜻을 두고 있는 한 부여에서 생활은 의미가 없었다.
좋은 말을 골라 일부러 먹이를 주지 않고 야위게 만들었다. 부여의 왕과 왕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몽의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또 다른 국가를 건설하려는 생각은 반역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주몽은 스무살때 친구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부여를 탈출 한다. 부여의 입장에서 주몽의 탈출은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달려 갔다.
부여의 첫 번째 왕자 대소가 이끄는 군사들은 주몽 일행을 추격한다. 그러나 주몽은 배도 없이 비류수를 건넜다는 일화가 있는데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비현실적 상황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 당시 비류수를 사이에 두고 부여와 졸본이 대립하고 있었다. 주몽 일행이 비류수를 건너면서 부여 군사들의 추격을 벗어 날 수 있었는데 그를 도와준 졸본 사람들 중에서 바로 소서노가 있었다. 그는 탈출에 성공한 뒤 소서노와 정략적 결혼을 하게된다. 주몽은 졸본지방에서 지역적 기반이 필요했었고 소서노 집안에서는 주몽의 강력한 지도력과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주몽은 졸본천 비류수가에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졸본의 오녀산성에 BC 37년 도읍을 정하는데 그때 나이가 22살이라고 한다. 드라마에서 주몽은 송일국이 소서노는 한혜진이 대역을 했다.
주몽은 부여에 어머니와 아내를 두고 왔는데 새나라를 건국한지 18년만에 고향에서 아들이 찾아왔다. 활쏘기등 무예를 시험해보니 아버지 못지않은 명수이기에 왕위 자리를 물려 주는데 바로 그가 2대 유리왕이다. 그러나
주몽과 소서노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큰아들이 비류, 둘째 아들이 온조였다. 왕위를 전처 유리에게 물려주자 소서노는 아들과 함께 백성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남하를 하여 비류는 지금의 인천에 정착하고,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는데 비류는 땅이 습하고 물이 짜 정착에 실패하여 죽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온조의 위례성에서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고 하였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세째아들이다. 역사는 알면 알수록 신비하고 의문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리는 다시 점심 식사후 압록강 하류 단동 윗쪽 태평만땜 아래에서 북한 땅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유람선을 타게 되었다. 태평만땜은 중국에서 건설하고 북한 중국 똑같이 전력을 나누어 쓴다고 한다. 유람선 선착장 시설은 다소 초라하지만 압록강 유람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압록강은 백두산과는 다르게 중국이나 북한 똑같이 같은 이름 압록강을 쓰고 있으니 천만다행이다. 강건너는 평안북도 수풍군이다. 압록강의 길이는 925.5㎞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강이다. 압록강 물을 가운데 하는 국경 하천으로서의 길이는 806.5㎞이며 유역 면적은 6만 3,160㎢인데 이 가운데 북한에 속하는 면적은 3만 1,226㎢, 중국에 속하는 면적은 3만 1,934㎢로 중국 북한 동시 관할이고 상대의 땅만 밟지 않으면 국경 침범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압록강에는 모두 103개의 섬이 있는데 3개만 중국 관할이고 나머지 100개는 북한에서 관할한다고 한다.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갖다 주겠다 했던 6.25 전쟁 그시절을 기억합니까?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결국 남으로 하염없이 밀리기 시작했죠. 그 강변에서 그날 그 피열하게 동족끼리 싸워야 했던 전쟁의 아품을 잠시 기억해 봅니다.
중국과 북한이 맞닿은 압록강 어느 곳이든지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은 중조계하(中朝界河) 압록강(鴨綠江) 이라는 표지석이 하나씩 서 있다. 바로 중국과 북한의 경계선이 압록강 이라는 것이다. 이 표지석은 중국 정부나 시당국 에서 세운 표지석이 아니고 한국 사람들에게 사진 박으라고 임의로 세운 것 같았다. 우리도 그 표지석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유람선에 올랐다. 오성기를 게양한 유람선이 선착장을 출발해서 압록강 물줄기를 따라 북한지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떠나온 선착장에서 점점 멀어지는 중국땅 그리고 우리 시야에 들어온 처음보는 북한의 모습은 신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참하기도 했다. 평안북도 의주군 방산 마을 단층 기와집은 70년대 건물 그대로 있다고 하는데 고기를 잡으러 나온 듯 한 북한 어선도 보이고 강뚝에 앉아서 유람선을 바라 보는 사람도 있었다. 유람선을 탄 중국사람이 북한쪽 사람들에게 어이 하며 손짓을 하고 있는데 참으로 자존심으로 창피한 일이었다. 지금 북한은 핵무기만 갖고 콧대를 세우며 우기고 자랑 할게 아니다. 국경을 지키는 초소와 북한 군인도 보이고, 강뚝에 농사용 비닐을 널고 있는 사람들, 강아래 내려와서 빨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육지와 섬사이를 군대처럼 부교를 놓아서 사람들이 이동하는 시간인지 지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중국의 오성기를 달고 물보라 치며 달리는 여객선을 북한 사람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 볼까? 지도를 정확히 보면 엄연히 따져서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졸지에 우리는 북한땅으로 입북해 버린 것으로 오성기만 달지 않았으면 북한 병사가 총을 겨눠도 어쩔수 없는 일이다. 가이드에 말은 압록강은 중국 북한 동시 관할이라고 하며 상대의 땅만 밟지 않으면 국경 침범이 아니라고 하는데 강자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해석한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참으로 세상 웃기는 일이다. 최근 2011년 부터 새로 허용된 압록강 입북 관광코스라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엄연한 북한은 국토유린 행위이다. 그나저나 우리 영토에서 중국이 관광행위로 돈 벌고 있으니 물론 중국과 모종의 협약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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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고려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으로 바로 유명한 곳으로 지금 또 기로에 서 있는 모양이다. 즉 위화도와 황금평 땅을 중국에 100년간 임대해 주는 형식으로 개발하려 했으나 2010년 대홍수로 침수와 기타 문제로 중국이 소극적 자세로 돌아서서 지금은 개발이 불투명한 상태인것 같다. 여하튼 중국 유람선이 북한지역 내부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개발계획과 연관된 것 같았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북한의 건물 그리고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 보는 북한 사람들도 먹고사는 일을 생각하며 참으로 서글플 것이다.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길 이런저런 모습을 보면서 산다는 것에 대하여 여러 생각을 하며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람 사는 게 어찌 이렇게 다를까? 동물원의 원숭이도 아니고 그 사람들은 매번 중국 유람선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인권유린 당하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우리 땅을 중국에게 돈 주고 구경해야 하는 안타까움에 통일은 언제쯤 올까 생각하는데 어느덧 배는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유람선은 약 한시간 가량 타는 것 같았다.
유람선 관광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호산산성과 일보과(一步跨)를 찾아갔다. 일보과는 조금전에 유람선을 타고 바라보았던 위화도 하류에 있는 장소로 중조국경이 말 그대로 한 걸음에 갈 수 있다는 곳으로 중국 사람들은 솔직히 관심이 없을테고 순전히 한국 관광객을 위해서 만든 듯한 장소 같았다. 가서 그곳을 보니 사실 북한과 가장 가까운 접경지역으로 압록강의 지류 폭 5m의 개천 하나만 건너면 바로 북한 땅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중국와 북한사람들이 물물교환을 했었지만 지금은 상호 신뢰가 떨어져 하지 않는다고 한다. 국경선답게 양쪽 모두 철조망이 드리워저 있었으며 여러가지 주의 사항이 그려진 간판이 일보과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10초 이내 바로 건널 수 있는 도랑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그러나 건널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럽다. 호산산성은 단동에서 압록강 상류 쪽 30km 지점에 있는 고구려 천리장성의 시발점 박장산성이다 고구려 때 수나라와 당나라가 쳐들어왔을 때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했던 고구려의 군사 요충지였다.
그런데 박장산성을 중국에서는 마치 누워있는 호랑이 모습과 같다고 하여 호산장성이라 이름을 붙이고 동북공정에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주장하며 만리장성과 똑같이 복원해서 관광객으로 받아 드리고 있으니 외관상 만리장성의 모습과 같으니까 여기서 사진 찍고 만리장성 갔다왔다고 하여도 믿을 수 있는 곳이다.
산성에 입구에는 만리장성동단기점(萬里長城東端起點)이라고 각인하고 용을 끓어앉은 기백있는 커다란 장군의 동상이 있었다. 만리장성과는 거리상으로 보아도 이치에 맞지 않은 곳으로 참으로 역사 왜곡이 심하게 되어가고 있는 바로 현장이다.
성에 올라보면 고구려 축성법으로 쌓은 성 위에 만리장성 식 상단을 증축해 얼핏 보면 만리장성처럼 보이도록 위장한 흔적이 있다. 산성 정상은 30분정도면 오를수있고 북한땅 위화도와 멀리 단둥 시내까지 조망 할 수 있으며 압록강 건너 북한쪽 내륙까지 내려다 보였다.
어느새 여행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들었다. 저녁은 평양고려식당에서 하기로 했다.
단동에 있는 평양고려관은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는 북한식당으로 출입구에는 평양 고려관에 오신 손님들 열열히 환영합니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음식은 이제껏 먹었던 중국식 음식과는 전혀 다르게 두말 할 것도 없이 우리 입맛에 간도 맛도 아주 좋았다. 정복을 입고 안내하는 여성 동무와 한복을 입은 가무를 담당하는 여성 동무가 있었으며 고향의봄, 휘파람등 반주기에 맞추어서
식사가 끝난 뒤에 노래를 불러 주었다. 맛나게 식사하라고 흥을 돋우는 무희들과 같은 동포이며 각인하며 분위기 좋게 하려 했지만 안내하는 동무들이 사진도 찍지 말라하니까 좀 서먹한 분위기였다. 신기 한 것도 재밋는 것도 보지 못한 고려식당에서는 특별한 별 의미가 없는것 같았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은 꼭 이곳을 들리는데 비싼 저녁식사로 북한의 외화벌이를 도와 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5월 30일 목요일 여행 마지막 날이다.
단둥에서 버스로 4시간을 달려서 대련공항으로 가야하기에 새벽 5시에 출발하였다. 공항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련 비사성을 조망하기로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천리장성은 고구려때 건축된 만주지방의 천리장성과 고려때 건축된 압록강에서 함흥까지 만든 천리장성 2개가 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대련 비사성을 시발점으로 안시성,백암성,멀리 농안 부여성까지 이르는 것으로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다. 고구려 영류왕때 연개소문이 16년간 쌓아서 만든 것으로 여기서 고구려는 살수대첩과 안시성 싸움에서 승리하지만 영류왕이 당나라에 잠시 유화정책을 취하자 연개소문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처들어가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우게 되는데 결국 이때 부터 고구려는 혼미시대로 접어든다. 또 하나의 천리장성은 고려가 거란, 여진족 침입을 막기 위해서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 함흥 도련포에 이르기까지 1033부터 10년간에 쌓았던 것이다.
비사성은 대련의 663m 대흑산에 있었던 고구려 성으로 중국에서는 대흑산산성이라 부른다. 여기도 관광지 목적으로 고구려의 축성법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성벽을 쌓았다고 하는데 산 쪽 아래 아파트 건물 뒤로 저 멀리 비사성이 보였지만 조망하는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 비사성은 수나라 당나라 고구려 세 나라가 수년에 걸쳐 피비린내는 전투를 벌였던 성으로 대륙으로 가는 요새였다. 대흑산은 산행코스가 절묘한지 우리나라 산악회원들이 교통이 편해서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5일간의 여행일정의 아쉬움을 접고 드디어 서울로 돌아왔다. 한국과 중국의 수교로 한국으로 일하러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이후 동북 변방의 낙후한 농업지대에 불과했던 연변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고 전한다. 수교 후 한국을 다녀간 조선족은 복수 방문자를 합쳐 300여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실제 연변주정부 통계에 따르면 10년 동안 한국에서 일하는 연변 조선족이 벌어들이는 외화는 연간 10억 달러를 넘어 연변주 GDP의 33%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연변을 중국내 소수민족 자치지역 가운데 손꼽힐 만큼 부유한 지역으로 탈바꿈을 시켰다.
너도나도 한국에 돈 벌러 간 사람들이 지금은 한집 건너 한집 꼴이라고 한다. 그러나 연변 조선족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안겨준 대신 적잖은 사회 문제로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게 가족 해체로 전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연변자치주 지위가 다른 민족보다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도시로 이농하면서 조선족들이 버린 농토는 대부분 한족(漢族)이 차지하고 농촌지역에서 조선족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으로 머지않아 조선족 비율이 30%이하로 떨어지면 자치주 지위가 언제 박탈당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제 살길 찾아 거주지를 옮기는 것을 누가 뭐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핏줄들이 그 터를 지키지 못하면 그 땅을 우리의 땅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지 상당히 심각한 모양이었다. 고구려 역사의 혼이 깃든 동북지방은 중국의 다른 어떤 지역과는 다르게 산천초목과 풍경들이 낯설지 않고 정겨웠다. 옥수수와 벼가 자라는 밭과 논을 보면서 고향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고 서울에는 아카시아 꽃이 모두 졌는데 현재 이곳은 아카시아 꽃이 한창 이었다.
백두산 협곡에 이제 막 핀 진달래는 서울에 핀 진달래보다 상당히 작았지만 정겨운 누이를 보듯이 아주 반가웠다 일본은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겨서 우리 마음을 흔들게 하고 중국은 고구려를 자신들이 지배했던 소수민족의 역사라면서 동북공정으로 우겨댄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역사를 중국에서 돈을 주고 관람해야하는 실정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동북3성과 백두산은 본래 우리의 땅이었지만 중국이 그리 쉽게 내주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서 빨리 통일해서 남북이 사이좋게 정겹게 살아 갈 때 중국과 일본은 우리를 얕보지 않을 것이란 생각한다. 북한 땅이 눈앞에 있지만 제대로 밟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고 하루에 열 시간 씩 장거리 버스를 많이 타야하는 피곤한 여행이었지만 4박5일간 설레는 마음으로 고구려 역사를 다시 보고 배우는 참 보람찬 여행이었다. 또 기회가 주어진다면 세세한 역사 기행을 다시 떠나고 싶다. - 끝-
백두산서파 풍경 - 동영상 보려면 플레이를 누르세요 k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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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가 부른 북한가요 임진강 - 동영상 보려면 플레이를 누르세요 k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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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맑은물은 원한 싣고 흐르느냐 2. 강건너 갈밭에서 가을새만 슬피울고 내마음 들판에서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바다 물결위에 춤추니 임진강 흐름을 원한 싣고 흐르느냐? '
압록강 유람선 풍경 - 동영상 보려면 플레이를 누르세요 k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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