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 바위고개와 누에의 전설 글솔새김남식
가곡 바위고개는 우리 정서에 맞는 가곡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노래는 1934년도 이흥렬 작곡으로 가사도 가락도 애처로움을 느낀다.
특히 흔히 일제 강점기때 조선민족의 비운을 그린 것으로도 해석이 되며
가사에서 임은 조국을 뜻한다고 한다.
1909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한 이흥렬은 그가 25세때 만든 작품으로
십여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라는 가사에서 일제의 탄압 속에서
신음하던 조국 산천을 바위고개로 무궁화 꽃을 진달래로 비유한 것으로
민족의 울분을 아련한 모정에 담아 서정적으로 표현했다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
특히 가사에서 풍기는 그리움이 눈물 겹도록 애절해서 6.25 전란속에서
피난민들의 가슴을 울리고 시름을 달래주는 깊은 힘을 가진 노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바위고개는 이흥렬작사 작곡으로 모두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源作詞는 월북작가 이서향이다
특히 이서향이 월북한 이후 부터 모든 기록에는
이흥렬작사 작곡으로 뒤바뀐 이유는 월북인사 작품은 홀대를 받던 시절
자신의 작품이 혹시 폐기처분 하지 않을까 하는 그랬다는 훗날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누애의 얽힌 전설 이야기기가
바로 바위고개 가사의 내용과 거의 一脈相通하여 스스로 갸우둥 하였다
누에의 전설은 초등학교 다닐때 내 어머니한테 직접 들은 것으로서
아마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가 아닌가 사료 된다
바위고개의 가사 내용에 누에의 전설을 접목을 시켜 보면
그래서 애절한 애수의 사연이 된 바위고개의 노래가 탄생되지 않았나
유추 되기도 하는데 눈을 감고 가사를 음미하며 노래를 불러보면
심장이 정말 멎을 것 같아 금새 눈물이 나오려는 애절한 노래임은 틀림이 없다.
가사를 한번 다시 되씹어 가며 불러보기 바랍니다. solsae kns
누에의 전설 솔새김남식
더위가 막 시작되는 유월이면 뽕나무에 달린 오디를 때 먹을 때면 아이들 입안이 온통 벌겋다.
뽕나무에 연한 잎은 삶아서 무쳐 먹어도 맛있고 나무에서 열린 오디는 더욱 맛있다.
그런데 그 뽕나무 잎을 먹고사는 누에가 있다.
한 달간 잘 키운 누에에서 얻은 고치를 팔아서 생활비를 썼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고치에서 나온 번데기는 단백질이 풍부한 식품으로 어른들에게는 술안주로
어린이들에게 인기 만점의 간식이었다.
시골 농가에서 키운 누에고치는 농협공판장을 거처서 대도시 제사공장으로 옮겨져 제사(製絲)를 만들었다.
제사공장에서 번데기가 나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매일 줄을 서서 번데기를 사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제사공장 누나들은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었고 동생들 학업을 도왔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돌아보면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뽕나무에서 얻어진 뽕잎과 오디 그리고 누에고치에서 여러 가지 건강식품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옛날은 오직 실을 얻기 위해서 누에를 키웠다.
실을 뽐아 내고 얻어진 번데기는 배고픔을 달래 주는 고마운 식품이었다.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 오면 앞마당에는 큰 가마솥을 걸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 누에에서 명주실를 뽐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은 아련하다.
뜨랑에 앉아 배고프다고 투정을 하면 아직 덜 빠저 나온 누에고치를 그대로 그릇에 담아 주면
쪼그리고 앉아서 번데기를 빼먹었다.
.
누에고치에서 얻은 실로 베를 짜서 길쌈을 하여 옷을 만들어 생활 했었다.
누에를 치는 한 달은 누에에게 방을 내주고 가족들은 다른 곳에서 잠을 자야했다.
방마다 문을 열면 더운 열기가 훅 하고 나오면서 누에가 뽕잎을 갈 거 먹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왔다.
그때 어머니는 그 소리가 참 좋다고 하셨다.
논뚝 밭뚝에 빈 자리가 생기면 아버지는 뽕나무를 심었다
아침 먼동이 트기 전 어머니를 비롯하여 여자 가족들은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누에가 먹을 뽕잎을 따라 건너뜰 밭으로 나갔다.
아침 이슬이 촉촉이 젖은 뽕잎을 누에가 잘 먹는다고 했다.
특히 누에는 담배를 피운 손으로 만지면 살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한 환경에서 자라는 깨끗한 곤충이다.
누에는 약 25일 간에 걸쳐 먹고 자는 4번의 허물을 벗으면서 자란다.
그리고 누에는 실 샘을 통해서 비단실을 토해 내어 고치를 짓게 된다.
고치가 완성된 2주후 에 누에는 고치를 뚫고 나와서 알을 낳고 나방으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고치가 나방이 되기 전 가마솥에 고치를 넣고 끓이면 실이 풀리면서 물레에 감기게 된다.
그리고 실이 다 나온 뒤에는 번데기만 남아 있어서 식용 간식으로 사용하였다.
번데기를 입안에 넣고 깨물면 고소한 단백질이 터지면서 입안에서 만족을 느끼게 하였다.
어떻게 해서 누에가 번데기로 나오는지 한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어린 나이에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누에를 치던 어머니가 내게 다음과 같은 누에의 전설 이야기를 내게 들려 주었다
그것을 잊지 않고 여기에 옮겨 본다
.
------때는 아득한 옛날 황해도 재령 땅에는
한양에서 벼슬을 하고 내려 온 김진사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 집에는 돌쇠(佳名)라는 머슴이 있었다. 돌쇠는 아버지를 이여서 3대째 머슴살이로 잔뼈가 굵었다.
우직하고 순박한 그는 주인을 하늘처럼 섬겼다. 고달픈 하루에 머슴살이도
그에게는 살아가는 희망이 있었다.
바로 김진사의 딸 분이(佳名)가 있었기에 웃음을 잃지 않고 언제나 밝은 마음으로 강직하게 자랄 수가 있었다.
돌쇠가 일하러 산이나 들로 나 가는 길목에는 언제나 그녀가 따라 다녔다.
어릴 때부터 오누이처럼 자랐지만 신분의 차이로 맺어 질수 없다는 것을 두 사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느덧 성인이 되었지만 분이는 시집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한편 딸의 혼처를 알아보던 김진사가 두 사람 사이를 알게 되었다.
돌쇠 부자를 사랑방으로 불러내서 노발대발하며 이곳에서 부터 삼백리가 떨어진 먼 곳으로 가서
기척도 없이 숨어 살라고 돌쇠 부친에게 엄한 호령을 내렸다.
분이 역시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단념하라는 불호령에 아무 말도 하지를 못했다.
그럴수록 두 사람에 마음은 더욱 강했지만 부모님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훗날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약속으로 헤어지기 하였다.
그리고 떠나기 며칠 전 물레방앗간에서 두 사람은 혼례를 하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분이는 사랑하는 서방님이 떠나는 길에 입고 갈 옷을 며칠 밤을 새워가며 정성 것 만들었다.
그래서 늘 허름한 작업복 대신 분이가 마련한 고운 한복을 입혀 주었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이 보지 않는 하현달이 뜨는 이른 새벽에 김진사의 집을 나섰다.
분이는 어디에 가시든지 몸성히 잘 있으라고 당부하며 눈물로 배웅을 하고 돌쇠는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게 되면 꼭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되었다.
떠나는 발길이 무겁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가던 길을 여러 번 돌아서며 돌쇠는 눈물을 흘렸다.
이별이 아쉬운 분이도 서방님 어서 가시라고 손을 놓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돌쇠는 어느덧 진달래꽃이 무수히 피어 있는 마을 앞 바위고개 길을 오르고 있었다.
이곳은 두 사람이 자주 놀러 오던 곳이었다.
돌쇠는 이대로 떠나기가 정말 싫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모퉁이를 돌아서서 고개를 넘으며
영영 만날 수 없는 이별이 되는 순간 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넘어가야 할 때가 지났는데도 돌쇠가 고개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고 발길을 머문 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이에게도 보였다.
이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분이의 눈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했다.
'서방님 아무 걱정 말고 어서 가세요.' 라는
애끓는 소리가 들리는지 아직도 그 자리에서 넘어가지 않고 오랫동안 서 있는 모습 이었다.
그런데 여러 번 큰 소리를 전 했지만 돌쇠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이 따뜻한 봄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그 자리에 마치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참으로 이상하다 생각한 분이가 그 곳에 찾아 가보니 하얀 벌레들이 무수히 있었다.
벌레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분이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믿지 않겠지만 아내의 곁을 떠나기 싫은 돌쇠가 벌레로 변신했던 것이다.
한참을 바라보던 분이는 서방님의 분신이라고 생각 하고 치마폭에 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것저것 먹을 것을 다 주었지만 먹지 않던 벌레가 뽕잎을 주니까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먹는 것이었다.
뽕잎을 주면 잘 먹고 배부르면 다시 잠을 자고 그렇게 며칠을 보내더니 제법 큰 벌레가 되었다고 한다.
여자의 손에서 자라 누에가 일생을 마칠 때는 비단 옷감을 만들 수 있는 재료 명주실을 만들어 준다.
아내 곁을 떠나기 싫어 돌쇠가 누에가 되었다고 하는 그 옛날 전설의 이야기이다.
누에는 자라서 고치가 되어 입에서 나온 하얀 액체로 자기 몸을 싸고 번데기로 마친다
여자의 손에서 자라서 누에가 생을 마칠 때는 비단 옷감을 만들 수 있는
명주실을 만들어 주고 일생을 마치게 된다.
징그러운 벌레를 싫어하는 여자들이지만 누에 만큼은 여자들 손에서 자란다.
그래서 좀 억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즉 누에는 남자이다.
옛날 시골에서는 담배와 누에가 현금을 할수 있는 소득원이었다
누에와 담배농사를 하여 아이들 학교도 보내고 가정사에 보태어 쓰던 시절이 있었다
전설따라 삼천리에 나올 범한 바로 그 이야기를 당시 누에를 치던 어머니가 직접 들려 주었다.
이 전설에 나오는 고개는 황해도 재령땅에 있다고 類推하고 있다. solsae kns
바위고개의 가사를 살펴보면 위 내용과 비슷하게 얽혀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아뭏튼 이 노래에는 나오는 바위고개는 과연 어디일까?
이 곡을 만든 이홍렬은 바위고개는 전국에 골고루 걸쳐 있다고 直答을 늘 회피 하였다
그래서 향토사전에서 찾아 보니 평안남도 양덕군 동양리 방선골에서
소구산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제(祭)를 지냈던 큰 바위가 있다고 한다.
바로 이곳은 이서향과 이흥렬 두 사람 모두 동향(同鄕)출신으로 어릴적 친구 사이였다.
그런데 이서향의 부인 백난영은 서울 백병원의 설립자인 백인제 박사의 장녀로서
2001년 이문학회보(以文學會報) 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바위고개는 남편이 14살이었던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지은 것으로
훗날 이흥렬 씨가 작곡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남편으로 부터 들었다” 고 했다
그래서 훗날 그 진실이 밝혀젔다
그런데 우이동 솔밭공원에 가면 바위고개 노래비가 있다.
문제는 바위고개 노래비가 우이령과는 어떤 연관도 없는 이곳에 왜 있는가?
노래비 뒤에는 바위고개가 바로 이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말 있어야 할 곳은 이서향이나 이홍렬이 청소년기를 보냈던
그 어느 소박한 고갯길에 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그래도 구청에서는 아마 우이동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정서를 나누어 주려함이 아닐까 솔새가 스스로 생각을 해본다 / solsae kns
바우고개 이서향작사 이홍렬작곡
바우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임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임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바우고개 피인 꽃 진달래 꽃은 우리 임이 즐겨즐겨 꺽어 주던꽃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
바우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임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임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바우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이흥렬(李興烈,1909년 ~ 1980년)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동요를 작곡하고 보급하는 일에 힘썼으며
음악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봄이 오면, 섬집아기등 으로 유명하며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장을 지냈다.
이서향(李曙鄕, 1915년 ~ ? '1959') 극작가
본명은 이영수(李榮秀)로 월북후 북한에서
국립예술극장 총장까지 지냈으나
1959년 신고송(申孤松)과 함께 복고주의 종파분자로 몰려서 숙청당했다.
북한지리정보 =>
http://cybernk.net/infoText/InfoNatureCultureDetail.aspx?mc=BN0101&id=BN010100097331&rightTy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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