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여행일기

선비의 고장 함양

시인김남식 2009. 11. 17. 10:19

선비의 고장 함양

방문일자 ; 2014.03.12 수

봄비가 내리는 날 서울에서 멀고먼 함양을 찾았다 

옛날 같으면 하루 날을 걸리는 거리였지만 지금은 고속도로 타니 3시30분 정도면 닿을수 있다

함양은 신라의 국경지대로 백제와의 패권 다툼의 공방전이 계속된 곳으로 남쪽에는 지리산

북쪽에는 덕유산등 황석산.거망산 등산하기 좋은 산들이 즐비한 곳으로 최치원의 상림숲 공원이 있다

 

 

 

 

 

 

 가던 날이 함양 장날이라서 비가 내리는데도 많은 이들이 시장을 붐볐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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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함양_수려한 산천에 시서를 펴고

함양은 영남 정자문화의 보고(寶庫). 우거진 숲, 물 맑고 호젓한 계곡 옆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있다. 정자는 사대부의 풍류와 은일(隱逸)의 쉼터이자, 시서(詩書)를 논하는 경연장이었다.

 

 

풍류 간직한 선비문화 흔적 곳곳에

함양은 좌안동 우함양’으로 불릴 만큼 일찍부터 묵향의 꽃이 핀 선비의 고장이다. 이런 연유로 유서 깊은 향교와 서원, 누각, 정자 등이 곳곳에 있다. 함양향교안의향교가 있고, 서원으로는 남계(), 청계(靑溪), 송호(松湖)를 비롯해 10개가 남아있다. 누각과 정자는 허물어지고 파괴된 것까지 합쳐 <함양군지>에 소개된 것만 해도 150개가 넘는다.

 

 

 

남계서원은 명종 7(1552) 지방 유생들이 일두 정여창(鄭汝昌) 선생을 기리고 후학을 기르기 위해 백운동서원 다음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창건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서원 입구에는 하마비(下馬)가 있어 누구라도 말에서 내려야 한다. 청계서원은 문민공 김일손(金馹孫), 송호서원은 고은 이지활(李智活)을 모시고 있다. 남아있는 누각으로는 학사루(學士樓), 광풍루(光風樓), 함화루(咸化樓)가 대표적이다. 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는 본래 함양초등학교(옛날에 객사로 사용)에 있었던 것을 1979년 현 위치로 이전했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최치원이 이 지방 태수로 재직 시 자주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었다 하여 신라시대에 창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무오사화의 빌미를 제공한 학사루 <장원수기자>

무오사화의 빌미를 제공한 학사루 <장원수기자> 

 

 

울창한 천년의 숲 거닐다

상림(上林)으로 향했다. 상림은 읍내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다. 인공으로 만든 숲인데도 햇살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아름드리 수목이 많다. 대부분 낙엽활엽수림이다. 은행나무, 노간주나무, 생강나무, 백동백나무, 비목나무, 개암나무 40여 종의 낙엽관목을 포함하여 116종의 2만 그루의 나무가 1.6㎞의 둑을 따라 80200m 폭으로 펼쳐져 있다.

 

 

 

상림 숲 속의 오솔길 <장원수기자>

상림 숲 속의 오솔길 <장원수기자> 


상림 양쪽으로는 산책로가 있다. 위천(渭川)을 끼고 있어 아침이면 물안개가 은은히 피어오른다. 반대편 산책로에는 여름이면 연꽃이 햇살에 흥건하게 젖는다. 상림은 어느 때가 더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기 제 빛깔로 매혹적인 단장을 한다. 봄이면 연둣빛 신록이 피어오르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진다. 가을이면 붉고 노랗게 물들고, 길에는 두툼한 낙엽이 깔린다. 특히 910월에는 꽃무릇 30만 그루가 온통 붉은빛을 내뿜는다. 상림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말,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와서 조림한 숲이다. 당시 함양은 읍내를 가로지르는 위천의 잦은 범람으로 수해가 많았다. 최치원은 수해예방을 위해 강물의 위치를 바꾸고 주변에 둑을 쌓은 다음 둑을 따라 나무를 심었다.  그 후 아무리 큰 홍수가 나도 함양은 안전할 수 있었다.

 

 

 

상림에는 함화루 외에도 이은리 석불,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척화비, 역사인물공원 등 오랜 역사를 품은 비석과 석불이 많다. 상림에는 뱀이나 개구리가 전혀 없다고 한다. 어머니가 상림에서 뱀을 보고 놀랐다는 말을 들은 최치원이 달려가 “이후 모든 뱀이나 개구리 같은 미물은 상림에 들지 말라”고 한 뒤부터 뱀이 사라졌다는 전설이다.

 

 

 

팔정팔담의 승경 자랑하는 계곡

함양에는 고색창연한 정자들이 여러 채 남아 옛사람의 풍류를 전하고 있다. 화림동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강변 바위 위로 정자들이 이어진다. 정자는 주위 나무들과 조화를 이뤄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낸다. 본디 서하면·안의면 지역엔 ‘팔정팔담(八亭八潭)’이라 해서 여덟 개의 정자가 여덟 개의 담 옆에 있었다. 거연정(居然亭), 군자정(君子亭), 동호정(東湖亭), 심원정(尋源亭) 4개만 남았는데, 최근에 농월정(弄月亭)을 제외한 정자 3동에 나무테크를 조성해 정자탐방로를 만들었다.

 

 

 

계곡 초입에는 농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2003년 불이 나 타버렸다. 고요한 밤에 냇물에 비친 달빛을 한 잔의 술로 희롱한다는 농월정은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지족당 박명부(朴明榑)가 노닐던 곳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농월정에서 2㎞ 올라가면 서하면 호성마을의 경모정(景慕亭)이 나온다. 계은 배상매(裵尙梅) 선생이 조선 영조 때 후학을 가르치며 쉬던 곳으로 후손들이 이를 추모하기 위해 1978년에 건립했다. 여기서 1㎞ 정도 가면 냇물 가운데 넓게 펼쳐진 암반과 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동호정이 서 있다. 동호정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이신 동호 장만리(章萬里) 선생의 후손이 추모하여 세웠다.


지금은 불타 없어진 농월정 <함양군청 제공>

지금은 불타 없어진 농월정 <함양군청 제공>

 

 

 

함양에 이처럼 정자가 많은 이유에 대해 향토사학자 곽성근씨는 “사화 이후 중앙 진출이 막힌 영남의 선비들이 계곡과 강변의 경승지를 찾아 정자를 짓고 시서(詩書)를 논하며 풍류를 즐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함양의 정자는 분명 호남의 정자와 차이가 있다. 호남 정자가 전원생활, 목가적이라면 함양 정자는 유유자적, 놀이문화가 강하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호남 정자는 자연과 흔연히 일치하는 조화로움과 아늑함을 보여주는데, 영남 정자는 자연을 지배하고 경영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고 했다.

 

 

 

맑은 물실에 세상 근심 씻어버리고

한여름 한기가 느껴지는 용추폭포 <장원수기자>

한여름 한기가 느껴지는 용추폭포 <장원수기자> 


용추계곡을 찾았다. 골이 깊고 물이 맑다. 숲과 어우러진 계곡물은 바위에 부딪쳐 은가루를 뿌리고 암반을 미끄러지듯이 타고 흐른다. 맑은 물과 시원한 바람이 고달픈 세상사를 잠시나마 잊게 한다. 이 곳은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진리삼매경에 빠졌던 곳”이라 하여 옛날에는 ‘심진동(尋眞洞)’이라 불렸다. 기백산과 황석산에서 흘러내린 계류가 이루어 낸 용추의 비경은 자연미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정자인 심원정에서 시작된다. 유학자 돈암 정지영 선생이 노닐던 곳으로 그 후손들이 고종 3(1806)에 세웠다. 정자에 오르면 층층이 포개진 화강암 무리가 한눈에 펼쳐진다. 심원정을 지나면 삼형제바위, 매바위와 그 아래쪽으로 시퍼런 소를 이룬 매산나소, 꺽지소 등이 멋을 자랑한다.

 

 

 

품위뿐만 아니라 실속을 갖춘 고택

함양에는 서원, 누정(樓亭)뿐만 아니라 고택들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두 정여창고택허삼둘가옥이다. 일두고택이 있는 지곡면 개평리의 한옥마을은 집집이 돌담으로 어깨를 맞대고 작은 집 몇 채를 지나면 번듯하게 생긴 큰 집이 나온다. 정여창고택 외에도 구한말 바둑 최고수였던 노사초의 생가(풍천 노씨 대종가), 노참판택 고가, 하동 정씨 고가 등 100가구가 넘는다. 일두고택은 정여창 선생이 죽은 후 선조 무렵(1570년대)에 건축됐다. 1만㎡ 정도의 넓은 집터에는 여느 양반가옥과 마찬가지로 솟을대문, 행랑채, 사랑채, 안채 등 여러 건물들이 서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사랑채는 ㄱ자 팔작집으로 돌 축대가 높직하고 추녀는 비상하려는 듯 날개를 펴서 시원스럽다. 사랑채 옆 일각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서면 마당이 직사각형으로 길게 뻗어 아래채와 연결된다. TV드라마 ‘토지’의 촬영 장소였다.


양반가의 정갈한 기품이 느껴지는 정여창고택 <장원수기자>

양반가의 정갈한 기품이 느껴지는 정여창고택 <장원수기자> 

 

 

 

오도재 넘어 지리산 자락을 밟다

함양읍에서 마천면으로 가는 길은 지리산 칠선계곡백무동계곡 오르는 길이다. 이 길로 가려면 오도재를 넘어야 한다. 오도재는 옛날 내륙지방 사람들이 지리산 장터목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 2006년 건설교통부에서 주관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됐다. 오도재 정상(750m)에는 지리산제일문이 거대한 성루처럼 서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오도재 길 <장원수기자>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오도재 길 <장원수기자>   


오도재를 넘으면 칠선계곡과 백무동계곡으로 들어설 수 있다. 칠선계곡 초입의 산중턱에는 함양 8경중 제6경인 ‘서암석불’이 있다. 서암은 인근 벽송사의 암자. 사찰의 역사와 규모에서 벽송사에 비할 바 아니지만 방문객의 발길은 더 잦다. 바위로 뚫어 만든 ‘대방광문’이란 문을 지나 굴법당에 들어서면 탄성부터 나온다. 불상은 말할 것도 없고 벽이며 천장까지도 섬세한 조각들로 가득하다. 칠선계곡은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다. 칠선폭포, 대륙폭포를 비롯한 7개의 폭포와 비선담, 선녀탕, 옥녀탕 등 33개의 소를 품고 있다. 작년에 10년간의 휴식년제에서 풀려 탐방예약에 한해 출입을 허락하고 있다. 백무동계곡은 장터목과 한신계곡으로 오르는 길목이다. 가내소폭포, 첫나들이폭포를 비롯해 계곡 굽이마다 이름을 갖지 않은 아름다운 폭포들로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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