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만의 연인’이었던 ‘꾀꼬리가수’ 박재란씨는
빼어난 외모 만큼이나 당시 옴니버스 음반들의 커버를 화려 하게 장식했다
데뷔 때부터 전성기였던 196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음반 재킷을 장식했던 가수가
바로 박재란씨로 확인한 것만도 무려 100여종이나 된다고 한다.
아울러스크린에도 진출,1959년 박종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손석우씨가 주제가를 맡은 영화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에서는 미남, 미성의 가수 손시향씨와 함께 특별 출연해
주제가와 함께 연기를 선보였고 이어 1961년, 영화 ‘천생연분(박성호 감독)’에서는 타이틀 맡아 열연했다.
또한1962년 발표된 히트곡 ‘님’은 가사 중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단어를 타이틀로 이듬해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
아울러이 노래 ‘님’은 2001년, 작사가 차경철씨 출생지인 울산의 대운산 입구에 노래비까지 건립됐다.
방송과영화, 취입과 공연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시절
전국을 누비던 "박재란 쇼"는 언제나 몰려드는 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무리한일정으로 인해 폐가 나빠져 약으로 버티면서도 하루에무려 30곡이나 되는 노래 연습과 취입을 해야 했어요.
젊었을 때니까 가능했던 일이었겠지만 무엇보다 대중들의 환호가 가장 큰 힘이었지요.”"
무대에서생긴 병은 다음 무대에서 치유되었을 정도로 그에게서 노래는 어려움을 이겨낸
치료제이자 면역력을 키워준 힘이었다.
‘대중들앞에서의 삶’이 전부였던 그에게도 비로소 ‘자신만의 인생’이 펼쳐진다.
1959년,영화주제가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연습하기 위해 작곡가 김광수씨 집에 갔다가 운명처럼
남편 박운양씨를 만난 것. 동갑내기이자 당시 성균관대생이었던 박운양씨는
작곡가겸 연주인 김광수씨가 출연하는 ‘무학성 카바레’의 단골로 서로 의형제를 맺은 사이
그와의 사랑이 시작되면서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1989년 ‘한번만 더’로 사랑받았던 가수 박성신씨다.
아울러 남편이 영화제작에 손을 댔다가 결국 사기를 당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함께 쇼 단체를 만들어 전국 공연에 나서기도 했지만 세상일을 모르고
살았던 이들에게 결코 만만치 않았다.
결국100평 남짓하던 서울 후암동 2층집에서 용산 단층집으로,
또 갈현동 전셋집으로 전락하며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부간의 불화로 인해 결국 이혼을 택한 뒤 1973년 혼자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LA에 도착한 그는 나이트클럽 ‘타이거’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재기에 안간힘을 썼다.
동시에 한국을 오가며 음반을 발표하며 방송에도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이 무렵 미국 시민권을 가진 연예인들이 이따금씩 귀국해 활동하는 것에 대해
"국고를 해외로 빼돌린다." 다는 투서사건이 발생, 국내 활동이 일체 중단되자
그 역시도 점차 대중들로 부터 잊혀져 갔다.
더구나1979년, 아파트 화재로 모든 걸 잃는다.
밑바닥까지 내려간 그의 생활은 재기에 집착할수록 오히려
그 집념이 병이 되어 심장과 신장에 이상이 오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악성 위궤양으로 발전
음식물을 삼킬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유년시절숱한 잔병치레를 통해 강한 면역력을 키운 동시에 어려웠던 시대를 향해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던 가수 박재란.
너나없이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오히려 밝은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나섰던 그
스스로의 ‘피그말리온 효과’는 지금에 와서 새삼 그를 지탱해주는 에너지이다.
현재는 선교 활동을 통해 ‘노래하는 전도사’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 주말 매거진에 기고된 내용中에서 일부 발췌 하였음 / 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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