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의 대중가요
옮긴글 整理 solsae kns
광복의 해인 1945년까지의 대중가요는 당시 신문화의 유입 과정에 따라 급속한 변천을 겪으면서 남북분단이라는
역사의 비극으로 단절되거나 사장되어 버려 맥이 끊긴 불구의 형태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 분단에 의하여 작곡가 이면상, 김해송, 작사가 박영호, 조명암 등의 작품들은 금지되어 왔으며,
대중 가요계의 원조라 볼 수 있는 당시의 화려한 별들인 가수
김용환, 채규엽, 선우일선, 왕수복, 이은파, 박향림 등의 음성과 노래들은 사장되어 왔었다.
오늘날 들려지고 있는 일제 시대의 노래들은 1936년 이후의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1923년, 강원도 지방에서 26세된 여자를 잡아 먹은 호랑이 사건이 신문에 커다랗게 게재되어 있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처럼 느껴지는 75년 전인 1925년경에 양약에 의한 대중 가요가 상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 대중들의 귓전에는 1936년경 이후의 노래가 대부분 들려지고 있을 뿐이다.
그 원인은 작가의 월북으로 인하여 금지곡으로 정해진곡들이 많이 생겨 대중 음악의 단절 현상이 나타난데다가,
가수들의 조기 사망, 6.25 전쟁에 의한 수많은 자료의 소실로 주옥같은 대중 음악이 사장되어 버린 데에 있다.
유성기의 등장과 가요
축음기 광고
대중 가요의 시작은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가 이 땅에 상륙하여 대중화되는 현상으로 연결된다고 볼수있다.
1905년, <황성신문>에 유성기 (축음기)를 선전하는 첫 광고에 이어 1913년에는 <매일신보>에 대대적인 선전이 시작된다.
'새 소리판 나왓소 한장에 금 2원, 유성기(축음기)는 20원'이었다.
축음기판(SP)에는 송만갑, 박춘재 등의 명창과 권번 기생들의 민요 가기를 담고 있다.
1925년, 기생 김산월과 도월색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취입한 축음기판이 등장한다.
양악으로서 처음 대면하는 유행가이다.
<시들은 방초>와 <장한몽가>인데 두 곡 모두 일본의 연극 주제가들이다.
가야금과 장고 장단에 맞춰 부른 <장한몽가>는 일명<이수일과 심순애>라고 불려졌으며
신파극이나 무성영화에 의하여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가야금 장고 반주에 기생 김산월과 도월색이 1925년 처음 음반으로 취입한 일본 노래의 가사를 보면
대동강변 부벽루하야 산보하는
리수일과 심순애 양인이로다
악수론정 하는 것도 오날뿐이요
보보행진 산보하난것도 오날뿐이라
심순애야 심순애야 내년에는
금일금야 이갓치 밝은 달빛을
어대서 저 달빛을 보드라도
흘이거던 심순애야 심순애야
1938년 동경 / 콜럼비아레코드 녹음실
1920년대는 가수부재시대였다
그래서 <조선일보> 광고에는 연극 연구 여자를 모집하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3개월 양성 기간으로 생활비를 지급한다는 조건이었다.
서양 문물에 의한 신문화가 스며들기 시작하는 시대에 우리네의 생활양식에서는 여염집 여인이
무대에 등장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기생들도 무대를 경원시하는 시절이었으니까.
1920년경부터 복혜숙이 신극 단체 '토월회'에 등장하였으며 신파극단에서는 여배우 이애리수, 이경설, 김연실,
윤백단, 김선초 전옥이 인기를 끌었다.
'일본 축음기 조선 소리판' 이란 라벨로 축음기판이 선전되면서
1927년에는 빅터 레코드사와 콜럼비아사가 서울에 대리점을 개설하고 개업준비를 했다.
1929년 4월 콜럼비아사에서 한국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가 나왔다.
<낙화유수>라는 노래로서 오늘날 <강남달>로 불려지고 있다.
이정숙이 이 노래를 불렀는데 가수 부재의 시절인지라 중앙보육학교(중앙대학교 전신)를 졸업하고
<오빠 생각>, <뜸북새>등 동요를 취입한 최초의 동요 가수가 가요를 취입한 것이다.
그 때까지도 일반인에게는 유행가와 동요를 구분하는 의식이 없었고, 양악류의 음악은 통칭 창가로 인식하였었다.
이정숙 <락화류슈>(낙화유수)
강남달이 밝어서 님이 노든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젓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뜬 이 한밤을 홀노 세울까
멀고 먼 님의 나라 참아 그리워
적막한 가라가에 물새가 우네
오늘밤도 쓸쓸히 달은 지노니
사랑의 그늘 속에 재워나 주오
(조선가요집 1931년)
<낙화유수>는 1927년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인기를 끈 무성 영화(낙화유수)의 주제가이다.
초창기 여배우인 복혜숙이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이 노래는 무성 영화 변사로 인기를 누리던 김영환이 작곡하였다.
김영환은 이 영화 감독까지 하였었다.
<황성 옛터>가 먼저 나온 노래라고 전해지고도 있지만 음반으로는 1932년 3월에 첫 발표되었다.
이후 이애리수등 무대배우의 가수들이 나열되었다
1930년에 접어들자 음반계의 시선은 연극 무대로 눈을 돌리게 된다.
당시 미모의 이애리수와 김연실, 강석연, 이경설, 윤백단, 전옥등 여배우가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여배우 복혜숙은 콜럼비아레코드에 종로행진곡등 몇곡을 불렀으나 노래솜씨가 신통치 않아 그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취성좌의 배우에서 토월회에서 활동을 한 강석연은 1931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세동무' 방랑가' '오동나무'를
불러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애리수는 빅터 레코드에서 1930년에 '방랑가' '오동나무'를 부르면서
1932년 빅터 레코드에서 '황성옛터'를 불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취성좌 배우인 전옥은 1933년 포리돌 레코드에서 째즈 멜로디를 시작으로 1934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물길천리' '수부의 아내'등으로 배우로서 인기를 굳히는데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33년 연극 '항구의 일야(주제가: 노래 김용환)는 1950년대 극장에서 연극으로 흥행을 많이 하였다.
윤백단은 1933년 OK 레코드에서 '횃불을 높혀라' 등을 불렀었는데 배우 가수중 연장자로서 선배 배우인셈이다.
이외에 1930년에 빅터 레코드에서 '세동무'를 부른 김연실 1933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강남을 가자'를 부른 김선초도 초기의 유명한 배우 가수였다.
당시에 제일 많이 부른 노래는 '방랑가' '오동나무' '세동무' '강남달' '황성옛터'가 대표적인 노래들이다.
배우가수중 남자로는 강홍식이 유일하게 유명한 가수이다.
1934년 강홍식의 노래처녀총각이 거리의 축음기가게를 한창 바쁘게 만들었었다.
이어서 1930년대는 권번 기생 가수들이 무대로 등장을 하게된다
1930년 초반, 여배우들의 가수 활동과 함께 권번 기생들의 활약도 가요의 흐름에 한줄기 영향을 주었다.
권번에 소속된 기생은 예의 범절, 서화, 시조, 창, 가야금, 유행가, 일본 노래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다.
1941년까지도 평양에는 기생 학교가 있었다.
기생에 적을 두고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끈 인물로는 선우일선, 왕수복이 특히 유명하였다.
그들이 노래를 취입하기 위해 평양에서 서울에 올 때는 레코드 회사 간부들은
인력거를 서울역에 대기시켜 놓고 칙사 대접을 하였다.
일본에 있는 녹음실에서 취입하고 돌아올 때까지는 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선우일선과 왕수복은 6.25 전쟁 이후에도 평양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들의 노래는 거의 신민요 노래들이고
1934년에 나온 이면상 작곡인 <꽃을 잡고>는 선우일선을 스타덤에 올려놓는 계기가 된다.
왕수복의 인기곡은 전기현 곡으로 1933년에 나온 <고도의 정한>이다.
1940년대 대중 가요계를 주름잡은 이화자는 권번소속 기생이 아니고 일반 유흥가 술집 출신으로
천부적인 자질과 풍부한 호소력을 가진 1936년에 등장한 가수이다.
1940년 초에 널리 퍼진 이화자의 <목단강 편지>는 1950년 후반에 엉뚱하게 <처녀 뱃사공>이라는 노래에서
가사는 바뀌었으나 멜로디의 많은 부분이 표절되어졌다.
봄철을 맞은 가요계
1933년은 음반 회사가 이 땅에 기업적인 토대를 작은 시기이다.
음반 회사로는 콜럼비아사, 빅터 레코드사, 포리돌 레코드사, 시에튼 레코드사가
음반 생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한 회사들이다.
빅터, 포리돌, OK 레코드사에서 대중 가요가 많이 나왔지만, 빅터와 포리돌 레코드사의 노래들은
대부분 자료가 사장되고 작가나 가수들 또한 일찍 사망하여 OK 레코드사에서 나온 노래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근래에 레코드사에서 당시의 자료들을 발굴하여 복각함으로써 일반인에게 소멸된 노래들을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1933년 OK 레코드사의 사장인 이철은 이난영이란 소녀 가수를 발굴하게 된다.
여배우도 아니고 권번 기생도 아닌 순수한 가수의 등장인 셈이다.
일본을 순회 공연중인 '태양 극단'에서 노래하는 16세 소녀를 빼내 왔는데, 그 소녀가 바로 이난영이다.
1933년 가을 <불사조>, <밤고개를 넘어서>의 두 곡을 부르면서 부터 꾸준히 인기를 얻어 온 이난영은
1935년 여름, <목포의 눈물>이란 노래로 일약 유명한 가수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목포의 눈물>이란 노래는 OK레코드사에서 향토 찬가 가사 모집을 하였는데
목포의 문일석이라는 청년이 투고하여 당선된 작품으로 손목인의 곡으로 만들었다.
한편 포리돌 레코드사에는 극작가 왕평과 가수 겸 작곡가 김용환이 토속적인 신민요 노래를 많이 만들었다.
김용환은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의 형인데, 작사, 작곡 등 만능 재주꾼으로 매우 다재 다능한 인물이었다.
1935년 김용환 자신이 직접 작곡하고 부른 <젊은이의 봄>, 1937년에 나온<구십리 고개>등은
우리의 토속성을 너무나 잘 표현한 노래들로 축음기로나 들어볼 뿐 일반 시중에서는 들어볼 수가 없다.
김용환은 광복 후 3년만에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다.
가요의 대중화 시대 축음기의 전국적인 보급과 창가에서 한걸음 발전된 노래들이 SP판에 의하여
대중의 귀에 익어지면서 이난영, 고복수 등의 신진 가수들이 등장하자
1936년 이후에는 외면당하던 가요계에도 가수 지망생들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한다.
1936년 당시 인기 판도는 채규엽, 강홍식, 선우일선, 김용환, 최남용, 노벽화, 이은파,고복수,이난영 등의
가수가 스타 선상에 군림하였다("조광" 1935년 2권 1호, "사해공론" 1936년 3월호)
1936년 OK레코드사 전속 가수가 된 경남 진주 출생의 청년 남인수는
1937년 12월에 이노홍 작사, 박시춘 작곡인 <애수의 소야곡>을 불러서 일약 대스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남인수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천성적으로 타고난 미성의 가수 남인수는 <애수의 소야곡>이후 전국을 휩쓰는 가요계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1950년대에 <이별의 부산 정거장>으로 한 시대를 장식한 남인수는
1962년에 인생의 막을 내리는데 그의 장례는 연예인 협회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신문 사화면에는 조계사에서 홍제동 고개까지 장관을 이룬 인파 행렬을 일제히 보도하였다.
가수 남인수의 등장에서부터 가수를 열망하는 붐이 일어나고 축음기판의 목록도 완전히 탈바꿈하게 되었다.
판소리 잡가 등은 거의 밀려나고 유행가 음반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1936년 이후부터 1940년 초까지 계속된다.
1937년부터 1940년은 소질과 재능을 가진 남녀 가수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노래,
다양한 성격의 노래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요의 황금 시대에 속한다.
대표적인 가수와 노래를 살펴본다.
당시의 대표적인 음반레이블 일제시대 대표곡
<오케(OKEH)레코드사>
<타향>(고복수),
<눈물젖은두만강>(김정구),
<해조곡>(이난영),
<꼴망태 목동>(이화자>,
<애수의 소야곡>(남인수),
<꿈꾸는 백마강>(이인권),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선창>고운몽.
<빅터 레코드사>
<황성의 적>(이애리수),
<알뜰한 당신>(황금심),
<아이고나 요맹꽁(맹꽁이타령)>(박단마),
<눈물의 손수건>(조영은),
<아리랑 술집>(김봉명)
<콜럼비아 레코드사>
<봄노래부르자>(채규엽),
<찻집 아가씨>(박향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남일연),
<홍도야 울지 마라>(김영춘),
<울리는 백일홍>(계수남).
<포리돌 레코드사>
<구십리 고개>(김용환),
<꽃을 잡고>(선우일선),
<항구의 일야>(김용환).
<고도의 정한>(왕수복).
<태평 레코드사>
<청춘 극장>(빅정림),
<눈물의 경부선>(울금향).
<나그네 설움>(백년설),
<불효자는 웁니다.>(진방남),
<찔레꽃>(백난아) 등이다.
1941년 12월 8일,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한반도에도 전시 비상 체제를 조성하기 시작한다.
대중 가요에도 정책적인 전쟁의 입김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는데,
백년설이 노래한 <복지 만리>가 그 예이다.
달실은 마차다
해실은 마차다
청태콩 벌판 우에
휘파람을 불며불며
저 언덕을 넘어 가면
새 세상의 문이 있다.
황색기층 대륙길에
빨리 가자 방울 소리 울리며
김영수 작사, 이재호 작곡인 이 노래는 1941년 3월에 상연된 전창근 감독의 영화<복지 만리>의 주제가이다.
일본의 대륙 침략의 일환으로서 만주 지역으로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적인 영화였다.
1942년 인기 절정의 백년설은 경성 방송국에 나가서 <아들의 혈서>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을 일본의 침략 전쟁에 몰아넣기 위해 가요의 교묘한 이용 방법인 것이다.
어머님 전에 이 글월을 쓰옵나니
병정이 되온 것도 어머님 은혜
나라에 밧친 목숨 환고향 하올 적엔
쏘다지는 적탄 아래 죽어서 가오리다
<아들의 혈서>(조명암 작사/박시춘 작곡)
식량 배급이라는 통제된 생활 속에서도 부분적이나마 1942년까지는 대중 가요의 맥은 이어져 나왔다.
1943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학교와 거리에는 일본 군가가 흘러 넘치고
OK레코드사에서 가수 백년설과 남인수, 박향림이 <혈서 지원>이란 노래를 합창하는 단원에서 대중 가요는
어둠 속으로 묻혀져 버리고 그 막을 내리고 만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 놓고
성수 만세 부르고
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
나라님의 병정되기 소원입니다.
<혈서 지원>(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광복 이후 우리 가요계가 새출발을 하게된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라디오에서 울려 나오는 일본 천황의 목소리는 무조건 항복이었다.
작가, 가수 등 가요계 인물들은 뿔뿔이 흩어져 전국 각지, 광산 등에 위문대로 끌려 다니다가 하나 둘씩 모이게 되었다.
1947년, 고려 레코드사가 광복이후 음반 생산의 첫 선을 보였다.
지금까지 음반 생산은 모두 일본에서 하였기 때문에, 처음 해 보는 작업이라서 사실 내용은 보잘 것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수공업적인 방법으로 숯불에 구운 축음기판은 고작 하루에 열장 정도였다.
그것도 낡은 축음기판을 재생한 것이었다.
그 이듬해에 럭키 레코드사, 서울 레코드사(1949년 첫 음반발매) 등이 탄생하지만 모두가 원시적인
수공업 형태로 축음기판을 생산하는 실정이었다.
감격과 희열의 시대에 나온 노래를 보면 남인수 <가거라 삼팔선>(이부풍 작사/박시춘 작곡)
현 인 <신라의 달밤>(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비노래는 고모령>,
이인권 <귀국선>
박재홍 <울고 넘는 박달재>
장세정 <울어라 은방울> 등이다.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사랑을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인왕산 바라보니
달빛도 곱네
1949년 6월, 김구 선생이 피격되던 서재에서는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방의 기쁨을 실은 이 노래는 6.25 전쟁직전까지 민족의 환희를 가장 잘 표현한 노래일 것이다.
1948년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 영화가 탄생하였다.
<푸른 언덕>이란 영화로 현인과 김백희가 주제가를 불렀다.
그러나 당시의 음반 제작 시절의 영세성으로 가요계의 활동은 극장 무대가 주류를 이루었다.
대체적인 악극단의 인물을 살펴보면,
'태평양 가극단'의 김용환, 김정구, '구봉서
백조 가극단'의 전옥, 고복수, 황금심,
'대도 악극단'의 장동휘, 왕숙람, 황정자,
'남대문 악극단'의 반야월,
'다이아몬드 악극단'의 백년설,
'MC 악극단'의 손목인,
'은방울 쇼'의 박시춘 등이다.
악극단, 가극단의 단체가 수십개나 되어 전국 극장 무대에서 연극 쇼와 함께 가요 활동이 왕성하였다.
광복 이후 새로 등장한 가수로는
<임 계신 전선>을 부른 금사향,
<나 하나의 사랑>을 부른 송민도,
<한강>의 심연옥,
<빈대떡 신사>의 한복남,
그 외 백설희, 박재홍, 현인 원방현, 황정자 등이며 1950년 직전까지의 3년의 가요 상황은 극장 무대가
가요의 전달 주무대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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