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망가뜨린 세 여자 정리 김남식
1.) 문정왕후 윤씨 (1501년~1565년 중종의 계비)
조선 왕조를 통틀어 손꼽히는 독부(毒婦)로 꼽힌다.
그가 죽은 날 조선왕조실록에는
‘서경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 했으니, 바로 윤씨 같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
(牝雞之晨, 惟家之索, 尹氏之謂也)’라는 극언이 등장한다.
물론 생전에는 감히 아무도 할 수 없었던 말이다.
윤지임의 딸 로 태어난 문정왕후 윤씨(1501년~1565년) 는 중종의 두번째 아내이자 명종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 명종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장경 왕후의 아들 인종이 중종의 대를 이은지
1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종을 독살한 여자이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명종이 12세에 즉위하자 수렴 청정하면서 그 똑똑한 선비들을 쥐락펴락 휘둘러
조선 천하를 20년 넘게 호령했으며 이때 윤씨들의 세도정치로 나라는 썩어 가고 있었다.
이 당시에 임꺽정이란 도둑이 나타나 관아를 습격하여 혼란에 빠진 정국이었는데
임꺽정은 의로운 도둑이었고 문정왕후는 조선을 망가뜨린 첫번째 여자였다
중종의 첫 아내 장경 왕후가 1515년 세자 호(峼, 뒷날의 인종)를 낳고 죽은지 2년 뒤,
1517년 문정왕후 윤씨는 만 16세의 나이로 왕비로 간택을 통해 궁에 들어올 즈음
복성군(福城君)을 낳고, 뒤에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를 낳아서
중종의 총애를 받은 경빈박씨는 이미 궁중생활 10년을 넘겼다.
중종은 장경왕후가 죽자 경빈박씨를 아예 계비로 삼으려 하였으나
대신들이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해 뜻을 접었다.
경빈에겐 세자만 없다면 장남인 복성군이 왕위에 오른다 해도 놀랍지 않을 상황이었다.
결국 중종은 뜻을 접고 문정왕후를 맞이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서 문정왕후의 최선 책은 아들을 낳는 것이었지만 딸만 내리 셋을 낳자
1527년 효혜공주의 남편과 시부 김안로(金安老)와 모의해서
경빈박씨가 왕세자(뒤의 인종)를 저주했다하여 1528년 아들 복성군과 함께 서인으로
감등 시킨후 후 사약을 받게 한다.
그리고 1945년 인종을
나중에 경빈박씨와 복성군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 알려져 신원이 회복되었다.
명종은 문정왕후의 섭정으로 외척의 비리를 양산하게 되고 국정의 혼란을 일으키게 되며
문정왕후가 인종과 복성군 경빈박씨를 죽인 천벌을 받았는지 세자가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특히 슬하의 자식으로 역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중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던
창빈안씨 소생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선조가 14대 왕위에 즉위하게 된다.
문정황후의 손자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으니까 야심은 달성하지 못한 셈이다.
문정왕후 윤씨는 성질이 고약하고 시기심이 많은 여자였기 때문에 전실 부인의 아들인 인종을 무척 괴롭혔다.
문정왕후에 의하여 몇번에 걸쳐 죽음에 위험을 겪어 내면서 인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의 나이 이미 30세
그러나 인종은 미처 뜻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재위 9개월 만인 1545년 7월에 31세의 짧은 일기로
생을 마감하는데 그렇게 빨리 죽은 것은 문정왕후 윤씨의 시기심 때문이라고 한다.
인종이 앓아 누워 죽게 된 것도 문정왕후가 내놓은 독이 든 떡이 그 원인이라고 야사는 전하고 있다
어느 날 인종이 문안 인사차 대비전을 찾아 갔는데 그날 따라 문정왕후는 평소와 다르게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인종을 반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에게 떡을 대접하였다.
인종은 난생 처음 계모가 자신을 반기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 아무 의심 없이 그 떡을 먹고 난 그 이후
인종은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얼마 못 가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고 전한다
2.) 정순왕후 김씨 (영조의 마직막 왕비 1745-1805)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이때 영조의 맏며느리 혜경궁 홍씨가 정순왕후보다 10살이나 위 였다.
그의 소생은 없고 영빈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그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고 굶어 죽게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는 5년을 더 살면서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면서 조선을 말아 먹는다.
조선조에 르네상스를 이룬 영, 정조시대의 정조를 얼마나 괴롭혔고 정조를 독살했다는 설까지도 있는 여자이다.
정조는 25세에 왕이 된 후 23년 뒤 48세에 1800년에 붕어 하신다.
.
정조 24년 6월 종기가 악화돼 정순왕후가 주위 사람을 물리치고 처방을 직접 올렸으나
실내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정조는 운명했다.
당시 예법에도 어긋나는 처사이고, 정조와 평생을 정적 관계였던 정순왕후가 임종을 지켰다는 점에서
의혹은 더욱 커졌고 정조가 사망한 직후 전국 곳곳에 왕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익명의 대자보가 나붙었다고 한다
.
정조의 장인 안동김씨 김조순이 다시 정권을 차지하여 1800년 - 1860년 까지 김씨들 세도 정치가조선을 망가뜨린 다시 말하면 조선을 망하게 한 동기가 되었으며 그 주역이 정순왕후가 계기가 되었다.
여자가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언은 바로 이때 나온 말이다
이때 부터 조선은 기울기 시작했다.
임금이 다음 왕을 이어 갈 세자를 생산지 못하고 조선이 망할때까지 23대 순조때 부터
헌종, 철종, 고종 3대왕을 친족에서 구걸해야 했다.
3. 명성왕후 민씨 (1851 ~1895)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은 일제가 궁전까지 처 들어가
한나라의 왕비를 살해하고 방화까지 한 끔직한 사건은 정말 잊으면 안 되는
우리역사에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명성왕후가 미화되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명성황후를 조선의 역사를 승리로 이끈 철의 여인 또는 외교전략이 탁월하다고 하는데
명성황후 민씨는 구한말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비극을 자초한 인물이다
그래서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윤씨와 영조의 마직막 왕비 정순왕후 김씨와 더불어서
조선을 망가뜨린 세여자(女傑)로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명성황후의 실질적인 통치기간은 1873년에서 1895년 까지 22년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치명적 위기에 처한 민비는 청나라를 끌어들여
권력을 다시 회복하여 청일전쟁때 까지 조선은 청나라의 간섭에 들어가야 했다.
원세개는 조선 왕처럼 행세하며 심지어 조선을 청에 합병시키려고 까지 했다.
마지막 집권해인 1894~1895년에 명성황후는 일본제국군과 청군과 함께 불러 들여
진주를 허가 함으로써 일본군에 통치를 허락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다시 청나라의 힘을 빌려 일본을 몰아내려 했으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청나라가 물러나고 명성황후는 다시 러시아 세력을 불러 들여 일본을 견제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조선 침략을 위해서 명성황후가 제거되어야 한다 생각하고
즉시 시해를 감행했으며 1904년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다시 승리 하자
강제합병 조인식을 통하여 1910년 조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민비의 권력유지로 결국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는데 기여 했다는 堅志解析이며
일본이 을미사변을 잃으키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는 어처구니였다
아버지 대원군과 부인 명성황후 눈치를 살피며
이리흔들 저리흔들 줏대없이 국정을 논하고 대처하는 고종과
문무백관들에 무능함이 적라하게 들어나자 국론이 분열되고
우왕좌왕하는 난국으로 말미암아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나 생각해보는 시각이다.
조선의 왕들중에서 무능한 인조나 선조보다도 나라를 잃게한 고종의 책임은 무한이다
무능한 군주로 이러한 역사가 다시는 뒤풀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明成皇后의 잘못된 政治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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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원군을 몰아내기 위해서 세도정치를 한 안동김씨.풍양조씨와 손 잡았다
2.대원군을 몰아낸후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강화도 조약을 일본과 맺어 세도 정치세력을 제거하고
자기 맘대로 양반가 자재를 선발하여 신사유랍단이나.영선사를 일본과 청나라에 파견하고
양반자재로 별기군을 조직하였다
-- 대원군은 과거에 의한 관리를 선발했지만 명성황후는 돈으로 관리를 선발했다
3.양반자제로 구성된 별기군과 백성으로 구식군대의 차별로 임오군란이 일어나 정권을 잃게 되자
청나라를 끌어 들여 대원군을 잡아 가고 구식 군대의 학살을 자행
4.고종의 庶長子 완화군과 완화군 엄마의 죽음에 관여했다
5.임오군란으로 민씨가 권력을 독점하자 개화파가 쿠테타를 잃으키자 청나라를 끌어들여 개화파 제거
6.갑신정변후 청나라에는 조선의 이권을 일본에게는 조선의 상권을 넘겨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함
7.1894년에 동학농민 전쟁에서 관군이 패하자 외국군대[청나라]에게 자기 백성을 죽여달라고 부탁
8.동학농민 전쟁의 원인은 명성황후가 관리를 돈을 받고 팔자 관리들도 자기밑에 하금관리를
돈을 받고 팔고 본전을 뽑으려는 하급관리들은 무리하게 백성을 수탈햇고 일본상인들은 조선에서 장사하며
부를 쌓아 백성이 도탄에 빠젔다 탐관오리의 숙청을 요구하며 봉기한 동학군을 무력 진압하려다 실패햇다
9. 청일전쟁으로 정권을 잡은 일본은 명성황후를 몰아내고 친일정권을 세워 갑오경장을 실시하자
이번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고 친일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탈환한다
10. 그러자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을미사변을 잃으키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을 간다
명성황후가 30년 가까이 정권을 잡으면서 권력유지만 하고 백성과 국가 발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데 기여 했다는 생각한다.
아버지 대원군과 정실부인 명성황후에 눈치를 살피며 이리흔들 저리흔들 줏대없이
국정을 논하고 대처하는 고종황제나 문무백관들에 무능함이 적라하게 들어나자 국논이 분열되고
우왕좌왕하는 난국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됐지않았나 생각해 보는 견지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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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단절되는 조선의 역사를 읽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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