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서오릉 산책

시인김남식 2008. 7. 30. 17:59

서오릉  솔새김남식

쾌청한 날씨가 오랜만에 푸른 하늘을 보여줘서 상쾌하기가 이를때 없다

 

서오릉은 이곳에 모여있는 다섯능

곧 경릉(敬陵), 창릉(昌陵), 익릉(翼陵), 명릉(明陵), 홍릉(弘陵)을 일컫는 말이다

 

 

서오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 30-1에 위치하며

동구릉 다음으로 조선왕조 왕실의 가족 무덤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특히 명릉과 익릉 그리고 대빈묘는 숙종과 한때 사랑을 나누었던 대비들이 있다

 

 

각 능을 소개하자면:

1) 명릉: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제2계비인 인원앙후 김씨의 능

2) 익릉: 조선 제 19대 숙종의 元妃인 인경왕후 김씨의 능

3) 홍릉: 조선시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

4) 경릉: 조선제 7대 세조의 맏아들인 德宗과 왕비 소혜왕후 한씨의 능

5) 창릉: 제 8대 예종과 계비 인순왕후 한씨의 능

 

 

이외에도 순창원, 수경원, 대빈묘 등이 있다

옛 왕실의 무덤을 돌아 보면서 감회도 깊었고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기도 했다

 

 

 

1. 명릉

명릉: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제2계비인 인원앙후 김씨의 능

 

명릉은 같은 능역 안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고 서로 다른 언덕에 쌍릉과 단릉으로

능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언덕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고

왼쪽 언덕이 인원왕후의 단릉이다.

비각 안에는 2개의 능표석이 있는데, 하나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표석이고 또 하나는 인원왕후의 능표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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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명릉에 제일 처음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을 공사할 때 허우(虛右, 오른쪽 자리를 비우게 함)제도로 공사하여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다.

이후 1720년(숙종 45)에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의 능 옆으로 능을 조성하여 쌍릉의 형식을 이루었다.

명릉을 조성한지 37년이 지난 후 1757년(영조 33)에 인원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는 생전에 명릉에서 400여보 떨어진 곳에 미리 묻힐 자리를 정하였으나

영조는 새로 산릉공사를 해야 하는 것(당시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공사하고 있던 상황)을 염려하여

명릉 서쪽 언덕에 자리를 선정하고 필요한 인력과 국고를 줄여 산릉공사의 부담을 덜었다.

 

숙종의 능이 이곳으로 정해진 연유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숙종이 하루는 평상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궐을 벗어나 어느 냇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여 연유를 물으니

갈처사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고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적은 서신을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지관이 살고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고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 라며 따져 묻는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숙종이 묻힐 묘자리를 골라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신통한 지관 갈처사가 택한 입지라고 하는데

숙종임금은 살았을때도 부인들과의 복도 많았다.

또한 달리 죽어서도 부인들의 한곳의 능역안에 같이 뭍혔으니 이것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으랴

 

 

 

 

 

 

2. 익릉

 

왼쪽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은 릉지기 숙소이다

 

3. 홍릉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등극 일성을 터뜨린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원했던 정성왕후 옆자리를 외면하고

동구릉 권역에 있는 자리에 묻어버렸다.

오늘날의 원릉(元陵)이다.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가 묻혀있는 원릉 자리는

물이 고인다고 효종을 여주로 천장하고 버려둔 흉지(凶地)였다.

 

영조의 염원은 희망사항일 뿐 결정권은 정조에게 있었던 것이다.

 

죽은 자는 선택권이 없다.

묻어주는 데로 묻혀야 한다.

조선 왕릉은 묻힌 자의 위용인 것 같지만 묻은 자의 권력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도 고향 함흥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동구릉에 묻혀 있고

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소망하며 살아생전 대모산 아래를 의망한 세종도 여주에 묻혀있다.

 

4. 경릉

 

 

 

 

왼쪽이 덕종이고 오른쪽이 소혜왕후 릉으로 덕종과는 달리 소혜왕후는

석물등 모두를 다 갖추어진 릉이다

 

 

 

 

 

 

 

5. 창릉

 

 

 

 

 

 

 

 

 

 

 

 

 

 

 

 

 

 

 

 

 

 

창릉은 예종의 비극적 종말과도 무관하지 않다.

형님 의경세자는 세자 신분으로 죽었음에도 세조가 친히 나서서 명당을 찾아 극진히 장사 지냈지만

동생 예종은 왕으로 죽었음에도 (세조가 없자) 명당은 커녕

졸속한 국장 처리가 일사천리 진행 되었으며 누구도 무관심으로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예종의 후손 2남 1녀중 큰 아들 인성대군은 일찍 죽었고

제안대군(1466-1525)은 왕위 서열상 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했으나

4촌인 성종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는 등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못하고 끝내 자손없이 죽었다.

 

 

 

딸 현숙공주는 병조판서를 지낸 임사홍의 아들 임광재에게 시집 갔으나

남편의 문란한 사생활 때문에 끝내는 별거를 하고 후손없이 죽음으로 예종의 후손들이 절손 된 것이다.

또한 창릉은 이후 여러번 변고가 있었는바

인조 3년(1625)과 4년(1626)에 봉분이 불에 타 잔디를 다시 입혔고

영조 32년(1756)에는 정자각에 불이나 중건했으며

고종 33년(1896)과 38년(1901)에도 봉분에 불이 나는 등 화재가 빈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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