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최영 장군

시인김남식 2011. 10. 18. 17:43

최영장군                  솔새김남식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명언을 남긴 장군이다

무속에서 ‘최영장군’은 수명장수,

안과태평(安過太平)의 신으로, 무(巫)에서 가장 많이 모셔지는 신령 가운데 하나이다. 최영 장군의 죽음은 고려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가는 듯 했다.

그러나 민중들은 억울한 죽음을 맞은 그를 오히려 우상화하고 신격화하여 최영 장군의 신주를 모신 곳이

전국 어디를 가도 그의 사당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며 각처에서 제사를 모시는 곳도 많다

해군에는 항공모함 최영함도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궂판 국사당에 걸려있는 최영장군 神

 

최영장군 묘 주변으로 고양둘레길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다녀 가기도 하고

특히 전국에서 그의 내공을 얻기 위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참배하는 이도 적지 않다고 전한다. 

오래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 곁에 살아있는 것이다.

  

 

최영장군의 묘소는 벽제를 지나서 필리핀 참전비 삼거리에 이정표가 있어서 찾아 가기는 아주 쉽다.

이곳은 고양둘레길 역사관 코스이다

 

 

최영(崔瑩, 1316년~1388년) 충남 홍성 출신

고려 말기의 장군으로 시호는 무민(武愍) 이며 유교사대부와 을 잡은 이성계와 대립 하다가

위화도회군 이후 권력에서 밀려난 후 참형 당했다. 그의 딸은 우왕의 영비이다

 

 

고려 왕조는 우왕 14년(1388) 5월,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멸망의 위기에 몰리면서 반란을 주도한 이성계와

그의 추종세력들에 의해 왕권이 탈취되어 조선 왕조가 건국되기 까지는 만 4년의 기간을 거쳐야 했고

고려 왕조의 멸망 배경은 고려말의 정치·군사·경제적 측면의 변질과 정파간의 세력에 대한 

개혁이 실패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성계와 최영 둘이다 나라의 주석의 지위에 있었고 세력이 비슷 했다고 한다.

둘의 사상과 마음씨는 정반대였다. 하나는 진취요 하나는 보스며, 하나는 자주 독립적이요

하나는 사대 예속적이며, 하나는 이상주의요 하나는 현실주의며, 하나는 의리요 하나는 권리다.

최영이 북벌을 주장한 대신 이성계는 그 반대였다.

 

 

최영이 기개로써 버티면 이성계는 모략으로 이끈다.

이쪽이 의(義)로써 책(責)하면 저 쪽은 이(利)로써 달래고 있으니 중간에선 왕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속내를 앓고 있었다

결국 기싸움에서 이성계의 승리로 고려국은 멸망하게 되고 나라의 실권이 돌아가는 

즉 하늘에 뜻일지는 모르지만 이성계는 반역으로 새로운 국가를 세운 것이다

 

 

이성계와 그의 아들은 자기들만 생각하고 반대파를 죽이거나 유배를 보낸 독재중에 독재였고 

만약 위화도 정벌에 성공 했다면 우리나라가 만주까지 영토가 커지는 대국으로 가는 길이 였는데

어쩌면 아쉬운 역사의 오점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이성계는 고려에는 대역죄인 이었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는 반군으로 개경으로 난입하자 최영장군은 소수의 군사로 맞서 싸우다 체포되어 고봉현(지금의 고양)에 유배 당했다가 그 뒤 개경으로 다시 압송되어서

최영장군 나이 73세에 참형을 당하게 된다.  

 

 

고려말기 혼란한 내외정세 속에서 서서히 기울어가는 고려왕조를 지탱하려고

안간힘을 다했던 최영장군의 생애는 이렇게 허망하게 막을 내리는데

그의 죽음은 한 인물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곧 고려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조선의 청백리 맹사성이 최영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의 부모 묘역 아래 안장했다고 전해지는데

이성계는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장군의 죽음을 애석해 하며 

넋을 위로 했다고 전한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은 최영 장군 아버지의 유훈(遺訓)으로 

아버지 최영직은 사헌부(司憲府) 간관이었는데 장군의 나이 16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유훈이었던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 즉 見金如石(견금여석) 넉자를 큰띠에 써서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최영의 집은 기어들어 갈 정도로 초라했고, 방은 흙벽이었으며, 바닥의 멍석에는 벼룩이 뛰어 다녔다고 하는데 

비록 재상의 자리에 올랐지만 유훈에 따라 뇌물을 멀리하고 청탁을 받지 않은 까닭이었다

 

 

최영 장군은 참형에 앞서 “만약 내가 청렴 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백을 주장했다.

그래서 묘에는 풀이 돋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1976년 부터 풀이 돋아 난다고 하며 

장군의 묘는 쌍분으로 윗묘는 아버지 최원직의 묘이고 아랫 묘가 최영 장군의 묘로 아내 유화부인과 합장 되었다.

 

 

봉분의 밑바닥에 밑돌을 둘렀으며 무덤 앞에는 두개의 문인석과 망두석이 무덤을 지키고 있는데 

반군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죽음까지 당했으니 바뀐 왕조에서 지나치게 홀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이름에 비해 여전히 초라한 묘소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윗 충혼비는 1970년 대한민국 국방대학원 문화공보처에서 세웠다고 한다.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여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한 평생 나라 위해 바치셨으니 겨레의 스승이라 최영 장군

이나라 이겨례 바로 잡고자 남으로 왜적을 물리치시고

북으로 오랑케를 무찌르셨으니 장하다 그 이름 최영장군

 

 

우리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로 시작되는 최영장군 노래가

음악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때 부터인가 시대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돌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당시의 여자 애들이 길게 늘어진 고무줄 끝을 양쪽에서 잡고 두세명 아이들은 가랑이 사이에 고무줄을 두고

단발머리 찰랑대며 그저 펄쩍 뛰어 다니며 부르던 노래가 바로 최영장군 노래이다.

 

 

안팎으로 혼란스럽던 고려(高麗) 말, 밖으로는 외적이 침입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고려 왕실을 지키려 했지만 새로운 시대의 흐름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고집하였고,

급변하는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자신이 키워낸 새로운 무장세력 이성계와 불화한 탓에 그토록 지키자 했던 고려 왕실과 함께

역사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했던 그는 아들 담(潭)을 남겼으며 

후손들은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 조선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정리 솔새김남식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주위에 소현세자의 아들묘와 경혜공주의 묘가 있어 일석이조의 참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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