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이두황묘
이두황의 묘는 한동안 베일에 쌓여 있다가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되면서
최근에 일반에게 알려졌다
이두황은 1895년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하여 광화문 경비를 담당하였다.
명성황후 시해후 체포령이 내려지자 당시 일본인들에 협력 했던 우범선, 구연수와 함께
부산으로 도주하였고 그후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일본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유람을 하는 등 잘 지내다가 십여 년 후인 1907년 특사를 받아 귀국했다.
귀국해서는 중추원 부찬의, 전라북도 관찰사 겸 재판소 판사를 겸임했으며
1910년부터는 죽을 때까지 전라북도 장관으로 근무했다.
그런 그도 죽음은 피해 갈 수가 없었다.
1916년 3월 9일, 10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전라북도 장관 이두황씨는
신장염으로 요독이 병발하여 지난 7일 정오부터 용태가 위독하여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데라우치 총독은 보고를 받고는 즉시 위문 전보를 보냈다 (위 신문 보도내용 참조)
죽기 하루 전 날인 3월 8일 고등관 1등 종4위 훈3등으로 승직되었고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장례 참석자 약 3천명에다 영구(靈柩)의 통로에 연하여 도열 전송하는 사람이 무려
1만여명이었으며 의장병이 뒤를 따라 공전의 성대한 의식이었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장례는 일본 불교식으로 하고 위패는 절에 보관하라는 유언에 따라
완산사에서는 그를 위한 공양을 빠뜨리지 않고 계속 해왔지만 지금은 없다
기린봉 버스 종점에서 산 방향으로 올라가면 여러 길이 나오는데
벽송암 팻말이 가리키는 오른쪽으로 걸어가서 벽송암을 지나서면 수월히 묘를 찾는데
특히 입에 이두황 단죄비가 있다
묘로 올라가는 순탄한 길이 있었고 앞쪽으로는 기린봉아파트 103동이 내려다 보였다
묘 주위로 둥글게 흙을 돋우어 두었고 그 위에 듬성듬성 나무를 심어놓았으며
그리고 돋우어 놓은 흙 안과 밖은 돋운 흙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끔 돌로 테두리를 해둔 형태였다
통로를 따라 묘의 입구까지는 자갈이 깔려 있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돋운 흙, 자갈 등은 안 보이고 묘, 묘비와 상석 만이 남아 단촐했다
또, 상석 좌우에 있던 장명등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통로의 입구 좌우에 있던 겹쳐 놓은 돌들은 뒤로 물러난 상태로 아직도 남아있었다.
묘명은 일본인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쓴 것이고
비문은 중추원 의장을 역임했던 김윤식(金允植)이 찬하였고
중추원 부찬의 정병조(鄭丙朝)가 비문을 썼다
묘비는 1918년 3월 16일 준공했으며
墓 주소는 전주시 완산구 중노송동 산 1-3 이다
멀리에서 와 이두황의 묘를 찾아서 다행이다싶은 마음 한쪽에는
어떻게 이 묘가 그동안 자리를 잘 보존할 수 있었나 하는 의문이 가득한 채 내려왔다
이두황(李斗璜, 1858년 ~ 1916년 )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공칠(公七), 설악(雪嶽)
조선과 대한제국의 무신이자 군인이며 화가, 서예가이고, 을미사변 관련자이며
일제강점기의 관료, 화가, 작가이다. 또한 을미사변 당시 도성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있었으며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고위 협력자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묘 위치 ;
https://map.kakao.com/?from=total&nil_suggest=btn&tab=place&q=%EC%9D%B4%EB%91%90%ED%99%A9%EB%AC%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