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해외여행

서유럽 영국프랑스이태리스위스 여행기

시인김남식 2019. 4. 27. 07:50

서유럽(영국이태리스위스두바이) 여행기

 

                                                                                                                                               솔새김남식

*첫째날_런던투어

서유럽 여행의 시작은 첫날부터 고난의 행군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10시간 비행하여 아부다비에 도착을 하고 그리고 이어서 2시간 후 환승하여 런던까지 8시간을 가야하는 최종 목적지까지 18시간의 장거리 비행이다. 그것도 밤을 꼬박 세워가며 가야하는 강행이고 시차를 무시하고라도 칠순의 나이에 들어선 내가 좀 무리였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 했기에 무조건 여행을 떠나야 한다. 환승을 하지 않고 직항으로 여행하면 좀 편하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하면 여행경비가 예상외로 많이 나온다.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하루를 뜻있게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언제 내가 여기까지 왔나 그 생각을 하면 후회하는 날이 더 많았다. 42일 월요일 저녁 8시 인천공항에서 인솔자를 만나서 주의사항을 들었다. 이번에 여행을 함께 할 사람은 모두 29명으로 어린아이서 부터 팔순을 바라보는 부부까지 있다. 내 나이는 끝에서 세 번째이다. 최근에는 젊은 층들이 해외여행을 많이 떠나는 추세이다. 다음날 새벽 1시 에티하드항공 비행기는 인천공항을 출발 하였다. 비행기를 타기 전 부터 졸렸던 몸은 기내에서 비몽사몽간에 졸며 깨다가 다시 졸고 비행기에서 주는 식사는 꼬박 받아먹었다. 그리고 아침530분 아부다비공항에 도착해서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다시 8시에 비행기를 환승해서 오후 1시에 런던 공항에 도착 하였다. 한국과 런던의 시차는 8시간이다.

수속을 마치고 공항출국장을 나오니 파란 하늘위로 구름들이 노닐고 있는 런던하늘 아래 지금 내가 서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할 뿐이다. 차가 지나는 길에 처칠수상의 동상도 보았고 세인트폴 대성당도 구경을 했고 영국의 주요 건물을 방문하여 시간관계상 5분대기조로 사진을 찍었다. 왜냐면 영국에서 머무는 시간이 총 6시간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영국의 주요지를 우선 방문하여 이어서 템즈강 유람선에 올랐다. 런던의 템즈강은 파리의 세느강의 두배 정도 크기지만 우리 한강에 비하면 조족지혈로 강물은 흙탕물이었다. 특히 조석간만의 차가 심해 수위가 오르내린다고 한다. 그러나 꼭 한번은 가고 싶었던 런던브릿지 그리고 영화 애수 속에 나오는 워터루브릿지를 지나 한 시간 가량 유람선 투어를 하였다. 잠시 진개눈비가 내리는 좀 추운 날씨였지만 그런대로 첫 일정이 순조로웠다. 런던브릿지 부근에 있는 런던의 유서 깊은 건축물이자 노르만 군사건축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왕궁 런던탑에서 템즈강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남기고 세계 3대 박물관 하나인 대영박물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네시였다. 대영박물관은 1759년에 설립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립 박물관으로 전 세계 각 문명권의 역사문화를 총 망라하는 800만점 이상의 물품이 소장되어 있었다.

로제타스톤, 미이라,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 조각품등 역사적으로 매우 가치높은 유물과 민속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풀 수 있는 로제타스톤이 대표적인 전시품이라고 한다. 이집트에 원정 중이던 나폴레옹이 나일강 로제타라는 지역에서 요새를 짓기 위한 공사 중에 발견한 것을 후에 영국군이 프랑스로 부터 승리하면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집트가 반환을 요구하며 지루한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기대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고 한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은 원정을 다니면서 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시절 세계 도처에서 수탈해온 문화재를 잘 보관하여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관람 해주고 있다. 반환 요청이 끊이지 않자 우리가 잘 보관 하지 않았더라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세계인류 문화유산이었다며 가져 갈려면 그동안 잘 보존하고 관리해준 것에 대한 가치를 달라고 하니 어찌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어쨌거나 방대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한자리에서 하루 종일 봐도 시간이 모자랄 수많은 소장품을 입장료도 없이 볼 수 있으니 여행자는 그저 고마울 뿐이다. 이러한 형태의 세계문화 유산들은 파리 박물관이나 바티칸 박물관에서도 똑같은 모습들이었다. 그나저나 무료입장이라 그런지 전 세계에서 관광 온 수많은 사람들로 내부는 가득했다. 오후 1시 도착해서 어딜 다녀왔는지 머릿속에 기억하기도 전에 영국을 떠나야 했다. 영국에서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곳을 언제 내 생애 다녀갈까 생각해보았다. 영국에서 유로스타열차를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파리로 가기 위해서 역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영국 출국 그리고 프랑스 입국 절차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순전히 승객들의 편의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출입국심사를 한곳에서 하니 편리하기는 한데 좀 어색하였다. 여하튼 캐리어를 끌고 처음으로 유럽의 KTX를 타고 여행하는 것도 재미가 아닌가 생각하며 열차에 올랐다. 기차를 탈 때 저녁 도시락으로 나누어준 김밥으로 우선 배를 채웠다. 그리고 모두들 모자란 잠을 다시 잤다. 715분 런던을 출발하여 파리에 도착한 시간은 밤늦은 10시 였다. 어둠속에 낯선 파리의 열차역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어느 낯선 호텔에서 투어 첫날을 보내게 되었다. 시치와 함께 18시간 날밤을 세워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삼류호텔이라 그런지 룸도 비좁고 모든 게 불편했고 특히 추워서 내복을 입고 잤다. 여행이라는 그 목적이 있었기에 내가 영국에 잠시 머물러 있었고 지금은 파리에 와 있다.

 


세인트 폴 성당



런던브릿지옆에 있는 런던 탑(옛궁)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이집트가 그리스의 지배를 받던 기원전 19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프톨레미(Ptolemy)왕 등극 1주년을 기념해서

그에 관련한 내용을 그림문자인 고대 이집트 문자 Hierogyphs 일반 이집트인들이 썼던 Demotic

그리고 이집트 정부에서 썼던 Greek(그리스문자) 세 가지 언어로 적어 놓았는데 그리스 문자는 이미 해독이 가능해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의 열쇠가 되어 준 유물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중이던 프랑스군이 나일강변의 로제타라는 지역에서 요새를 짓기 위한 공사 중에

발견한 것을 후에 영국군이 프랑스군으로 부터 승리하면서 영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지금은 이집트가 반환을 요구하며 지루한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기대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유물을 발굴하고 조급히 반입하면서 이미 잘라진 상태로 들여와서 전시되고 있다

*둘째날_ 파리투어

시차와 함께 피로가 겹쳐서 잠을 설치다가 새벽에 잠이 들었지만 낯선 잠자리 때문에 일찍 일어났다. 호텔 식당에 내려가기 싫어서 가져온 컵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투어는 9시 부터 시작이었기에 좀 느긋했다. 아침에 호텔 창문을 여니 봄바람은 좀 차가웠지만 아침 햇살이 시내거리를 비추이고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봄꽃들이 거리에 무수히 피어 있었다. 시내까지 버스로 한 시간을 달려와서 파리 개선문에 도착했다. 파리 개선문은 높이가 50m, 폭이 45m1806년 오스텔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을 축하하기 위해 당시 전쟁에서 영광스러운 여러 장면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나폴레옹은 살아 있을 때는 통과하지 못하고 사후에 유체가 개선문 통과했다고 한다. 특히 제2차세계 대전때는 독일 점령에서 파리를 해방시킨 드골장군이 이 문을 통해서 행진하기도 했다고 한다. 개선문 포토 존에는 이미 수많은 관광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프랑스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는 우리나라 독립문을 보면 작고 초라한 느낌이다. 개선문 부근에 잇는 상제리제 거리에서 커피를 한잔하는 여유의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식사를 하고 콩코드광장으로 지나 파리 에펠탑이 내려다보이는 트로이카데로 광장(Trocadero Gardens)이 있는 사요궁에 도착했다.

샤요 궁은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중심 건물로 사용하기 위해 현대식으로 다시 지은 건물로 건축 된 후, 지금은 인류 박물관, 영화 박물관, 영화 박물관, 샤요 국립극장 등으로 사용 되고 있다. 이곳에서 에펠탑을 내려다 볼수 있는 가장 잘 보이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벌떼처럼 있었다. 그런데 눈으로는 볼 수 있지만 한낮 해가 머리위에 있어서 사진은 역광으로 나왔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것 그 자체가 지금 내가 파리에 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후에 찾아 왔다면 사진이 예쁘겠지만 내 맘대로 하지 못하는 여행이라서 그냥 에펠탑을 눈으로 감상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어서 파리를 상징하는 쁘렝땅 백화점에서 한 시간의 쇼핑 투어가 있었다. 백화점에 있는 물건들은 소위 세계에서 최고라는 명품들이 고객들에게 호기심을 자아내고 욕구가 생기게 마련이지만 내게는 빛 좋은 개살구가 이다. 쇼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요한지 모르지만 궁색한 내겐 불필요한 존재였다. 한국 사람들이 여길 얼마나 0많이 오면 안내하는 코너가 별도의 장소가 있다. 관광지에서는 시간에 대단히 인색하지만 쇼핑 시간은 아주 넉넉한 게 패키지여행에서의 조금은 불만이다. 하지만 여행사에 인센티브가 지급 된다고 하니 불평은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 긴 쇼핑 시간이 지루하여 명품가게들이 즐비한 백화점 밖으로 나와 주변을 돌아보니 거리에도 차량과 사람으로 가득하다.

몽마르뜨 언덕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예술가의 광장 예쁜 카페와 음식점들도 많고 여행객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거리의 간판이나 표지판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 구석구석 예술적인 요소가 많아서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어서 박물관에 도착했다. 여기도 영국처럼 역시 사람들로 인산인해이다.

루브르 박물관은 원래는 바이킹의 침입으로부터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요새로 지어진 후 16세기 때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으로 시작하여 그후 새롭게 개조되었다. 이어서 1793년 궁전 일부가 중앙미술관으로 사용되면서 루브르는 궁전의 틀을 벗고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는 그리스, 이집트, 유럽의 유물, 왕실 보물, 조각, 회화 등 예술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프랑스가 다른 나라에서 약탈하거나 전리품 또는 기증받은 것들이고 정작 자신들에 작품은 별로 없다고 한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에 들어서면 성벽처럼 돌로 쌓아 놓은 지하 요새의 건물이 관람객을 첫 번째로 맞이한다. 마치 고구려시대의 성벽같이 크고 장엄했다. 전체를 다 돌아보려면 며칠은 걸린다며 가이드를 따라서 주요한 곳을 둘러보았다. 이집트 관에서 스핑크스 석상 이어서 비너스 조각상 그리고 벽화들 각종 진열품들이 즐비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 앞에는 수십명이 진을 치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책에서 배웠고 말만 들었던 모나리자 원작품을 보면서도 미술학도가 아니라서 그런지 신비한 느낌은 없었다. 크기가 작아서 인지 별로 흥미 없었다. 박물관 앞에는 이집트의 유리 피라미드가 설치되어 있다. 박물관을 나와서 에펠탑 전망대로 이동했다.

1889파리 만국 박람회의 상징물로 제작한 에펠탑은 설립자인 교량기술자 구스타브 에펠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31년 까지는 뉴욕의 엠파이어빌딩이 서기 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 구조물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이후 박람회가 끝나고 해체할 예정이었지만 그대로 남아 무전탑으로 이용 되었고 이어서 지금은 파리의 명물로 관광명소와 함께 텔레비전 송신탑으로 사용되고 있다. 에펠탑 4개의 콘크리트 받침대 위에 반원형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탑의 양쪽에는 전망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에 오르려고 긴 줄을 서서 검문검색을 마치고 오랜 기다린 끝에 전망대에 올라왔다. 아직 해가 지기전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파리시내의 모습은 산이 전혀 없는 탁 트인 평야 속에 있는 인구 220만의 도시였다. 파리 시내는 특별한 것은 없고 멀리 보이는 몽마르트 언덕등 몇몇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건물들이 5,6층의 석조 건물에 검은 색 지붕으로 다양성은 적어 보였다. 다만 파리의 중심을 흐르는 세느강이 우리나라 한강처럼 파리 시내를 품고 활처럼 휘어서 흐르는 모습이 평화스러웠다. 전망대를 내려오면서 에펠이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으면 거대한 강철을 조합해 이토록 거대한 탑을 세울 수 있었을까 잠시 생각하며 어둠이 내린 세느강 유람선을 타러 내려왔다. 세느강 폭은 청계천의 두 세배 정도의 조그마한 강이지만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물결을 따라 유럼선을 타고 가면 좌우로 펼쳐지는 독특하고 유서 깊은 역사적 건축물들이 들어오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낸 파리의 역사와 발전을 한 눈에 보여 준다. 무엇보다도 최대 압권은 야광이 들어오는 에펠탑의 조명이다.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환상의 유람선관광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온 시간은 밤 11시였다.



 지하 요새였던 파리 루브르박물관은 파리의 지형적으로 볼때 지하 요새가 적합한 지역이다

모나리자가 모니터 20인치 정도의 크기라고 할까? 글쎄 사람들이 사진찍느라 북새통이다, 근데 진품은 지하에 있다네요ㅎㅎㅎ


에펠탑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은 트로이카데로 광장(Trocadero)와 사요궁

파리시내는 주위에 산이 없는 평원이라서 우리와는 정말 대조적이고 산과 도시가 어우러진 서울이 더 멎지다는 것을 느꼈다

멀리 보이는 건물이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몽마르뜨언덕& 사크레 쾨르 대성당




파리에서 좀 아쉬운 게 있다면 미라보 다리에 가보고 싶었다. 흘러가는 사랑과 인생의 모습을 그린 아폴리네르 '미라보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를 음미하며 사진 한 장을 꼭 남기고 싶었지만 뜻은 이루지 못 하였다.

  

*세째날_리기산

유럽 여행은 결코 한번으로 끝낼 수 없다는 어떤 사의에 말이 떠오른다. 오늘은 스위스를 가기 위해서 새벽 5시반 호텔을 나왔다. 아직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이다. 어디를 왔다가 또 어딜 가는지 낯선 이방인들이 캐리어를 끌고 역구내를 가득 채웠다. 어제 열차를 타 보았기에 낯설지가 않아서인지 내가 타는 열차를 바로 찾아 승차 할 수가 있었다. 파리에서 720분 기차를 타고 1020분에 스위스 바젤 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나와 뒤편 버스주차장 까지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버스를 타고 2 시간 지나서 도착한 곳은 루체른 호수가 펼쳐지는 호텔 식당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버스가 달려도 기차가 달려도 대평원 이었는데 스위스로 넘어 오면서 고산들이 아름다운 설경과 함께 그 아래로는 봄꽃들이 피어있는 풍경을 보여 주니 마음에 힐링이 되는 것 같다. 커다란 호수와 설산들이 펼쳐진 루체른 호수에서의 점심식사는 그간의 피로가 모두 풀린 듯 했다. 일행들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마을의 풍경도 매우 정겨웠다.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 자칭 들의 여왕이라는 1797미터 리기산을 오르기 위해서 산악열차가 출발하는 비츠나우 역에 도착을 하였다. 이곳은 1871년 유럽 최초의 산악 열차가 개통된 곳으로 열차는 가파른 지형 때문에 기어식이고 케이블카도 함께 운행이 된다. 멀리 보이는 설산을 바라보며 설레는 맘을 앉고 드디어 오후 120분에 열차가 출발 하였다. 역주위로 보이는 마을은 유럽풍의 붉은 지붕과 교회의 모습 그리고 알프스 산맥 아래로 펼쳐지는 루체른 호수가 아래로 보인다. 창밖으로는 산과 호수와 푸른 들판과 이름 모를 마을들이 예쁜 그림책을 넘기듯 산속 마을들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대로 지구 끝까지 달려도 좋겠다는 생각은 잠시 하는 순간부터 고도가 높아지면서 이제부터는 설산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하늘은 온통 구름이 가득 덮어서 눈앞을 분간 할 수 없었다. 산에서는 날씨 변화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오늘도 그냥 행운을 바랄 수밖에 없다. 열차가 출발한지 40여분 드디어 종착지에 도착 하였다. 아 그런데 우리에게 행운이 왔다. 그 많던 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 아래로 지극히 평화롭고 고요한 설산의 모습이 눈앞으로 펼쳐있었다. 한결같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행운을 가져다준 하늘에게 모두들 감사를 하였다. 산 정상에는 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앞으로 펼쳐지는 알프스의 설산의 고봉들 모습으로 파란하늘 아래 보여 주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함께 여행을 온 아내와 이곳을 거닐며 마냥 좋아서 즐거웠다. 멀리 보이는 알프스 만년설 봉우리가 수시로 변하는 엷은 흰 구름 사이로 높은 산들이 구름 속에서 파도를 이루고 있었다. 상층의 파란 하늘과 중간 층의 설산, 그리고 하층의 구름들이 수시로 변화하면서 보여주는 모습은 정말 경이롭고 매우 아름다웠다 . 과연 '산들의 여왕' 이라는 별칭답게 한 폭의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험준한 산에 있는 만년설에도 햇살이 비추이고 있어서 더욱 분부시게 보였다. 또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맘껏 눈에 담고 맘에 새기고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 올수록 정말 아쉬웠다.

리기산 정상을 밟고 천천히 구름을 타고 내려 오면서 맑은 정기를 받고 깊은 심호흡을 하며 열차를 타고 내려왔다.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 오는 내내 알프스의 설산을 구경하며 미세먼지도 없는 파란 하늘처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인터라켓 호텔에 도착 하였다. 인터라켓은 알프스의 오르는 출발장소로 항상 산악인들이 많다고 한다. 그들 상대로 지역경제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3800미터의 융프라우를 오르는 산악열차를 타는 곳이라고 한다. 뒷산에서 패러글라이더를 하강하며 하늘을 즐기는 색색칼러의 패러글라이더들이 무리지어 날고 있었다.

멀리 알프스의 영봉들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







  

*네째날_루체른에서 밀라노

푸른 숲이 펼쳐지는 스위스 그리고 암청색 호수를 품은 산봉우리의 설산이 차가 지날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준다. 나지막한 산중턱 넓은 연두색 초원위로 숲을 배경으로 한 아담하고 예쁜 붉은색 가옥들 입구와 창문에는 꽃으로 장식돼 있는 모습이 참으로 행복하고 평화스러워 보인다. 호수는 맑아 유리알처럼 눈부시게 반짝이고 도로 양쪽에 우거진 숲에서는 푸른 정기가 하늘로 솟아오르니 정말 미세먼지가 멊는 맑은 공기들이 정신적 신체적으로 그냥 마음에 힐링이 드는 느낌이었다. 인터라켓에서 좀 늦은 시간에 출발하여 산길을 돌고 돌아 설산을 보며 다시 1030분 루체른에 도착하였다, 스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루체른 그곳에 가면 빙하공원의 작은 연못 암벽에 있는 빈사의 사자상이 있다. 1792년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 16세가 머물고 있던 궁전을 지키다가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설계는 덴마크사람이 조각은 독일 사람이 1821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조각은 스위스 용병을 상징하는 사자가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으로 죽은 피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 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슬픈 사자의 운명으로 표현 했다는 게 좀 특이했다. 스위스가 오늘날은 가내 정밀기계 공업이 발달되었지만 국토의 25%가 경작지로 중세의 가난한 농업국 스위스는 겨울이면 쏟아지는 눈과 북풍이 저주와 같은 빈곤으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러 용병으로 타국에 나갔었다고 한다. 그래서 스위스의 부강은 용병정신 밑바탕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도 바티칸에는 그들에 용병들이 많다고 한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관광객들만 간혹 이곳에 들릴 뿐 조금은 을씨년스러웠다. 이어서 루체른 호숫가 로이강이 흘러내려오는 곳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다리 가펠교를 찾아 갔다. 1333년에 만들어진 카펠교는 강물과 다양한 모양의 건축물이 어우러져 멀리서 보아도 운치가 있다. 특히 다리 위를 덮고 있는 지붕의 들보에는 스위스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나 루체른 수호인의 생애를 표현한 판화 그림이 걸려 있다. 마침 오늘이 토요일이라서 주변으로 야채와 빵 그리고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성당에는 결혼식이 열리고 악기를 연주는 악사들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강 윗 쪽으로 조금 거슬러 올라가보니 주변 환경과 함께 유럽풍의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낯선 사람들에겐 색다른 모습의 호기심이 가득한 장소였다. 이제 점심을 먹고 스위스 루체른을 떠나 늦은 시간 이태리 밀라노에 도착했다. 국경을 넘나들게 되니 유럽은 그저 신기 할 따름이다. 그리고 버스가 2시간 운전을 하면 기사가 15분 다시 또 2시간 운전하면 30분 휴식이라는 규칙도 무척 신기하다. 이태리로 넘어오면 포도와 올리브를 재배하는 들판을 지나게 된다. 패션쇼로 유명한 밀라노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두오모 성당과 오페라의 중심인 스칼라 극장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으로 유명한 곳이다. 천재적인 예술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조각상은 제자들을 아래로 굽어보는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는 광장에서 스칼라극장을 바라본다. 빈의 오페라 하우스와 더불어 유럽 3대 오페라 극장인 스칼라 극장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장소로 1800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로시니, 푸치니, 베르디 등의 작품을 올렸다. 조수미와 김동규가 이곳에서 공연했다고 한다.

밀라노의 상징인 두오모 성당은 높이 157m, 너비 92m에 이르는 거대한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1386년 밀라노 비스콘 공작의 지시에 의해 400여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로마의 바티칸 대성당, 영국의 세인트 폴 성당 독일의 쾰른 대성당 다음으로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성당으로 위력이 대단하여 거대한 고딕양식의 건물을 한 눈으로 거의 볼 수 없는 어마한 크기로 그 전체를 보려면 며칠이 소요된다고 한다. 두오모는 이태리어로 대주교가 있는 곳 성당을 두오모라 부른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성당이 돔 형태로써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과 수많은 카토릭 성인의 조각들로 장식된 흰 대리석의 외관은 너무 장엄하고 화려해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유럽은 카토릭 문화유산인 성당들이 주 예술문화 유산으로 되어 있어서 처음 볼 때는 크기와 외관 때문에 한 두번은 놀랬지만 여러번 자주 보니 느낌이 줄어들었다.

저녁호텔 Hotel ibis Styles Milano Est Settala

 

*다섯째날_ 밀라노에서 베니스

밀라노로 가는 길은 어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초지와 포도와 올리브 농장이 이어진다.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 탓도 있지만 계속되는 강행군에 피로가 몰려온다. 밀라노에서 아침에 출발하여 점심 무렵에 베니스에 도착했다. 선착장에서 30분배를 타고 베니스 중심부로 들어갔다. 여러 번 티브에서 영화에서 베니스를 익히 보아 왔기에 호기심은 작았다. 수변으로 아름다운 건물들이 멀리 보이고 관광객을 싣어 나르는 여러 형태의 배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베니스는 여러 섬들이 흩어져 있는데 주로 수로를 이용하여 다니는 배가 주요 교통수단이다. 가까운 섬과 섬 사이는 다리로 연결하여 독특한 시가지를 이룬 물의 도시이다. 베니스는 그 옛날 도시국가 시절인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들이 섬으로 쫓겨나와 이곳에 마을을 형성한데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여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지만 이후 여러번 외침을 받았다고 한다.

19세기 후반부터는 이탈리아 경제의 중심인 배후지의 항구도시로 발전하였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는 수많은 왕국과 도시 국가들로 다시 분열되었다가 1861년에 이르러서야 격변기를 겪으며 통일을 이루었다. 국제영화제 개최지 해수욕장, 카지노 등 익히 많이 알려져 있는 도시이다. 그러나 아무리 관광수입이 많아도 경제난으로 사람들이 섬을 떠나면서 베니스가 지금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고 한다. 배에서 내리니 셀 수 없는 수많은 관광 인파들이 산마르코 광장에 움집 해 있었다. 산마르코 광장이 자리한 이곳에 산마르코 대성당을 비롯하여 궁전들은 이미 13세기에 완성되었다. 산마르코광장은 베니스의 중심지역으로 베네치아 수호성인 테오도로가 창을 들고 있고 날개달린 청동 사자상이 특색으로 보여주는 장소이다. 거대한 건축물 두칼레 궁전은 미술관 국립도서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하여 물의 도시에도 어김없이 눈요기를 해주고 있었다. 호숫가 주변으로는 기념품 가게와 카페들이 즐비하다

좁은 수로 골목골목을 누비는 관광용 나룻배 곤돌라 사공이 혼자 배를 젓고 서너명이 타는 배로 30여분을 골목 수로를 누비며 다니는데 빼곡한 건물들이 보통 4층 이상으로 우선 식수와 화장실 그리고 저 사람들은 물의 도시에서 무엇을 해서 먹고 사는지 갑자기 궁금하였다. 카페와 주점 공원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큰 수로를 주로 다니는 수상택시를 탔다. 콘도라는 일반 주택들이 있는 건물을 다니지만 수상택시는 비교적 커다란 건축물들이 있는 대 수로를 다녔다. 새로운 건축물이 보일 때면 과거에 유명한 누가 살았고 누가 머물렀고 지금은 뭐하는 곳이라고 설명 해주는데 하나도 기억할 수 없었다.

늦은 오후 육지로 나와 Ducale Hotel 호텔에 도착하였다. 전차선 있는 2차선 차도에 호텔이 있어서인지 주차장이 협소하여 골목길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서 도착했다. 출발 할때 부터 발생했던 두드러기 피부병이 좀 잦아들었지만 기침 감기는 여전했다, 유람선투어 그리고 찬바람 또 추운 호텔에서 잠을 자서 그런지 사람을 좀 지치게 만들었다. 밤에는 추워서 그런지 다리에 쥐가 나서 고통이 심 했다. 어젯밤에는 상태가 더 나빠지는 듯하여 여행을 포기하고 귀국하고 싶었지만 쉬운 일이 아니기에 오기로 버텼다. 그런데 오늘은 변비가 있어서 아침을 먹지 못하고 피렌체에서 변비약을 8유를 주고 샀다.

 









*여섯째날_ 베니스에서 피렌체

인구 40만의 피렌체는 영어 지명으로 플로렌스 꽃의 도시 예술의 도시 사랑의 도시로써 한 때는 이탈리아의 수도로써 각 분야에서 다양한 지위를 누리며 긴 역사를 이어왔던 곳이다. 피렌체는 가보지 않았더라도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영화에서 도시의 여러 장면이 화면에 피사 되어서 한 때는 꼭 여행을 가보고 싶었던 도시였다.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우리가 익히 많이 알고 있는 이름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단테, 갈릴레오가 있고 그외 목적만 정당 하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군주론의 마키아벨리와 두오모 성당을 건축의 르네상스 건축의 선구자 브루넬레스키가 있다.

투어 6일째 오늘은 피렌체를 가기위해 아침 일찍 출발하여 베니스에서 3시간이 걸렸다. 우선 우리가 도착한 곳은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이곳은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작은 공원과 중앙에 다비드 조각상이 있다. 미켈란젤로 언덕이라고 해서 미켈란젤로가 무언가 했지 않았나 생각했지만 그가 만든 다비드상 복제품만 이곳에 있을 뿐이다. 다비드상은 원래 피렌체 성당을 위해서 1501년에 조각한 것으로서 건장한 다윗이 돌팔매 끈을 왼편 어깨에 메고 골리앗이 다가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그가 만든 원작품은 별도의 장소에 보관되어 있다.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강 두오모성당 과 베키오다리와 베키오궁전이 한 눈에 들어 온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는 시내의 모습은 꽃의 도시 예술의 도시라 부를 만큼 맑은 하늘과 함께 그냥 평화스럽고 아름다웠기에 마치 내 집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젔다 . 깨끗한 맑은 공기와 함께 낭만이 가득한 도시 피렌체라는 말을 따로 설명이 없어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 말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유유히 흐르고 강 양쪽에 즐비한 건축물이 강을 내려다보며 문화를 피웠던 한때를 추억한다. 그런데 1966년 아르노 강이 범람하여 피렌체가 많은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시내로 들어오는 골목길 곳곳에 고풍스러운 장식과 그림들이 걸려 있었는데 주택들이 대부분 300년 이상 된 건축물이라고 한다. 시뇨리아 광장에서 피렌체 시내 투어가 시작되었다. 수세기동안 피렌체 정치·사회적 중심지 시뇨리아 광장에는 카페 테라스가 있는 휴게 장소와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이 있다.

또한 피란체를 일으킨 코지모데 메디치의 동상과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와 그외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 모조품들이 있다. 베키오 궁전은 13세기때 요새로 지었던 것으로 지금은 시청 건물로 쓰인다고 한다, 정문에는 피렌체공화국 문장을 지닌 사자상이 있고 건물 중앙에는 높이 94m의 종탑이 있다. 광장 중앙에는 돌바닥에 박혀 있는 둥근 금속이 있는데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가 부패한 교회를 비판하다 화형에 처해진 곳을 표시한 것이라 고 한다. 시뇨리아 광장에서 좁은 골목길을 따라 200m 정도 걸어 내려오면 아담하고 은은한 색의 느낌을 지닌 잘 균형잡힌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산타 크로체 성당이 있다.

1294년 아르놀포 캄비오가 기공 1442년에 헌당된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산타 크로체 성당은 프란체스코파의 고딕 성당으로 그 규모가 두오모 성당만큼 크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정결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13세기에 지어진 고딕양식으로 성당 내부 지하에는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마키아벨리등 피렌체 출신 유명 인사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피렌체의 대표 시인 단테는 기념비만 있다고 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전설적인 명언과 함께 천문학의 상징이 된 갈릴레오는 피렌체 출신이다. 망원경을 발명하여 폴란드출신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지만 1633년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지지한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로마교회의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 갈릴레오는 살기 위해 지동설을 부정하고 천동설을 지지하는 내용의 속편을 저술하겠다고 자진 맹세한다. 그리고 속편을 쓰기 위해 피렌체 옛집으로 돌아온 갈리레오는 죽음을 맞아한다.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은 피렌체가 낳은 미켈란젤로, 갈리레오 갈릴레이, 마키아밸리 등이 잠들어 있는 무덤이 있는 성당이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시인 단테가 1265년에 태어난 생가를 찾았다. 13세기 당시 모습 그대로 내부에는 작은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지만 들어가 보지는 못 하였다. 피렌체의 당파 싸움에 휘말려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당한 단테는 1321년 라벤나 영주 폴렌타의 외교사절로 베네치아에 다녀오는 길 사망하여 라벤나에 묻혔기 때문에 성당에는 단테 기념비만 있다고 한다. 단테의 신곡은 그가 9살때 첫눈에 반한 베아트리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24살에 죽을 때까지 사모한 그녀를 모델로 하여 인간의 속세와 운명을 심오한 시각으로 크게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의 3편으로 나누어서 각 부마다 33개의 곡으로 40여년에 걸처 쓴 것으로 추정되며 단테가 죽기 바로 전 1321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학창시절에 신곡을 읽어보긴 했는데 뭔가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많았던 듯 했다. 특히 이노르강에 있는 베키오 다리는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나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된 곳이라 하여 피렌체의 연인들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장소로 알려 있다.

그래서 냉정과 열정사이 영화에서도 이 다리가 연출이 되었는데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아르노강의 저녁노을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고 한다.

이탈리아는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주교성당을 두오모(duomo)’라고 부른다. 두오모 성당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 현재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에 뒤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가이드 왈 이집트는 가장 나중에 가라고 했는데 피라미드를 먼저 보게 되면 다른 것들이 시시하게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하며 마찬가지로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을 보고 다른 성당을 보면 시시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아름다운 두오모 성당은 위용스런 자태로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인파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성당은 위용스런 그 자태였다. 다른 색을 가진 대리석 무늬 조각조각 잘라 붙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수십 년을 공 들여 만들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순백의 대리석, 모자이크 벽체, 아기자기한 조각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거대한 갈색 돔 지붕이 곱고 찬란하여 그래서 두오모 성당은 아름답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렸다. 1292년에 착공하여 1436년에 완공되기까지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많은 건축가와 미술가들이 참여 했다. 특히 높이 106m의 돔은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의 설계가 공모에 당선되어 1420년 착공후 직접 14년간 돔 공사를 했는데 그의 사후인 1463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피렌체의 지붕이라고 하는 아치형 돔은 피렌체 시내 외진 곳 에서도 잘 보일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하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가 이곳에서 촬영되어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곳이다 피렌체에서 중세회화 복원사로 일하고 있는 준세이는 평생 잊지 못할 여자가 있다. 두오모 성당은 연인들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 이였다. 사랑의 약속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던 그에게는 10년전 사랑에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두오모 성당 전망대 쿠폴라 계단을 올라 왔지만 냉각의 감정을 오랫동안 간직했던 두 사람에게는 낯설기만 하였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피렌체 시내의 모습이 영화에서 오래 동안 기억이 되었다. 아무튼 긴 시간 줄을 서서 기다려야 올라갈 수 있는 힘든 곳이기에 패기지 여행자들에게는 시간이 부족하다하여 그냥 지나치며 멀리서 바라보았다.

 












*일곱째날_ 폼페이 소렌토

패키지 관광은 언제나 느긋하게 구경할 시간적 여유가 있을 수도 없고 그저 가이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졸졸 따라 다니는 게 보편적인 여행이다. 마음에 드는 좋은 곳이 있어 잠시 머뭋 거리거나 또는 사진 한 컷 찍고 나면 벌써 뒤쳐져 버리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일행을 놓치지 않는다. 그것도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일행을 잃어버리면 당황하게 된다. 전화 통화도 할 수 없는 곳이기에 더욱 난처하게 만들 때가 간혹 있다. 식사도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냥 주는 대로 먹는 게 보통이고 혹여 식성이 까다롭다면 커다란 문제가 생긴다. 유럽은 석회암 지대라서 당연히 물은 사 먹어야 한다. 투어일정 때문에 때론 아침 일찍 또는 밤늦게 호텔에 들어 올 때도 있어서 힘들어 보일 때가 있다. 그래도 거금을 주고 모처럼 외국을 나왔으니 참고 견디고 그래야 한다, .

여행이 이제 종반으로 접어들었다. 로마에서 7시에 출발하여 폼페이까지 2시간 30분 걸렸다. 폼폐이 베수비오화산은 나폴리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멀리서 보면 낙타모형이다.

해발 1281m로 수십번 화산을 품어냈던 활화산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멀리서 부터 보이는 베수비오화산은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듯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보였으나 1944년 분출을 끝으로 현재는 멈춘 상태이지만 여전히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다고 한다. 서기 798월 베수비오화산이 폭발을 하면서 로마제국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 폼페이가 화산재에 묻혀버렸다고 한다. 하늘에서 비오듯 쏟아져 내린 엄청난 양의 흙과 돌 그리고 고온 가스와 열구름에 질식하여 약 2,000여명의 사람들이 도시의 운명과 함께 했다고 한다. 당시 정말 얼마나 처참 했을까마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때의 모습은 아비규환 이었을 것이다.

그 슬픈 역사를 모르고 지내다가 폼페이가 다시 등장한 것은 1594년 폼페이를 가로 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밝혀지게 되지만 당시는 발굴하기에는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748년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가 독점 사업으로 발굴을 시작 했지만 정밀한 원인의 조사도 없이 약탈과 다를 바 없이 유적들이 모조리 프랑스 왕궁으로 실려가 버렸다고 한다. 아마 자기들의 슬픈 역사가 아니니까 그랬을 것이다. 이후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폼페이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하여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하게 된다. 이곳에서 나온 출품들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자료로써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서 보니 마치 전쟁의 폐허처럼 황량하게 서있는 건물들의 잔해가 그 당시를 말해주듯 했다. TV에서 보았지만 실제로 와서 보니 번창했던 로마제국의 유물과 문화재들이 산재했을 것으로 불행했던 과거의 역사들이 현재 와서는 후세들에게 관광의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로마제국 귀족들의 휴양지로 사랑받던 도시였다고 하는데 생활문화 수준은 상당했다고 한다. 건물하나마다 장소하나마다 이전에 무엇을 했던 장소였다고 당시의 문화수준도 상당했다고 한다. 발굴과정에서 수집된 여러가지 생활물품을 현지 창고에 그대로 그냥 보관한 것도 있고 그리고 화산 폭발 당시 모습 그대로 사람이 굳어버린 형태도 있었다. 처첨했던 2천년 전 비극의 현장을 관광객으로 보고 있노라니 정말 아이러니한 세상이었다. 기원전 도시국가로 출발한 로마가 유럽전역은 물론 아프리카와 중동지역까지 수백년을 지배했던 로마제국은 모든 유럽 문명의 기초를 만들어서 현대까지 영향을 미친 당대는 최강국이었다. 당시의 슬픈 역사를 찹찹하게 관람하는 뒤로하는 시간 여행을 마치고 점심식사로 이태리의 스파게티와 피자를 맛있게 먹었다.

폼페이 역에서 약 30여분 전철을 타고 소렌토에 도착하였다. 소렌토까지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열차 차장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작은 도시의 어우러진 해안풍경들이 마구 지나갔다. 이곳은 돌아오라 쏘렌토의 유명한 노래가 있다. 바로 1902년 자신의 호텔에 묵었던 수상에게 쏘렌토에 우체국하나만 지어 달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시켜 노래를 만들어 나폴리가요제에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저 바다여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 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고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멀리 떠나간 벗이여 나는 홀로 사모하여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말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전철역에서 내려 해안 절벽사이로 난 계단 길을 따라 해안 선착장으로 갔다. 가는 길이 좁고 불편했지만 짙푸른 물결의 바다내음이 코끝으로 들려왔다. 선착장에는 카프리 섬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윽고 배가 출발하자 50미터 이상의 깎아지른 절벽의 도시 쏘렌토가 눈에 들어오고 이어서 폼페이 화산 그리고 나폴리 항구가 눈에 들어온다. 40여분 배를 타고 카프리 섬에 도착했다.

카프리 섬은 쪽빛 바다와 푸른 하늘 언덕 절벽위로 아름다운 자연과 하얀 집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호들은 카프리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배에서 내리자 섬 초입에 있는 상가를 비롯하여 카페에는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걸 보니 이탈리아 남부 최고의 휴양지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선착장에서 버스를 타고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가는 길 좁고 꼬불꼬불한 도로를 차동차끼리 스치듯 운전하여 30여분 후 케이블카를 타는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어서 1인승 케이블카를 타고 20여분 올라가 전망대에 도착했다. 589m의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차가운 바닷바람 때문에 모자를 써야 했다. 전망대에 도착을 하니 역시 강한 바람 때문에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지중해 바다가 펼쳐져 있는 카프리 섬의 주위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지 케이블카 안전요원들이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선착장부근 이곳저곳 돌아 다니며 꿈의 카프리섬을 관광하고 끝내고 훼리편으로 출발하여 세계3대 미항이라고 소문난 나폴리에 도착하였다. 나폴리항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유람선이 정박해 있었고 내 쪽으로는 중세 성이라고 하는 누오보성이 인상적으로 한 눈에 들어왔다.

기대했던 세계3대 미항 나폴리는 투어 일정이 없어서 그냥 지나쳐야 했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가이드로 부터 예전의 아름다운 나폴리가 아니라고 한다. 나폴리는 도시 여기저기에 쓰레기더미가 생겨나 더러운 도시이고 물류와 유통은 중국인에게 넘어갔고 마피아와 정치가 이권투합이 만연하여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라고 고대 역사를 가진 이태리가 지금은 많이 위축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1980년대 있었던 아파트 옥상에 TV안테나가 거미줄처럼 있는 것을 보며 사실은 좀 의아했다. 국민소득이 우리보다 조금 높은 것으로 지표상 되어있지만 실질경제는 우리보다 못하다고 현지 가이드가 소개를 하며 이곳은 인터넷 속도가 느려 아이들이 깨임을 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이제 오늘밤을 마지막으로 서유럽여행 일정이 며칠 남지 않았다.


폼페이 베수비오화산










                                                                                                                                          나폴리 항에 있는 누오보성

*팔일째 _ 바티칸시티

이태리에서 여행 마지막날 오늘은 교황청에 있는 바티칸 박물관 가는 날 호텔을 출발하여 로마로 들어오니 시내는 차가 밀리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티칸시티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사람들로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미 계획된 여행객들이기에 비가와도 우산을 들고 줄을 섰다. 보통 두 세시간 이상 줄을 선다고 하는데 오늘도 한 시간을 기다린 것 같다. 소지품과 몸을 검색해야 입장을 할 수가 있으니 시간이 정체 할 수밖에 없다. 박물관 입구로 향하는 성벽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는데 출구로 사용되는 문 위에는 미켈란젤로와 그의 제자 라파엘로의 조각상이 보인다. 높이 10여미터 장벽으로 둘러싸인 로마 교황청 바티칸 시국은 1929년 라테란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으로 부터 주권을 가진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 1000여명의 시민권자와 1000여명의 스위스 수비대가 있다고 한다. 바티칸을 방문하는 목적은 거의 대부분 박물관을 보기 위한 것으로 로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여행 장소이다. 이곳에는 고대 로마 시대의 유물과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최고 걸작들로 손꼽히는 작품들이 무수히 많다고 한다. 역대 교황의 궁전으로 사용되던 바티칸 궁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공개한 것으로 소장된 유물만 며칠 동안 봐도 모자랄 만큼 방대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없는 일반 여행객들은 가이드에게 맡길 수 밖에 없다.

바티칸 궁에는 총 1400개가 넘는 방들이 각각의 건물에 나뉘어져 있는데 일부만 공개한 것이다. 각종 그림을 모아 놓은 회화 전시관, 미술관, 이집트 전시관, 지도방등 모두를 전부 익히기에는 시간도 모자를 뿐만 아니라 보통 머리로는 세세하게 모두 기억 할 수가 없다. 방대한 자료가 웅장한 박물관에 설치되어 일반에게 공개하고 관광객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그저 감탄할 뿐이다. 학교에서 배운 천지창조와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며 그들이 남기고 간 작품의 아름다운 예술성에 감탄하고 그리고 대단한 역작을 수백년 간 잘 보존하고 관리함에 있어서 놀라지 않을수 없다. 깊은 관심과 학문적 연구자가 아니라면 그냥 한번 보고 스칠뿐 다른 나라의 역사 유물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 사실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 같다. 비를 맞으며 밖에서 부터 길게 줄을 서고 그리고 여러가지 복잡한 절차를 밟아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바티칸박물관 안에 들어섰다.

그런데 입구에서 가이드가 그림을 여러장 복사해서 나누어주며 20여분 이상 길게 설명을 한다. 그가 나누어준 그림은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정화로 실내 들어가면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런다고 하며 박물관 바닥에 주저앉아서 들었다. 시스티나 성당안에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산드로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이 그린 프레스코 벽화가 구석구석에 그려져 있다.

천장화는 당시 성당 천장에 균열이 생기고 오래된 장식이 훼손되기 시작하자 교황 율리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지시하여 1508년에서부터 4년간 성당 천장에 12,000점의 그림을 그렸다. 크기는 41.2 X 13.2 m 크기로 성당 천장 중앙에는 창세기의 장면을 프레스코로 재현한 아홉 점의 그림이 띠 형태로 그려져 있었는데 찬란한 색체감이나 입체감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실제 그림을 보면 그 높은 천정에 그림을 그리려면 얼굴에는 물론 온몸까지 온갖 물감이 흘러 내렸을 것은 물론이고 온몸이 쑤시는 고통스런 작업이었을 것이다.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여 거대한 천장화를 그린 미켈란젤로 그의 속내는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느꼈던 건 아니었을까?

온 세상 사람들이 무슨 그림을 그렸는가를 보려고 달려왔고 그것을 보고는 너무도 경탄하여 할 말을 잊은 채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하는데 정말 대단한 걸작의 작품이다. 특히 수백명의 실존 인물들이 실제의 모습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는데 이제까지 본 일이 없는 거의 압도적인 거대한 스케일로 제시된 가장 거창하고 야심찬 화려한 장식이었다. 우찌 되었던 바티칸 박물관에서 한시간 이상을 보내고 다른 몇 곳을 더 들렸다가 성배드로 성당으로 왔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티칸성당이라고 부르며 종교성과 역사성 예술성 때문에 세계적인 순례 장소로 유명하며 또한 르네상스부터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계의 거장들이 주임 건축가 직책을 계승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건축 작품으로서 당대의 가장 거대한 건물이라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내력은 예수가 죽은 후 여러 나라를 돌며 전도하던 베드로가 네로 황제에 의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된 장소이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거대하고 장엄한 공간과 호화로운 장식에 압도된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미켈란젤로의 걸작 피에타가 있다. 미켈란젤로가 24세 때 제작한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가 성모의 팔에 안긴 모습으로 그가 유일하게 서명을 남긴 것이다. 바티칸 박물관에는 수천 명이 있어서 사람들 틈에서 그냥 밀려가듯 다녀야 했다. 그러니 보는둥 마는둥 일행을 따라가기 바빴다. 이제 성 베드로 광장으로 나오니 비는 좀 그치고 다시 날씨는 맑았다. 광장에 들어서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양쪽에 서 있는 대리석 원기둥이 284개가 각각 양편에 나란히 서 있다. 그 위에는 성인의 모습이 3.24m 대리석 조각상으로 140개가 서 있다. 화가이자 조각가인 베르니가 설계하여 1667년에 완성되었다. 광장은 폭이 246m이며 대성당의 입구까지 300m 또한 광장 가운데에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가장 숭배했던 태양신 라(Ra)를 상징하는 기념물 오벨리스크가 있다. 이집트를 침략했던 나라들은 그곳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가져가 자신들의 도시에 세워다는데 고대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오벨리스크 양쪽으로 마데르나 와 폰타나가 만든 2개의 아름다운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이제 점심식사를 가는 중




이른시간인데도 비가 내리는데도 한 시간 이상 줄을 서서 시국에 입장해야 했다







입구에서 가이드가 그림을 여러장 복사해서 나누어주며 20여분 이상 길게 설명을 한다.

그가 나누어준 그림은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정화로 실내 들어가면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런다고 하며

박물관 바닥에 주저앉아서 들었다.










*팔일째 _ 로마시티투어

이제 본격적인 로마시내 투어로 산재해 있는 유적지를 빠른 시간내 보려면 벤츠투어를 하게 되는데 우리나라 스타렉스 같은 차량을 타고 좁은 골목까지 찾아가는 일정이다. 로마는 땅만 파면 고대 유적지나 유물이 나와서 지하철, 도로 건설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맨 먼저 포로 판테온 신전을 찾았다. 판테온은 기원전 27년에 신전으로 사용되다가 화재로 소실되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재건했는데 로마시대의 수만에 달하는 신들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안에 들어서면 제단이 마련 되어있다. 오쿨루스(Oculus)라고 하는 돔의 정상에 태양을 상징하는 7.5m의 구멍이 뚫려 있지만 비가 오더라도 구멍으로 빗물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원리는 막힌 공간에서 내부에서 상승하는 더운 공기로 인한 압력 차이로 빗물은 구멍으로 들어오지 않고 구멍 옆으로 지나가거나 자연증발하게 하는 구조로 공기가 통하는 곳은 천장의 구멍밖에 없기 때문이라며 다만 많은 비가 내릴 때는 빗물이 빠져나갈 배수 구멍이 바닥에 만들어져 있다. 그리스의 수학과 로마의 공학이 결합하여 건축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곳으로 2,000년을 이어 간 로마제국의 현존하는 건축물 중 가장 보존이 잘 되었다고 한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가 43.3m 바닥 지름도 43.3m으로 바닥의 지름과 천장까지의 높이가 같다고 한다. 또한 판테온의 지붕 돔 양식은 이탈리아 전역 어디에서나 성당이나 건축물의 훌륭한 교본으로 사용되었다. 신전 주위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복잡하다.

판테온 신전을 구경한 다음 찾아간 곳은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고대 로마의 가장 신성한 언덕이자 로마에 있는 7개의 언덕 중 가장 높은 언덕이다. 광장으로 오르기 위한 계단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착시효과로 유명한 곳이다. 광장에서 뒤로 돌아가 보면 포로 로마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서 사람들이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인들이 모여 생활하고 살던 중심지의 유적들이 함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의 중심지였으나 로마제국의 몰락 후 테베레 강이 범람하면서 흙속에 묻혔던 것을 18세기부터 발굴 작업을 시작해서 현재까지도 발굴하고 있는 곳이다.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지만 폼페이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건물 잔해들이 장엄하게 나열되어 있다. 포로 로마노 안으로 들어가 자세히 느껴보고 싶었지만 일정상 어렵고 언덕위에서 잠시 내려다보고 왔다. 무엇하나 자세히 머릿속에 넣을 수는 없었으나 정말 로마제국의 유적은 기이한 것이 많았다.

다음은 영화 벤허의 촬영 장소로 유명한 대전차 경기장으로 갔다. 차에서 내려 언덕에서 대전차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로마에서 최초로 건설된 전차경기장이면서 동시에 역사상 가장 큰 운동장이라는 상징성을 갖는 곳이었지만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황량한 공터로 변모하여 한때 이곳이 로마에서 가장 큰 대전차경기장이었던 곳이라는데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주민들에게는 더 이상 유적지가 아닌 공원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대전차운동장에서 100미터 내려오면 산타 마리아 성당 안쪽 벽면에 진실의 입이라는 조각물이 있다. 얼굴 앞면을 둥글게 새긴 대리석에 바다의 신인 트리톤의 얼굴을 닮은 가면 형태의 조각물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이 여기서 촬영되었기 때문에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기념 촬영하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좀 싱겁기한 장소지만 입장료는 받지 않고 따로 모금함이 있었다.

다시 옮겨간 곳 역시 곳은 트레비 분수 동전을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트레비분수에는 로마 여행 중 꼭 거쳐 가야 하는 동전던지기 장소로 유명하다. 분수는 고대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명한 처녀의 샘으로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에게 물을 준 한 처녀의 전설을 분수로 만든 것이라고 분수의 정면 오른쪽 위에 이런 일화를 담은 조각품물 신 포세이돈이 중앙에 있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동전을 던지며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다.

다음은 원형경기장 이라고 불린 콜로세움을 찾아갔다.

콜로세움을 지은 이유는 민심을 잡기 위해서인데 이전 황제였던 네로는 시내 한가운데 자신의 황금 궁전을 짓고 싶었으나 마땅한 땅이 없자 불을 지르는 묘수를 생각해 내고 그 누명을 유대인과 기독교도에게 씌워버리고 이어 높은 세금을 걷어 궁전을 짓자 민심은 네로에게 떠나게 되고 네로가 죽은 후에도 황제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로마시민의 민심을 되돌리고 황제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후임 황제였던 베스파시아누스가 시작한 일이란다.

이렇게 거대한 건물을 지을 수 있던 것은 뛰어난 로마의 건축기술 그 하나가 아치공법으로

단단한 콘크리트가 2천 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건축물이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에서 전쟁을 통해 데려온 10만이 넘는 포로들이 콜로세움 건축에 동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권력가에게 노예로 팔아 받은 돈으로 건축비를 충당했다고 하니 콜로세움은 노예의 노동과 노예를 판돈으로 지어졌다는 아픈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실제 콜로세움은 외벽 절반 이상이 뜯기고 많이 훼손되어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는 못 했지만 거대한 건축물의 경이로움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내부는 들어가 못하고 콜로세움 외곽에서 설명을 들었다. 콜로세움을 끝으로 유럽일정이 모두 끝났다

 

  

 













*구일째 _ 아부다비와 두바이

49일 저녁 6시에 로마투어 일정을 끝으로 서유럽 투어를 마치고 로마공항으로 출발하였다. 서울에서부터 시작한 감기는 8일 동안 버스에서 거리에서 가는 곳마다 내내 기침을 계속 하며 돌아다녔다. 5일째 부터는 정말 그냥 투어를 하지 않고 서울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몹씨 아팠지만 아직 기력이 남아 있는지 오늘까지 잘 견디었다. 내 자신의 몸에게 참아 주고 견디어 준 것에 대하여 새삼 감사하고 싶었다. 기침감기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기를 내내 속으로 빌었다.

무엇 보다도 숙소가 일급 호텔이 아닌 삼급 호텔이라서 그런지 내부 시설이 우리나라 옛날 여인숙처럼 허술하고 난방시설이 없어서 춥게 지낸것이 기침을 더하게 만들었다. 유럽 투어를 잘 마치고 이제 떠나게 되어서 다행으로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하지만 오늘 저녁 내일 저녁을 이틀을 비행기에서 날밤을 지내야 하기 때문에 잘 견디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기를 바랬다, 일주일 내내 잠이 모자라 피로가 풀리지 않은 것 같다. 일주일 이상 장기 투어는 나이가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하고 나이 들어서는 동남아 여행을 다니라고 만나는 가이드마다 하는 말이 기억난다. 로마공항에서 밤10시 비행기 타고 다음날 아침 5시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아부다비 공항에 도착 했다.

까다로운 수속 때문에 좀 늦게 나왔다. 날씨는 조석으로는 그리 덥지는 않은듯 했으나 낮에는 30도를 넘어 간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맨 처음 찾아간 곳이 세계 최대 규모의 자동차 테마파크 페라리월드 아부다비 야스섬에 위치하는 이곳은 이탈리아의 페라리가 자사의 페라리를 테마로 하여 놀이기구와 최고 속도의 제트코스타등을 즐길 수 있는 자동차 레저시설이다. 내부에는 쇼핑몰도 있다는데 너무 일찍 도착해서 외관만 구경하고 돌아 나왔다.

이어서 찾아간 곳은 석유생산으로 부자가 된 아랍에미레이트 수도 아부다비에 있는 세계에서 제일 크고 아름다운 이슬람교의 사원 세이크자이드 그랜드 모스크이다.

4만명이 한꺼번에 예배를 볼 수 있는 세계에서 5번 째로 크다고 한다.

버스서 내려 출입구에서 간단한 절차를 밟고 200여 미터의 지하 통로를 무빙워크를 이용하여 내부까지 들어갔다.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하얀 사원은 천상의 세계 같이 보였는데 유럽에서 보았던 성당과는 또 다르게 대단하다는 감탄사가 나왔다. 그들 만에 신에 대한 기도처가 만들어져 있으니 역사에서 종교가 없었다면 세상의 많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드넓은 대지위에 다양한 크기의 82개 흰색 돔이 위용을 자랑하는 세이크자이드는 무료 입장이라서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화려함을 느낄 수 있는 샹들리에 전등에 현혹되고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는 세계에서 가장 큰 카페트 꽃모양 벽면 조각은 우아함과 예술적인 가치를 더하게 해준다. 모두 오일의 힘이라고 하는데 유럽의 기독교 문화의 성당들에 견주어 이곳에서 만든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을 규모로 압도 할 만큼의 정말 돈을 들어부어 정성을 다 한 것 같다. 지난 일주일간 유럽의 성당을 구경해서 그런지 힌두교사원은 색다른 모습이었고 대부분 외국인이어서 관람은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다음은 아부디를 출발하여 2시간후 두바이에 도착했다. 1966년 석유가 발견되고 부터 두바이가 새로운 면모를 탈바꿈 되었다고 한다. 모래사막인 이곳에 세계 최고층 빌딩을 세우고 최고급호텔이 즐비하고 거대한 쇼핑몰 그리고 레저 시설등 기장 척박한 모래땅을 화려한 낙원으로 만들었다. 해안가 70km를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놓았다.

모두 오일달러의 힘과 두바이 사람들의 창의성과 인내가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거리의 꽃과 나무들도 오일달러로 물을 사다가 키운다고 하는데 배수관을 땅 속에 묻어서 시간대 별로 물을 공급해 주어 가꾸는 나무와 잔디 그리고 꽃 들이나 고속도로 양 옆에 늘어서 있는 최신식의 무수한 빌딩들도 모두 석유의 힘으로 유지된다고 한다. 미국의 라스베가스가 사막 위에 인간의 힘으로 세워진 도시로 지금까지 유명세를 탔다면 두바이와 아부다비에게 넘겨 줄 수밖에 없다. 시내로 들어서는 중간 구 시가지를 가는 길에 보이는 두바이의 명물인 액자 전망대 높이 150미터, 폭이 93미터나 되며 48억이 들었다고 한다.

두바이에서 찾아간 곳은 쥬메이라 해변으로 멀리 보이는 돛단배 모양의 세계적인 건축물 버즈알아랍을 조망하고 기념사진을 찍을려고 왔다. 지금은 4월초 바닷가 해변에는 알몸으로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다. 두바이의 상징적인 호텔을 멀리서 조망하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그저 행복하다. 다음은 세계 최대의 쇼핑몰이라고 자랑하는 두바이 몰을 방문했다. 이곳은 세계 부호들이 즐기는 곳이다. 이곳에는 스케이트장이 있고 스키 슬럼프까지 있다.

그리고 삼성건설이 건축한 세계 최고층 버즈칼리퍼를 조망하고 전망대에 오르면 정말 이곳이 사막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는 곳이다. 이곳에서 약 2시간을 머물다가 다음에 간 곳은 수상택시를 타고 금시장으로 갔다.

뉴욕 다음으로 크다고 하는데 대량으로 거래하는 곳이다. 두바이가 무역항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 할 때 부터 있었던 옛 건축물과 골목들이 남아 있는 곳으로 금과 향신료를 비롯하여 온갖 것을 팔아서 그냥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세계에서 유통되는 금의 1/3 이 이곳 두바이에서 거래된다고 한다. 그리고 기네스북에 등재된 60kg 넘는 타이바의 별이라는 반지도 구경했다. 금시장을 끝으로 투어를 마치고 날이 어두워지는 두바이를 출발하여 아부다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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