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려조선

송학출신의 호족 왕건

시인김남식 2008. 2. 11. 19:30

송악 출신의 호족, 궁예 밑에서 세력을 키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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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은 송악(松嶽) 출신 호족 왕륭(王隆)의 아들이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高麗史)》의 서문 중에는 고려의 문신 김관의(金寬毅)가 저술한 《편년통록(編年通錄)》과 민지(閔漬)가 저술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인용해 태조 왕건의 조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왕건의 조부 작제건(作帝建)은 당나라 숙종(혹은 선종)의 아들인데,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해 왕륭을 낳았다고 한다. 또한 왕륭은 체격이 크고 도량이 넓어 삼한을 통일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꿈에서 본 여인과 혼인해 왕건을 낳았다.

왕건의 탄생과 관련해서는 도선(道詵)이라는 고승이 등장한다. 도선은 왕륭이 새로 집을 지을 때 집터를 북쪽으로 잡으면 반드시 슬기로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다. 왕륭이 이 말을 그대로 따랐다. 곧바로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왕건이다. 이후 도선은 왕건이 17세가 되던 해 다시 찾아와 "삼국 말세의 백성들은 하늘이 정한 명당에서 태어난 당신의 구제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하고, 그 자리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법, 유리한 지형과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법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탄생 설화로 왕건의 건국을 신격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짐작된다.

왕륭은 송악 지역의 유력한 토호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러던 중 896년(진성왕 10), 왕륭은 돌연 당시 세력을 떨치고 있던 궁예의 밑으로 들어갔다. 이것을 단순한 항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당시 신라의 중앙 세력으로부터 독립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려던 궁예와 왕륭 세력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왕륭에게는 궁예의 군사력이, 궁예에게는 왕륭의 지략과 탄탄한 기반 세력이 필요했다. 왕륭은 당시 해상무역을 통해 재력을 갖춘 패서(浿西) 지역(지금의 황해도 일대)의 여러 호족들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궁예의 입장에서는 왕륭을 통해 그들을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확보하고 싶었을 것이다.

궁예가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고 지은 것도 패서 지역의 정서를 고려한 바가 크다. 패서 지역은 원래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 지역을 공식적인 영토로 양도받기 전까지 이 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의 통제 밖에 있었다. 그래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을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여전히 고구려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라는 국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궁예는 전국적인 세력 확장을 꿈꾸고 있었다. 그래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 역시 904년(효공왕 8)에 마진(摩震)이라고 고쳤다. 마진이라는 국호에는 고구려 부흥의 차원을 넘어서 확대된 대제국 건설을 꿈꾸는 궁예의 이상적 목표가 담겨 있었다.

한편 왕륭과 궁예의 연합은 왕건에게 무장으로서 자신의 역량을 펼칠 기회를 주었다. 궁예는 왕륭이 귀부하자마자 그의 아들 왕건에게 철원군 태수의 자리를 주었다. 또한 898년(효공왕 2)에는 송악의 성주(城主)가 되었는데, 이때 왕건의 나이 불과 20세였다. 왕건은 궁예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후고구려가 강원, 경기, 황해 지역의 대부분과 평안, 충청 지역의 일부를 점령하는 데 왕건의 공이 컸다. 특히 왕건은 후백제의 해상무역 중심지인 전라도 나주 지역을 공략함으로써 남해와 서해 해상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공으로 왕건은 913년(신덕왕 2)에 최고 관직인 시중(侍中)의 자리에 올랐다.

그즈음 궁예는 다시 한 번 나라의 국호를 고쳤다. 911년(효공왕 15)부터 태봉(泰封)이라는 국호를 썼다. 이는 나라의 세력이 점차 남쪽으로 확장되면서 후삼국의 통일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 궁예의 자신감이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태봉은 통일된 제국에 걸맞은 국호로, 후삼국의 모든 백성들이 화합하고 단결한 대국토를 건설하겠다는 목표와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궁예의 꿈은 본인의 실정(失政)으로 끝내 이루지 못하고 왕건에게 넘겨 주게 되었다.

 

궁예를 내리고 세운 나라 고려

궁예는 나름대로 신라와 차별화된 이상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하지만 포악한 성격 탓에 지방의 호족들을 효과적으로 결속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 틈에 궁예의 나라에서 왕건의 입지는 더욱 굳어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918년(경명왕 2)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무장들이 주축이 되어 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의 상황이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궁예 말년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태조의 집으로 와서 폐립(廢立)에 대해 의논하려고 하는데 후(왕건의 부인, 신혜왕후)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에게 말하기를 "채전에 새로 익은 오이가 있는지요? 따오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더니 왕후는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왔다가 다시 북편 창문으로 해서 가만히 휘장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때 여러 장군들이 드디어 태조(왕건)를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사를 표시하니 태조가 낯을 붉히면서 아주 굳이 거절하고 있었다. 이때 후가 급히 휘장 속에서 나와 태조에게 말하기를 "대의를 내세우고 폭군을 갈아 내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들의 의견을 들으니 저도 의분을 참을 수 없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손수 갑옷을 가져다가 남편에게 입혀 주었으며 여러 장군들은 그를 옹위하고 나가 그가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 《고려사》 권 88, 〈열전〉 제1, 후비 신혜왕후 유씨

왕건 자신의 결연한 의지보다는 주위에서 만들어 준 인상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왕건이 궁예의 밑으로 들어가 그의 군사력을 빌려 전공을 쌓아가기 시작하던 순간부터 건국의 운이 그에게서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미 대세는 왕건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궁예도 왕건이 들고 일어났다는 말만 듣고 지레 포기하고 도망치다 죽었다. 그 바람에 왕건은 쉽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무혈입성이었다. 왕건을 지나치게 믿고 그에게 너무나 많은 권력을 내 준 궁예의 패착이었다.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정했다. 왕건은 궁예가 신라의 영토를 정벌하면서 포로로 잡아두었던 사람들을 풀어 주는 등 대 신라 유화책을 써서 궁예와의 차별화를 꾀했다. 관제는 대부분 궁예 정권이 만들어 놓은 것을 그대로 가져다 썼지만 신라의 관제를 일부 빌려 오기도 했다. 이 밖에 빈민구제기구를 만들어 민심 안정에 힘쓰고, 지방 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지지 기반을 다졌다. 또한 나라의 도읍을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옮겼다. 왕건은 이렇게 궁예의 흔적을 지우고 새 나라의 역사를 열었다.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룩하다

고려 건국 이후 한반도에서는 고려, 후백제, 신라의 삼국 체제가 한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고, 삼국의 대립구도는 고려 대 후백제의 세력 다툼 양상이었다. 견훤이 세운 후백제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신라의 왕실까지 유린하는 등 크게 세력을 떨쳤다. 그에 비해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일부 지역을 차지고 있던 고려의 세력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

고려와 후백제는 종종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927년(태조 10), 후백제는 신라의 도읍을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웠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건은 정예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지금의 경북 달성군 팔공산)의 동수(桐藪)에서 후백제의 부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왕건의 부대는 크게 패했다. 이때 고려의 무장 김락(金樂)과 신숭겸이 전사하고 왕건은 몸만 겨우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입고 적을 유인했다고 한다. 후백제군이 신숭겸을 왕건으로 오인해 뒤쫓는 동안 왕건은 병사 차림으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고려와 왕건에게는 몹시 쓰라린 패배였다. 그래서 왕건은 이 전투가 끝난 후 두 장수를 기다리는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후 후백제는 고려와 신라의 왕래를 끊기 위해 경상도 일대를 공격했고, 의성(義城) 전투 등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한동안 고려는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 전세를 역전시키며 승기를 잡게 된 전투가 930년(태조 13)에 벌어졌다. 공산과 의성 전투에서의 승리에 고무된 후백제가 이번에는 고창(古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공격해 왔다.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가서 전투를 벌였다. 이번에는 유검필(庾黔弼) 등의 무장이 공을 세워 대승을 거뒀다. 안동 호족 장정필(張貞弼),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이 도왔다. 이들은 견훤의 패륜과 포악을 미워해 왕건을 도와 싸움을 이기게 했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경상도 일대에서 후백제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고려는 934년(태조 17)에 벌어진 운주(運州) 전투에서도 승리해 이북 30여 성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고려는 신라와의 유대를 더욱 강화했다. 신라의 도읍으로 직접 찾아가 경순왕을 위로하고, 그동안 후백제로부터 공격받았던 신라 영토의 백성들을 보듬었다. 그러자 신라의 민심이 모두 고려의 왕건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935년(태조 18), 마침내 신라의 경순왕은 더 이상 쇠락한 나라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고려에 투항했다. 왕건은 경순왕을 사위로 맞아들이고 후하게 예우했으며, 신라의 관원과 무장들도 고려의 조정에 등용해 대우해 주었다.

견훤이 막내아들 금강(金剛)을 후계자로 지명하자 신검(神劒), 용검(龍劒), 양검(良劒) 형제들이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했다. 견훤은 광주에 있는 사위 박영규(朴英規)의 도움을 받아 왕건에게 투항했다. 이듬해, 왕건은 견훤의 요구를 들어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 토벌에 나섰다.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은 먼저 투항한 견훤의 사위 박영규를 앞세워 일리천(一利川, 지금의 선산)에서 견훤의 장자 신검의 마지막 저항을 물리쳤다. 이로써 왕건은 고려 건국 19년 만에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했다.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한 고려는 이보다 앞선 926년(태조 9)에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게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을 흡수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한민족 유일의 국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북진 정책으로 고구려의 옛 영토 일부 회복

고려의 왕건은 발해, 신라, 후백제의 유민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통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지방의 호족들과의 혼인정책을 추진했다. 그 때문에 태조 왕건에게는 왕후를 포함해 부인만 29명이나 되었고, 그의 아들과 딸들도 모두 호족과 결혼시켜 사돈을 맺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은 처가의 성(姓)을 따르게 했다. 이러한 고려 왕실의 혼맥은 하나의 거대한 호족 연합체를 형성하였다. 또한 숭불 정책을 펼쳐 종교와 문화를 통한 내부 통합을 꾀했다.

한편 태조 왕건은 대외적으로 북진 정책을 펼쳤다. 이를 위해 고구려의 옛 도읍인 평양성을 수축하여 서경(西京)이라 부르며 북진 정책의 중심지로 삼았다. 또한 북방의 여진족을 토벌해 청천강과 영흥 지방에 이르는 고구려의 옛 영토 중 일부를 회복했다. 왕건은 집권 기간 내내 북진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했다. 그러나 요동 지역에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강력하게 버티고 있어서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못했다.

왕건은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켰다는 이유로 외교를 단절하고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942년 10월에 거란 사신이 낙타 50필을 보내었다. 왕이 거란은 일찍이 발해와 동맹을 맺고 있다가 갑자기 의심을 품어 맹약을 배반하고 그 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심히 무도한 나라로서 친선 관계를 맺을 나위가 못된다고 생각해 드디어 국교를 단절하고, 그 사신 30명은 섬으로 귀양을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 매어 두었더니 다 굶어 죽었다. - 《고려사》 권 2, 〈세가〉 제2, 태조 임인 25년

왕건은 죽기 전 개국공신인 박술희(朴述希)를 불러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겼는데, 그 안에도 거란족과 교류하지 말라는 내용과 서경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는 왕건의 북진 정책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는 것으로, 고려 초기 외교정책의 주요한 기조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 고려의 문신 이제현(李齊賢)은 충선왕(忠宣王)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우리 태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 아직 김부(金傅)가 항복하여 오지 않았고 견훤(甄萱)이 사로잡히기 전이었지만 가끔 서도(石)에 거동하여 친히 북방 변경을 순찰하였으니 그의 뜻은 역시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우리나라의 귀중한 유산으로 확신하고 반드시 이를 석권(席捲)하여 가지려고 한 것이었다. - 《고려사》 권 2, 〈세가〉 제2, 태조 계묘 26년

이 밖에도 〈훈요십조〉의 내용에는 불교를 진흥시키되 사원의 폐단과 증축을 경계할 것, 장자가 왕위를 잇되 어질지 못하면 덕망이 있는 왕자에게 왕위를 잇게 할 것,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원래 취지대로 유지할 것, 상벌을 분명히 하고 백성의 신망을 잃지 말 것, 차령산맥 이남이나 공주강 외곽 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등용하지 말 것, 백관의 녹봉을 함부로 증감하지 말 것,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차령산맥 이남이나 공주강 외곽 출신을 등용하지 말라는 조항이 훗날 호남 출신 인사들에 대한 차별의 근거로 악용됨에 따라 한때 〈훈요십조〉가 조작된 것이라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조작되었다기보다는 왕건이 후백제의 잔존 세력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말한 것을 후대에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호남 차별론으로 부각시킨 것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943년(태조 26), 송악의 호족 출신으로 궁예와 더불어 후삼국을 열었다가 한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했던 고려 태조 왕건은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조선의 역사학자 안정복은 왕건이 궁예를 쫓아내고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 정당하지 못했음을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 왕건은 후덕한 인품으로 백성들을 온화하게 보살핀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 계승으로 한 국가로써 취민유도의 정책들을 펼쳐 고려 사회의 안정에 기여 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호족 들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면서 호족 연합 체제의 형태로 시작이 된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왕의 권력이 강하지는 못하였는데 이러한 약점을 막기 위해 호족들이 마음대로 행사하지 못하도록 기인제도를 실시하였고 고려 시대는 특히 아직 지방 통치 체제가 활성화 되지 못하였고 조선 시대에서 전국 통치가 가능하였다. 그리고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신라인을 포용햇다는 점에서 태조 왕건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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