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조선왕릉 순례
1대 태조 - 건원릉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1408년(태종 8) 태종이 건원릉을 조성하였다.
태조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그해 6월 12일 검교 판한성부사 유한우, 전 서운정 이양달, 영의정 하윤 등이 원평, 봉성, 행주 등의 길지를 후보지로 내세웠으나 채택되지 못하였고, 6월 28일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의 검암에 산릉지를 정하였다.
7월 5일에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여 7월 말을 기하여 산릉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고 석실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는 9월 7일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아가 견전례를 행하고 영구를 받들어 발인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건원릉은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시대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거의 따르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전설에 따르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사직의 기초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하륜 등으로 하여금 자신이 묻힐 자리를 물색하게 했는데, 양주 검암산 기슭의 건원릉 자리에 신후지지(身後之地:생전에 미리 잡아두는 묏자리)를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 올라 멀리 자신이 묻힐 능자리를 굽어보면서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 하여 이 고개를 망우(忘憂:근심을 잊음)고개라 부르고 동네를 망우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릉(貞陵)은 조선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의 계비로 방번(芳蕃)·방석(芳碩) 두 왕자와 경순공주(慶順公主)를 낳은 신덕왕후(神德王后 ?~1396) 강씨의 무덤이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8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주한영국대사관 자리 추정)에 능역이 조성되었으나 다른 왕릉과는 달리 정릉만이 도성 안에 있고, 너무 크고 넓다 하여 도성 밖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이는 태조가 신덕왕후 소생인 여덟째 왕자 방석(芳碩)을 세자로 정한 것에 대한 태종의 사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태종은 옛 정릉의 일부 석조물들을 홍수로 유실된 광통교를 다시 세우는 데 갖다 쓰고, 정자각도 없앴다. 능은 묘로 격하되어 일반 무덤과 비슷해졌고,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강등되었다. 1669년(현종 10)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신덕왕후는 왕비로 복위되었고, 무덤도 왕후의 능으로 복원되었다.
정릉은 다른 왕후의 능에 비해 빈약한 편으로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없으며, 상석과 상석을 받치는 고석(鼓石)과 장명등, 망주석, 석양(石羊)·석호(石虎)·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그 중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릉(현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에서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도 높다.
3代 太宗 - 憲陵
헌릉은 사적 제194호로(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42) 원경왕후가 1420년(세종 2) 7월 10일 수강궁(창경궁) 별전에서 태종보다 일찍 세상을 뜨자, 태종의 명으로 같은 해 9월 17일 대모산 기슭에 건좌손향으로 왕후의 능을 조영했는데, 억불정책으로 원찰을 세우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2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아들 세종은 같은 해 9월 6일 어머니 원경왕후의 능 옆에 봉릉을 따로 만들어 아버지를 모시고 난간으로 연결하여 쌍릉을 조성하고 곡장을 둘렀다.
능원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손상된 원래 신도비와, 1695년(숙종 21) 하나 더 증설하여 세운 것이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조의 건원릉, 정종의 후릉, 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 때까지 세웠다가 그 이후에는 완전히 폐지했는데, 현재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과 헌릉에만 볼 수 있으며 세종의 영릉 신도비는 서초구 내곡동 원래의 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73년에 발굴하여 현재의 청량리 홍릉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입구에 있다.
명빈묘(明嬪墓)는 한성판윤(漢城判尹)과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낸 안정공(安靖公) 김구덕(金九德)의 딸인 명빈의 무덤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출생 연도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1411년(태종 11) 11월 명빈으로 책봉된 뒤 1479년 6월 5일 죽을 때까지 태종~성종 7대에 걸쳐 내명부(內命婦)를 지켰으나 후사는 없었다.
둘레돌과 곡장(曲墻:능이나 무덤 등의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은 없으나 새롭게 정비된 탓인지 봉분이 비교적 크게 쌓여져 있다. 봉분 앞에는 비갓을 올린 묘갈(墓碣, 높이 104cm)이 있고, 그 앞으로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이 있으며 혼유석(魂遊石:혼이 나와서 노는 돌이라는 뜻)은 없다. 상석 좌우에 댓돌이 있으며, 양 옆에는 문인석(文人石, 높이 186cm) 1쌍이 있다. 비석 앞면에는 '明嬪金氏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조성 시기는 1479년(성종 10) 이다.
4代 世宗 - 英陵
조선왕조 제4대 임금 세종은 22세에 즉위, 이후 31년간(1418∼1450) 재위하면서 실로 많은 업적을 쌓아 태조 이성계와 선왕인 태종에 이어 조선 초기 3대 성군으로 꼽힌다. 한글의 창시를 비롯해, 측우기 등 과학기기의 발명, 아악의 정립, 팔도지리지의 발간과 고려사 편찬, 그리고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는 등 건국 초기 나라의 기초를 정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여 대왕으로 칭송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가 묻혀있는 영릉(英陵) 역시 태조의 건원릉(동구릉의 원능)과 함께 조선 왕실의 손꼽히는 명당 터로 알려지고 있다. 여주벌의 젖줄과도 같은 남한강 물줄기가 둘러있고, 나지막하게 야산들이 산군을 이루며 넓은 여주벌을 장식해 성군의 능역다운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능은 주산인 북성산의 정남향으로 앉았고 좌청룡 우백호가 확실하며 노송 아래로 넓은 잔디밭과 송림 사이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3㎞나 되어 주말 나들이를 겸한 산책길로도 아낌을 받는다.
1975년 성역으로 지정, 더욱 잘 가꾸어진 경관은 넓은 잔디와 무성한 노송림이 일품이며,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전형적인 명당이다. 능 이외에도 기념관인 세종전에는 대왕의 업적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고, <용비어천가>, <훈민정음 언해> 등 훈민정음으로 펴낸 서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종전 뜰의 잔디밭에는 측우기와 자격루 등의 과학기기들도 전시되어 자녀들의 역사 학습장으로도 더없이 좋은 장소다.
영릉(英陵)은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5代 文宗 - 顯陵
현릉(顯陵)은 조선 제5대 문종과 왕비 현덕왕후(顯德王侯) 권씨(權氏 1418~1441)의 능이다. 문종은 세종(世宗)의 맏아들로 태종(太宗) 14년(1414)에 태어나 세종 3년(1421)에 세자가 되었다. 세종 27년(1445)에는 세종의 명에 따라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세종 32년(1450)에 왕위에 올라 바른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여 백성의 신망이 두터웠고 부모에대한 효성도 지극했다.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4개월 만인 1452년 5월 14일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39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묘호를 문종(文宗), 능호를 현릉이라 했으며, 시호와 존호는 공순흠명인숙광문성효(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라고 올렸다.
현덕왕후는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權專의 딸로 세종 19년(1437)에 세자빈이 되었으나 문종이 즉위하기 9년전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현덕왕후는 단종(端宗)을 낳았으며 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후로 추존되었다.
부왕 세종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문종은 사후에도 부왕을 가까이 모시고자 대모산에 있는 영릉<여주로 천장하기 이전의 세종릉> 오른 쪽 언덕을 미리 장지로 정해 두었으나 구덩이를 파보니 물이 솟고 바위가 있어 취소하고, 같은 해 9월 1일 이 곳 건원릉 동쪽 산의 계좌정향(癸座丁向)에 안장했다.
1457년(세조 3년) 단종 복위사건에 현덕왕후의 어머니 최씨와 동생 권자신이 연루되어 처형되었고, 이 일로 한 때 현덕왕후가 폐위되고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었고 소릉이 파헤쳐져 바닷가에 장사지내는 수난을 겪었다.
현릉은 동원이강(同原異岡)의 양식으로 조영되어 있다. 같은 능의 이름 아래 같은 능역에 있지만 왕과 왕비의 능을 가각 다른 언덕 위에 단릉(單陵)처럼 만든 것이 동원이강이다.
이 경우 침전에 안장된 시신의 좌우 팔을 기준으로 상하의질서가 전해진다. 살아 있는 사람의 경우는 상하 질서가 좌상우하(左上右下)가 되나 죽은 사람의 경우는 우상좌하(右上左下)가 되기 때문에 현덕왕후는 문종 유해의 좌하자리인 왼쪽 언덕에 안장되어 있다. 현릉에는 홍살문을 비롯하여 정자각, 비각 등을 하나씩만 만들어놓아 이 능이 동원이강임을 나타내고 있다.
능의 형식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표본인 구(舊)영릉 제도를 따랐으므로 병풍석의 방울과 방패 무늬가 사라졌고, 고석도 4개로 줄었다.
또한 건원릉과 헌릉에 있는 소전대(燒錢臺) 대신 정자각 뒤쪽에 예감을 만들어 놓았다.
6代 端宗 - 莊陵
단종(端宗)은 문종(文宗)의 장남으로 문종 원년 7월에 왕세자에 책봉(冊封)되고 부왕 文宗이 재위 2년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나이로 뒤를 이어 1452년 5월 18일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端宗 元年(1453)에 叔父 수양대군은 정인지,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황보 인, 김종서 등 端宗의 보필신(輔弼臣)을 죽이고 국권을 장악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단종 3년(1455) 端宗은 그들의 음모와 위협으로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세조 2년(1456) 端宗을 복위하려는 사육신 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이 사건으로 이듬해 상왕(上王)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됨과 동시에 영월(寧越) 청령포(淸冷浦)에 유폐(幽閉)되었다. 그 해(1457) 가을 금성대군(錦城大君) 유가 중심이 되어 단종을 복위하려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자 노산군(魯山君)에게 종사에 죄를 지었다는 구실로 서인(庶人)으로 폐하는 한편, 사약(死藥)을 내리는 등 죽음을 강요하니 10월 24일 17세의 일기로 최후를 마쳤다. 端宗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寧越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동강(東江)에 떠 있던 端宗의 주검을 몰래 수습하여 자신의 문중 땅인 이 곳에 암장하여 지금 능이 위치한 동을지산(冬乙旨山)에 매장하였다.
단종이 억울한 죽임을 당한 후로 60년의 세월이 흘러 죽은 단종의 묘를 찾으라는 중종(中宗)의 명이 있었지만(1516년) 또 다시 25년의 세월이 지난 중종 36년(1541년)에야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 호는 낙촌(駱村).중종 때 문과에 급제, 이후 대제학(大提學)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거쳐 밀원군(密原君)에 봉해진다)에 의해 그 묘소를 찾게 되었다. 전설에는 박충원의 선임인 일곱 명의 영월 군수가 부임 후 원인도 모르게 죽자(사실은 그들의 꿈에 단종이 나타나 자신의 묘소를 거두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더 이상 그 곳으로 부임하고자 하는 자가 없던 차에 박충원이 자원했다고 하며, 박충원은 자신이 단종의 묘소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에 자원했다고 전해진다.
노산군(魯山君)이 돌아가신 후 224년만인 숙종(肅宗) 7년(1681)에 대군(大君)으로 추봉(追封)되었으며 마침내 숙종 24년(1698)에는 복위되어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이라 하여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하고 능은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라 불리웠던 것을 '단종실록(端宗實錄)'으로 고쳐 부른 것도 그 때의 일이다.
능(陵) 양식은 가장 간단하고 작은 후릉석물(厚陵石物)의 양식을 따랐다. 특히 다른 능과 다른 점은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配享)하기 위하여 정조(正祖) 15년(1791) 왕명(王命)으로 장릉 밑에 충신단(忠臣壇)을 설치하였다.
장판옥(藏版屋) : 이 건물은 정조 15년(1791)에 건립한 것으로 端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忠臣位) 32人, 조사위(朝士位) 186人, 환자군노(宦者軍奴) 44人, 여인위(女人位) 6人을 합하여 268人의 위패(位牌)를 모셔놓은 곳이다.
배식단(配食壇) :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추모제단
영천(靈泉) : 이 靈泉은 제사를 지내는 우물로서 정조 15년(1791)에 郡守 박기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장릉 제정(祭井)으로 칭하게 되었다. 보통 때는 조금씩 샘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 때, 제향을 지낼 때는 물이 많이 용출(湧出)하였다. 우물의 구조는 사방이 돌담으로 둘러있고 우물 깊이는 1.5m 정도이고 화강석으로 정방형 모양으로 쌓아 올려져 있다.
엄흥도 정여각(嚴興道 旌閭閣) : 이 碑閣은 엄흥도의 忠節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忠臣 엄흥도가 영월호장(寧越戶長)으로 있을 때 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유배(流配)되어 관풍헌(觀風軒)에서 1457년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진 死藥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던져지자 端宗의 시신을 암장하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御命)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端宗의 시신을 거두어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도받고 있다.
순조 33년(1833)에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추증되었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사릉(思陵)은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의 부인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 宋氏의 무덤이다. 정순왕후는 세종(世宗) 22년(1440)에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태어나 단종 2년(1454) 1월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단종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457년 노산군(魯山君)으로 낮추어져서 영월로 유배됨에 따라 왕ㅇ비도 부인(夫人)으로 낮추어졌다. 부인은 멀리에서 같혀지내는 단종을 생각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으며, 단종이 돌아가신 뒤에는 동대문 밖 연미정동(燕尾亭洞)에 초가를 지어 정업원(淨業院)이라 이름짓고 그곳에서 지내면서 매일 절뒤 산봉우리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비통해 하였다.
중종(中宗) 16년(1521) 6월 4일 82세로 돌아가셨으며 대군부인(大君夫人)의 예로 장례를 지냈다.
숙종(肅宗) 24년(1698) 11월에 단종이 복위되자 단종의 신위와 함께 창경궁에 모셔졌다가 종묘 영녕전으로 옮겨졌고 무덤은 사릉(思陵)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그 후 영조(英祖)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써서 비와 비각을 정업원 터에 세우게 하고 산봉우리 위에 있는 바위에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을 친필로 새겨 놓았다.
7代 世祖 - 光陵
세조는 1417년(태종 17년) 9월 29일에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문종의 동생이다.
세조는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으며, 또한 무골이 장대하였다. 처음에는 진평대군(晉平大君)이었으나, 함평(咸平)대군, 진양(晉陽)대군 등으로 바뀌다가 다시 1445년(세종 27년)에 수양(首陽)대군으로 바꾸었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는 세종의명을 받아 불서(佛書)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를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1452년(문종 2년)에는 관습도감(慣習都監) 도제조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 5월에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은 측근 심복인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이듬해인 1453년(단종 1년) 10월 10일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문제는 세종이 자기가 적장자인 양녕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것이 마음에 걸려 병약한 문종을 왕위에 올린 데서 엄청난 비극이 싹튼 것이었다.
수양대군은 자기와 대립 관계에 있던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 등과 안평대군을 제거하고, 종국에 가서는 어린 조카인 단종 마저 죽인 참극의 주인공이다.
세조는 조선사에서 씻을 수 없는 천륜을 어긴 임금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었다. 그가 왕이 된 후 국정을 안정되게 수행하고 나라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지대한 공을 세웠으나 자기의 죄값에 늘 불안하여 불교에 심취하다 1468년 9월 7일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다음날 보령 52세로 수강궁에서 승하했다.
세조는 죽으면서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하니 석실과 석관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내려 광릉은 다른 왕릉과 다르게 만들어졌다.
1468년(예종 즉위년) 9월 25일에 예종은 선왕의 능호를 광릉, 묘호를 세조라 하고, 같은 해 11월 28일에 이 곳 주엽산 아래 자좌오향(子座午向:정북에서 정남향)의 언덕에 예장했다.
광릉은 같은 능역에 있지만 왕릉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단릉처럼 조영하는 형식인 동원이강의 능 형태이며, 두 능의 중간 지점에 정자각을 세운 최초의 능이다.
광릉의 원찰은 <선왕의 능을 받들어 모신다(奉護先王之陵)는 뜻으로>봉선사(奉先寺)로 되었다.
8代 예종(睿宗) - 창릉(昌陵)
창릉(昌陵)은 8대 睿宗(1450~1469)과 계비(繼妃) 안순왕후(安順王后, ? ~1498) 韓氏의 능이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아들로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19세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불과 14개월의 짧은 재위기간 동안 남이(南怡)의 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치적 격동을 겪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은 세조의 승하를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세조 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1469년 승하했다. 안순왕후는 우의정 청천부원군(淸川府院君) 한백륜(韓伯倫)의 딸로 예종 즉위년(1468)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연산군(燕山君) 4년(1498)에 돌아가셨다.
공릉(恭陵) : 8대 예종(睿宗)의 원비(元妃)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1461) 韓氏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셋째 딸이다. 세조 때 한명회는 영의정까지 오르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병약한 세자(덕종)가 죽고 세조의 둘째 아들(예종)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한명회는 1460년 그의 딸을 세자빈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그의 딸은 다음해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을 앓다가 17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했다. 장순왕후에 이어 예종도 짧은 재위기간을 마감하고 요절했다. 장순왕후는 아름답고 정숙하여 세자빈으로 간택된 뒤 시아버지인 세조에게 사랑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세조는 왕세자빈에게 장순(章順)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1470년 능호를 공릉이라 했고, 1472년 장순왕후로 추존(追尊)되었다.
9代 成宗 - 宣陵
성종은 추존된 덕종(德宗)과 소혜왕후(昭惠王后)의 아들로 1457년(세조 3)에 태어나 1469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1476년(성종 7)까지 세조비(世祖妃) 정희대비(貞熹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성종은 압록·두만강의 건주야인(建州野人)을 정벌하여 변방을 굳건히 하고, 《경국대전》,《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동문선》,《오례의》,《악학궤범》 등의 편찬을 통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였고, 유교사상을 정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함으로써 조선시대 초기의 전반적인 체제를 안정시켰다.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38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고, 1495년(연산군 1) 1월 14일 묘호를 성종, 능호를 선릉이라 하여 같은 해 4월 6일 지금의 선릉 자리인 광주부 서면 학당리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정현왕후는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딸로 1462년(세조 8)에 태어났으며 1479년(성종 10) 연산군(燕山君)의 생모인 윤씨가 폐출되자 이듬해 왕비로 책봉되었고 1530년(중종 25) 경복궁 동궁에서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고 10월 29일 선릉에 예장되었다.
그 후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었는데, 그 첫 수난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 일어났다. 『선조실록』1593년 4월 13일자의 기사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라는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의 치계와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치하게 하라.”는 선조의 명이 기록되어 있다. 1625년(인조 3)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 수리를 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능에도 화재가 발생하는 등 여러 차례의 수난을 겪었으나 정비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정현왕후 능
왕릉에는 십이지시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병풍석(屛風石) 12면을 세우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그 밖으로 양석(羊石) 2쌍, 호석(虎石) 2쌍과 무덤 앞에 상석(床石)을 배치하고, 양쪽에 망주석(望柱石) 1쌍을 세우고 3면의 곡장(曲墻)을 설치하였다. 한 단 아래에는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 가운데 명등석(明燈石)이 있고, 그 아래에는 무인석(武人石) 1쌍, 마석 1쌍이 세워져 있다. 왼쪽 언덕의 왕비 능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만 돌렸고, 대석주(大石柱)의 주두(柱頭)는 초기 난간의 부드러운 맛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밖에 제반 능상설(陵象設)은 왕릉과 같다. 두 무덤 언덕 아래에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이 있고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다.
왕과 왕비의 능이 동원이강식(同原異岡式)으로 배치되었다.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석실(石室)을 쓰지 않았으며, 제반 능상설은 국조오례의식(國朝五禮儀式)에 준하였다.
순릉(順陵)은 9대 成宗의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 韓氏의 능이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 딸로 순릉과 마주보고 있는 공릉의 장순왕후와 자매지간이다. 의경세자(덕종)의 둘째아들 자산군에게 출가했다. 효심이 깊은 예종은 세조의 장례를 치르면서 건강을 잃어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했다. 이때 아들 제안대군은 겨우 3세에 불과했고, 15세인 월산군은 병약하여 자산군(성종)이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다.
경릉(敬陵)은 德宗(의경세자, 1438~1457)과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 韓氏의 능이다.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으로 1455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20세에 승하하여 대군묘 제도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1471년 둘째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는 1455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아들 성종이 즉위하자 왕대비(인수대비)가 되었다.
소혜왕후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지기 위한 ‘내훈(內訓)’이란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소혜왕후는 손자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폐비, 사사 사건에 대해 보복하려 하자, 이를 꾸짖다가 연산군의 머리에 받힌 얼마 후 승하하였다고 한다.
10代 燕山君 墓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77에 소재하고 있는 연산군묘는 조선 제10대 연산군(1495∼1506 재위)과 거창군 부인 신씨(居昌郡 夫人愼氏)( ? ∼ 1537)의 무덤이다.
연산군은 성종 7년(1476) 성종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휘(諱)는 융(隆)이며, 어머니는 폐비 윤씨(尹氏)이다. 성종 14년(1483) 2월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성종 25년(1494), 12월 성종이 승하하자 19세에 즉위하였다.
젊은 임금이었지만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왜인(倭人)과 야인(野人)의 침입에 대비하여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제조하고, 변경지방으로의 백성들의 이주를 독려, 혹은 《국조보감 國朝寶鑑》,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등의 수정 같은 활약도 있었지만, 크게 잘못된 정치를 덮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연산군 4년(1498)에는 《성종실록》 편찬 때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고, 1504년에는 생모 윤씨(尹氏)의 폐비사건을 문제로 삼아 많은 사림학자들을 희생시킨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이러한 실정(失政)과 성품이 광폭함으로 인하여 연산군 12년(1506) 9월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의 주동으로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옹립되는 중종반정(中宗反政)을 당하여 왕위에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강화(江華) 교동(喬洞)에 추방되었다가 그해 11월 31세로 병사하여, 그 곳에 장사지냈다.
왕 또는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연산군은 비록 왕을 지내었으나 그 지위가 군(君)으로 강봉되었기 때문에 무덤을 묘(墓)라 하였다. 그 후 중종 7년(1512) 12월 부인 신씨가 상소하여 묘를 강화에서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선영(先塋)이며 연산군의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는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이듬해(1513) 2월 왕자군(王子君)의 예(禮)로 이장하고 양주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연산군의 부인 거창군 신씨는 영의정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며, 성종 19년(1488)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연산군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과 함께 폐출, 거창군부인으로 강봉되어 정청궁(貞淸宮)에서 거처하다가 중종 32년(1537)에 별세하였다.
묘의 시설은 대군(大君)의 예우로 장례하여 무덤, 곡장(曲墻), 묘비(墓碑) 1쌍, 혼유석(魂遊石)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장명등(長明燈) 1쌍, 향로석(香爐石) 1좌, 문인석(文人石) 2쌍, 재실(齋室)은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屛風石), 석양(石羊), 석마(石馬), 사초지(莎草地), 무인석(武人石) 등은 세우지 아니하였다. 연산군의 묘비 앞면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무덤이 만들어진 연월인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正德八年二月 二十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조선시대 전기 능묘 석물의 조형이 잘 남아있다. 묘역아래쪽에는 궁인 조씨 및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다.
11代 中宗 - 정릉(靖陵)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의 무덤으로, 1970년 5월 26일 선릉(宣陵;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과 함께 사적 제199호로 지정되었다.
1545년(인종 1) 서삼릉(西三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 능역에 있는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 오른쪽 언덕에 왕릉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 하여 현재의 위치(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131번지)로 옮겼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를 기용하여 정치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훈구파의 반발로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가 제거되었고, 이후 정치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성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현 왕후 윤씨이며, 비는 좌의정 신수근의 딸이다. 제1계비는 윤여필의 딸 장경 왕후이고, 제2계비는 윤지임의 딸 문정 왕후이다. 1494년(성종 25)에 진성 대군에 봉해졌다. 1506년에 박원종, 성희안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낸 후 왕으로 추대했다.
즉위 후 홍문관을 강화하고, 문신월과제와 사가독서제 등을 시행해 연산군 때의 그릇된 정치를 개혁하고자 했다. 특히 1515년(중종 10)에 조광조를 등용하여, 그가 주장하는 도학(道學)에 근거해서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현량과를 시행해 신진 사림 28명을 뽑아 중앙 정치에 참여시키면서 사림파를 중심으로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훈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519년에 훈구파인 남곤, 심정 등이 반정공신의 위훈삭제 문제를 구실로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이후 신진 사림 세력과 훈구 세력의 갈등, 훈구 세력 상호간의 세력다툼 등이 벌어지고 각종 옥사(獄事)가 일어나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면 태조의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정릉은 지세가 낮아 여름철 홍수 때면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2지신상 을 새긴 병풍석이 봉분을 두르고 있고, 그 바깥쪽으로 12칸의 난간석과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이 설치되었다. 석호(石虎)·석양(石羊) 각 2쌍, 상석, 망주석 1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무인석·석마 각 1쌍 등의 석물이 있다. 능원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이 있다.
온릉(溫陵)은 조선 제11대 중종(中宗)의 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 1487-1557)의 능이다. 왕후(王后)는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연산군(燕山君) 5년(1499)에 혼인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중종(中宗) 원년(1506)에 왕비가 되었으나 7일 만에 쫓겨났다. 명종(明宗) 12년(1557)에 71세로 궁궐 밖에서 자손이 없이 돌아가셨으며, 그 후 영조(英祖) 15년(1739)에 왕후로 복위되었다.
희릉(禧陵)은 조선 11대 중종의 제1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 윤씨의 무덤이다. 3개의 왕릉(희릉 ․ 효릉 ․ 예릉)과 후궁, 대군, 공주의 무덤들로 이루어진 서삼릉(西三陵, 사적 제200호) 경내에 있다.
장경왕후는 정비인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1507년 왕비로 봉해졌는데 세자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7일 만에 승하했다. 처음에는 헌릉(태종왕릉) 서쪽언덕에 조성했다. 그런데 중종의 부마가 된 김안로가 세자(仁宗)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기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옥사를 일으켰다. 그 중 하나가 천릉사건인데, 희릉 밑에 큰 돌이 깔려있어 불길하다 하여 중종 32년(1537)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1544년 중종의 유교에 따라 중종의 정릉을 희릉 옆에 조영하고, 정자각을 왕릉과 왕비릉 중간으로 옮겨 세우고, 왕의 능호를 사용했다. 그 후 1562년 문정왕후의 주장에 의해 중종왕릉이 지금의 삼성동(선릉 옆)으로 옮겨감으로써 다시 희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단릉(單陵)인 희릉의 석물 배치법은 조선 전기 양식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봉분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에 둘러져 있고, 봉분 뒤쪽으로는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이 설치되어 있다. 상석, 장명등, 망주석·1쌍·문인석 1쌍·무인석 1쌍·석마(石馬) 2쌍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태릉(泰陵)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尹氏 (1501~1565)의 무덤이다.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무덤인 강릉(康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문정왕후는 명종(明宗)이 인종(仁宗)의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왕후가 나라를 다스린 8년 동안 윤원형 등 왕후와 친척이 되는 신하들이 권력을 잡고 나랏일을 좌지우지하였다.
문정왕후(文定王后) 자신이 중종 옆에 묻힐 요량으로 장경왕후의 능 옆에 있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풍수지리가 안 좋다 하여 선릉(宣陵) 옆으로 옮겼다. 하지만 새로 옮긴 정릉의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자 결국 그 자리에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예장되어 중종 옆에 묻히려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태릉은 왕비의 단릉(單陵)이라 믿기 힘들만큼 웅장한 능으로,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봉분을 감싼 12면 병풍석에는 12지신상과 구름 문양을 새겼고,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중앙에 12간지를 문자로 새겼다. 봉분 바깥쪽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 상석과 망주석 1쌍을 세웠다.
봉분 주위로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시켰으며, 뒤쪽으로는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쌓았다. 봉분 아랫단에 문인석과 석마(石馬) 각 1쌍, 팔각 장명등이 있고, 가장 아랫단에 무인석과 석마 각 1쌍이 있다. 능원 밑에는 정자각 ·비각·수직방(守直房) 홍살문이 있다.
12代 仁宗 - 孝陵
조선 제12대 왕 인종(仁宗 1515~1545, 재위 1544~1545)과 인종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1514~1577)의 무덤이다. 3개의 왕릉(희릉·효릉·예릉)과 후궁·대군·공주의 무덤들로 이루어진 서삼릉(西三陵, 사적 제200호) 경내에 있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곳에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을 기려 능호도 효릉(孝陵)으로 정해졌다.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인 1545년 7월 경복궁 청연루에서 숨을 거뒀다. 같은 해 10월 15일 부모 옆에 묻어달라는 인종의 유언에 따라 부왕인 중종과 어머니장경왕후의 능인 정릉(靖陵) 옆에 능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1562년(명종 17) 정릉이 현재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宣陵) 옆으로 옮겨갔고,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禧陵)이라는 능호로 바뀌어 효릉 옆에 있다.
인종이 자신의 장사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명한 데다 당시 인종(仁宗)의 외가인 대윤(大尹)과 명종(明宗)의 외가인 소윤(小尹)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명종과 문정왕후 측에서 상례절차를 줄이고 능역 조성을 소홀히 한 것으로 여겨진다. 1577년(선조 10) 11월 29일 인성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 왕비릉을 조성했을 때 왕릉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다른 석물들도 개수하였다.
왕릉의 봉분을 감싸고 있는 병풍석의 면석에는 12지신상을, 우석(隅石; 귀퉁이 돌)에는 구름 문양을 조각하였다. 왕비릉에는 병풍석이 없다. 두 능을 감싸고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혼유석 각 1좌 장명등, 망주석 1쌍·문인석 1쌍·무인석 1쌍·석마(石馬) 2쌍·석양(石羊) 2쌍·석호(石虎) 2쌍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13代 明宗 - 康陵
강릉(康陵)은 조선 13대 명종(明宗 1534-67)과 인순왕후(仁順王后 1532-75) 沈氏의 능으로,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 릉에서 1km 떨어진 동쪽 산줄기에 안장되어 있다. 명종은 중종(中宗)의 둘째 아들로 1545년 인종이 승하하자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받았다. 인순왕후가 낳은 순회세자가 죽은지 2년만에 의지했던 어머니 문정왕후마져 숨지자 명종은 마음의 병을 얻었다. 선정을 베풀고자 했으니 뜻을 이루지 못한채 명종(明宗)은 보령 34세로 승하하였다.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한 후 인순왕후(仁順王后)는 덕흥대원군(중종의 일곱째 아들)의 셋째 아들을 왕위로 올렸다. 그가 14대 선조(宣祖)다. 선조의 나이가 어려 인순왕후는 1568년까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승하한 뒤 명종(明宗)릉 옆에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능제(陵制)는 국조오례의식(國朝五禮儀式)에 따랐고 왕릉과 왕비릉에 모두 구름무늬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12면의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만석(滿石) 중간에 문자로 12지를 새겨 넣었다. 또한 12칸의 난간석과 상석(床石)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양석(羊石) 2쌍, 호석(虎石) 2쌍과 3면의 곡장(曲墻)이 있다. 한 단 아래에 문인석(文人石) 1쌍, 마석 1쌍과 가운데 명등석(明燈石)이 있고, 그 아래에는 무인석(武人石) 1쌍, 마석 1쌍이 있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이 있고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사적 제201호로 함께 지정된 조선 중종의 두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의 태릉(泰陵)과 같이 병풍석을 두르고 두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 각 1좌가 놓여 있으며, 장명등(長明燈)은 화대(火袋)가 하대석(下臺石)보다 좁아지고 대신 허리가 길어진 양식으로, 선릉(宣陵) 건원릉(健元陵)·헌릉(獻陵)을 본뜬 16세기 복고풍의 특색을 잘 나타낸다.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산223-19번지에 있다.
14代 宣祖 - 목릉(穆陵)
목릉(穆陵)은 宣祖(이균; 1552-1608, 재위 41년)와 비(妃)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1600), 계비(繼妃)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金氏; 1584-1632) 세 개의 능이 왼쪽부터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순으로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에서 변형된 형태로 조성되었고, 동구릉(東九陵)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의 능은 봉분(封墳)에 구름 문양[운채(雲彩)]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된 병풍석(屛風石)이 설치되어 있고 난간석(欄干石)과 기타 석물(石物)들이 전통의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전란(戰亂)의 폐해(弊害) 후에 제작되어서 그런지 조형미(造形美)는 떨어진다.
처음 선조의 목릉은 건원릉 서쪽 산기슭에 정해졌는데, 불길(不吉)하고 습기가 있다는 원주목사(原州牧使)의 상소로 위치를 이동해 현 위치에 의인왕후릉과 함께 자리잡게 되었다.
의인왕후릉은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이 설치되었고 특이한 점은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의 줄기에 꽃무늬[화문(花紋)]가 처음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후 후대(後代)의 능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의인왕후릉 역시 처음에는 경기도 포천 지역에 유릉(裕陵)이라 묘호를 정해 조성했다가, 선조의 능과 함께 현 위치로 옮겨왔다.
인목왕후릉은 앞의 두 능에 비해 조금 뒤에 조성되어서 그런지 어느 정도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봉분(封墳)에는 역시 병풍석(屛風石)은 생략되었고 난간석(欄干石)만을 설치되었다.
선조(宣祖)는 중종(中宗)의 후궁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아들인 덕흥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명종(明宗)의 사랑을 받다가 명종 승하후 후사(後嗣)가 없어 명종비(明宗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에 의해 1567년 조선(朝鮮) 제14대 왕으로 즉위(卽位)했다.
즉위 초에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 인재를 등용하고 유학(儒學)을 장려하였으나, 조선 최대의 전란(戰亂)인 7년간의 임진(壬辰). 정유(丁酉) 왜란(倭亂)을 겪고 국토가 유린(蹂躪)되고 문화재(文化財)가 소실(燒失)되는 피해를 입어 복구작업에 많은 힘을 기울였지만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또한 선조대(宣祖代)는 조선 중기의 정치 개념을 대변하는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된 시기이다. 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해 패배주의적 민족성(民族性)을 날조한 당파싸움으로 잘못 평가되어온 붕당정치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그리고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또한 노론(老論)과 소론(小論) 등으로 붕당이 나뉘지만, 이는 네 차례의 사화(士禍)을 겪은 후에 재야(在野)에서 서원(書院) 건립 등으로 세력을 확대한 사림(士林)들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새로운 이념으로 조선 정치의 구심(求心)을 잡게 되었고 중앙과 지방이 혼합된 형태의 정치 구조가 완성된 것이다. 이는 결국 정치의 기반이 지방 중소지주층(中小地主層)까지 확대된 형태이기에 이러한 세력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발전해 나간 오히려 일당(一黨)의 독재(獨裁)가 아닌 붕당(朋黨)의 민주적인(?) 정치형태로의 진보였던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의인왕후릉
의인왕후는 1555년[명종 10년]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로1569년에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嘉禮)를 행하였고 소생(所生)이 없이 1600년(선조 33년) 46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해 재론 끝에 건원릉(健元陵) 동쪽 목릉(穆陵)의 세 능 가운데 첫 번째로 안장되었다.
인목왕후릉
인조대(仁祖代)까지 생존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호칭으로 친근한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繼妃)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1584년(선조 17년)에 태어났다. 1602년 선조의 계비로 책봉되어 1606년 선조의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으나 광해군(光海君) 즉위 후에 영창대군과 김제남은 피살되고 인목대비 역시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복위하여 왕대비에 오르게 되고 1632년(인조 10년) 48세의 나이로 승하해 목릉(穆陵)의 세 번째 능으로 안장되었다.
인목왕후는 글씨에도 능해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인목왕후의 어필(御筆)인 [보문경(普門經)] 일부가 전해오고 있다.
공빈(恭嬪) 金氏 墓 : 14대 宣祖의 후궁 공빈(恭嬪, 1553~1577) 김씨의 묘이다.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 후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해군과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 김씨는 양주에 묻혔다. 광해군은 즉위 후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1610년 어머니를 왕후로 추존했다. 시호를 공성왕후(恭聖王后)라 하고, 석물을 왕비릉에 준하게 축수했으며, 능호를 성릉(成陵)이라 했다. 광해군이 어머니 발치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듯이 공빈 김씨 묘는 아들의 묘에서 그리 멀지 않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의 송릉리라는 지명은 소나무가 많고 성릉이 있는 마을이라는 송릉(松陵)에서 유래되었다. 성릉은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으나 성릉의 흔적이 묻은 지명은 남아있다.
15代 光海君 墓
光海君 墓는 조선 제15대 임금인 光海君과 왕비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柳氏의 묘이다.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은 선조(宣祖)의 뒤를 이어 1608년 왕위에 올라 재위 중에 외교 ․ 문화 등에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당쟁에 휘말려 광해군(光海君) 15년(1623)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폐위된 후 강화를 거쳐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인조(仁祖) 19년(1641) 67세로 돌아가셨다.
선조(宣祖)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씨(恭嬪金氏)이며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묘(墓)는 대군(大君)의 예에 따라 장사를 지냈기 때문에 뒤에는 석물이 없고 앞에 비석(碑石),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등이 배치되어 있다.
16代 仁祖 - 長陵
조선 제16대 왕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와 원비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 1594∼1635)를 합장한 무덤이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3호로 지정되었다.
仁祖는 1649년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숨을 거뒀고, 9월 20일 파주 운천리의 인현왕후(仁顯王后) 능 왼쪽에 예장하였는데 그곳은 인조가 생전에 능지(陵地)로 지목했던 곳이었다. 1731년(영조 7) 능에 뱀과 전갈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전통적으로 봉분을 감싸는 12면의 병풍석에는 12지신상과 구름 문양을 조각하였지만, 장릉의 병풍석에는 목단과 연화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깥쪽으로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 상석 2좌가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서 있으며, 봉분 뒤쪽으로는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봉분의 아랫단에는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과 팔각 장명등 1좌가 있는데 장명등에도 목단과 연화 문양을 새겼다. 가장 아랫단에는 무인석·석마 각 1쌍을 배치하였다. 능을 옮기기 전 옛 능에 설치되었던 인조 때의 석물과 이장 후 새로 설치한 영조 때의 석물이 혼재된 상태이다. 능원 아래쪽에는 정자각 비각 수복방(守僕房) 홍살문·재실이 있다.
인조(仁祖)는 임진왜란 때인 선조 28년(1595) 11월 7일 왕실의 피난처였던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서인 세력과 손잡고 공빈 김씨 소생의 삼촌인 광해군을 물러나게 한 인조반정을 통해 1623년 3월 13일 즉위하였다. 정묘화란, 병자호란 등의 변란과 강화도로의 피신 사건, 남한산성에서의 삼전도 사건으로 청과의 외교관계가 악화되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는 등 혼란스러운 정국을 이끌었다. 인조 27년(1649)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5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전왕인 광해군은 당시 대립관계에 있었던 명나라와 후금(훗날 청나라)의 사이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선에 반대하던 서인 세력은 반정을 일으켜 인조를 왕으로 세우고, 명나라의 편으로 돌아섰다. 이에 후금은 인조 5년(1627) 1월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한다. 인조 14년(1636) 4월에는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하며 조선에 군신 관계를 맺도록 강요하였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같은 해 12월 12만 대군을 이끌고 재차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왕족들을 강화도로 피난시키고,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에 의해 저지되었으며, 남한산성으로 말머리를 돌렸으나 청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다.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의 저항을 계속하던 인조는 결국 강화도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을 하게 되었다. 인조는 지금의 송파인 삼전도로 나아가 청나라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를 당했다. 이를 삼전도의 치욕이라고 한다. 그 후 조선은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섬기게 되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장릉(章陵)은 16대 인조(仁祖)의 아버지 원종(1580-1619)과 그의 비(妃)인 인헌왕후 구씨(具氏 1578-1626)의 능이다. 원종(元宗)은 선조(宣祖)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정원군(定遠君)으로 책봉되었으며(1587), 광해군(光海君) 11년(1619)에 돌아가셨다. 그의 맏아들인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자(1623), 대원군(大院君)으로 추존되었다가 1632년 이귀(李貴) 등의 주청에 따라 인조 10년(1632)에 대왕(大王)으로 추존되었고, 원종(元宗)의 시호(諡號)를 받게 되었고 능호를 장릉(章陵)이라 불리게 되었다..
인헌왕후는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13세에 혼인하여(1590)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에 봉해졌고, 인조 4년(1626)에 4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부부인(府夫人)에 봉해지고, 원종(元宗)과 함께 왕후로 추존되었다.
장릉(章陵)은 왕과 왕비의 능이 나란히 자리한 쌍릉으로 조영되었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문무석(文武石)과 호석(護石 : 봉분 주위를 둘러 막는 돌)을 세웠는데, 이는 왕이 아니었던 왕의 아버지, 즉 대원군의 묘제를 따른 것이다.
휘릉(徽陵)은 16대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 趙氏의 능이다. 장렬왕후는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으며, 1651년 효종으로부터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라 불렸다. 10년 뒤인 1659년 효종마저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에 올랐다. 숙종 14년 자손이 없이 승하하여 건원릉 서쪽 언덕에 안장되었다. 장렬왕후는 인조 계비에 이어 효종, 현종, 숙종 때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이시기의 붕당정치는 장렬왕후의 복상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17代 孝宗 - 寧陵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孝宗)과 비(妃) 인선왕후의 쌍릉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이다.
효종대왕릉
왕릉의 봉분 주위로는 곡담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왕비의 능에는 곡담이 없어 두 능이 한 영역 안에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이 없으며 난간석의 기둥에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놓았다. 이는 간소화된 능제로서, 세조 광릉 이후 사라졌던 조선 초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이 성종의 선릉에서 다시 나타났다가, 이곳 효종의 영릉에서부터 없어진 것이다.
인선왕후릉
효종(孝宗)이 효종 10년(1659)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 해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현종 14년(1673)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졌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왕릉 영릉(英陵) 동쪽으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는데, 그동안의 우려가 무색하게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영릉은 천장하였으나 이에 연루된 자들은 면직을 당해야 했다.
영릉 천장 다음 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여 효종 왕릉 아래에 인선왕후의 능을 조영하였다.
18代 顯宗 - 崇陵
숭릉(崇陵)은 18대 현종과 비(妃) 명성왕후의 능이다. 왕과 왕비를 하나의 곡장 안에 모셔 봉분이 나란히 2기로 조성된 쌍릉이다. 높지 않은 언덕 위에 쌍릉으로 조영된 숭릉은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 만으로 연결되었고, 능침 앞에 혼유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곡장 안의 석양과 석호 각 2쌍과 망주석 1쌍이 초계를 이루었고, 중계에는 장명등, 문석인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었으며, 하계에는 무석인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었다.
봉분 앞의 장명등과 망주석에는 인조의 장릉처럼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망주석 위쪽에 ‘세호’라고 불리우는 작은 동물이 조각되어 있다.
현종은 1674년(숙종 즉위) 8월 18일 34세로 창덕궁 대조전 양심각에서 승하하였다. 그 해 8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하여 숭릉을 조영하였다. 12월 11일에 발인하여, 13일 건원릉 남서쪽 별도의 산줄기에 봉릉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684년(숙종 10)에는 현종의 비 명성왕후 청풍 김씨의 능을 조영하였다. 명성왕후는 1683년(숙종 9)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 서별당에서 42세에 승하하였다.
12월 7일에 소렴하고, 12월 9일에 대렴하였으며, 1684년 4월 3일에 발인하여 4월 5일에 봉릉하였다. 숭릉의 혈을 파기 위해 겉흙을 걷어냈을 때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나왔으나, 깊이가 3척밖에 되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중 밖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했다.
19代 肅宗 - 明陵
명릉(明陵)은 조선 제19대 숙종(肅宗)과 계비(繼妃)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 그리고 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나란히 자리한 쌍분(雙墳)으로 쓰고, 인원왕후의 능은 옆에 따로 있어 같은 언덕에 배치되었다.
숙종은 왕비를 세 번 맞아들였는데, 원빈인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의 능인 익릉(翼陵)은 서오릉(西五陵) 안에 따로 있다.
숙종은 제18대 현종(顯宗)의 아들로 태어나 현종 8년(1667)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674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 46년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조선 정치 사상(史上) 정치세력의 기복이 가장 심한 붕당정치의 정쟁이 격심했고, 예의에 관한 선비들 간의 논쟁과 장희빈(張禧嬪)을 중심으로 한때 인현왕후 민씨를 몰아낸 사건을 겪었으나, 왕권을 강화와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다. 재위 46년(1720) 60세로 승하하였다.
인현왕후 민씨(1667-1701)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숙종 7년(1681)에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숙종 15년(1689) 왕자 윤(昀, 景宗)의 세자 책봉문제로 장희빈이 모함하여 폐위 당하였고, 후에 장희빈이 몰락하면서 봉위된 뒤 35세로 승하하였다.
인원왕후 능
인원왕후 김씨(1687-1757)는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로 숙종 28년(1702)에 왕비가 되었고, 영조(英祖) 33년(1757)에 71세로 승하하였다.
숙종은 경종을 낳은 장희빈과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등을 후궁으로 두었다.
익릉(翼陵)은 숙종의 원비(元妃) 인경왕후 김씨(1661-1680)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 현종(顯宗) 12년(1671)에 세자빈이 되었으며, 숙종이 왕위에 오르면서(1674) 왕비가 되었다. 숙종 6년(1680)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20세로 승하하였다.
대빈묘는 숙종의 후궁인 희빈(禧嬪) 장씨(張氏, ?-1701)의 묘소이다.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숙종 14년(1688)에 궁녀 장소의(張昭儀)에게서 왕자 윤(昀, 景宗)을 얻었다. 이듬해 윤을 세자로 책봉하고 장소의에게 희빈이라는 품계를 내렸다. 그 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으나 숙종은 곧 이를 후회하고 인현왕후를 복위하고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20代 景宗 - 懿陵
懿陵은 제20대 경종(景宗)과 계비(繼妃) 선의왕후(宣懿王后) 魚氏(1705-1730)를 모신 능이다. 경종은 숙종의 맏아들로 병약하고 자손이 없어 왕위에 오른 이듬해(1721)에 이복동생인 연잉군(延仍君, 英祖)을 세제(世弟)로 봉하였고 즉위 4년만인 37세에 돌아가셨다. 선의왕후는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숙종 44년(1718)에 세자빈이 되었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비가 되었으며 자손없이 26세에 돌아가셨다.
이 능은 쌍릉(雙陵)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해 왕과 왕비의 봉분을 좌우로 조성하지 않고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독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石物은 속오례의(續五禮儀)의 기록대로 작고 간소한 제도를 따르고 있다.
惠陵은 景宗의 元妃 단의왕후(端懿王后, 1686-1718) 沈氏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로 타고난 품성이 어질고 어릴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춰 양전(兩殿)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데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숙종(肅宗) 44년에 승하하여 숭릉 왼쪽에 모셔졌다가 1720년 景宗이 즉위하자 단의왕후에 추존되었다. 능역이 전반적으로 좁고 길게 자리하고 있으며, 석물도 별로 크지 않게 제작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아담한 모습이다. 조선왕릉들은 대부분 북침(北枕)하고 있는데, 혜릉은 서쪽에 머리를 두고 있다.
21代 英祖 - 元陵
원릉(元陵)은 제21대 영조(英祖, 1694-1776)와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 金氏의 능이다. 1724년 즉위한 英祖는 역대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52년) 왕으로, 탕평책을 써서 당쟁의 근절에 힘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러나 자신을 붕당정치의 폐해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아들 사도세자는 붕당정치의 희생자가 되는 비운을 겪었다. 英祖는 서오릉의 홍릉(원비 정성왕후)을 자신의 자리로 정해 썽릉으로 조영하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는 지금의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안장하고 원릉이라 했다. 15세의 나이에 66세의 영조의 비가 된 정순왕후는 훗날 사도세자의 죽음에 빌미를 제공하였고, 순조 때에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력을 휘둘렀다. 정순왕후는 자손이 없이 승하하여 원릉의 英祖 옆에 묻혔다.
홍릉(弘陵)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 徐氏(1692~1757)의 능이다. 정성왕후는 1704년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과 혼인했고, 병약하고 후사가 없던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하자 왕비에 올랐다. 영조는 왕비의 행장기(行狀記)에서 정성왕후가 43년의 왕궁생활 동안 늘 미소 띤 얼굴로 맞아주고, 윗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생모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시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고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묏자리를 정하면서 능 오른쪽(바라보아 왼쪽)을 자신의 자리로 잡아놓으면서 쌍릉으로 예상하여 배치해놓았으나 영조 승하 후 정조는 영조의 능을 완전한 길지라고 주장하는 지금의 원릉 자리(동구릉)에 정했으므로 홍릉은 이처럼 한 쪽에 빈 채로 남아 있다. 영조가 원래 자신의 자리로 정해놓았던 자리는 비어 있고(우허제右虛制) 그 앞으로 석물이 놓여 있다.
22代 正祖 - 健陵
健陵은 제22대 正祖와 王妃 효의왕후(孝懿王后) 金氏(1753-1821)의 능이다. 정조(正祖)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로 태어났다. 英祖 35년(1759)에 세손(世孫)이 되었고 영조 51년(1775)에는 임금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으며, 영조가 승하하자(1776) 경희궁에서 왕위에 올랐다.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탕평책을 실시하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속오례의(續五禮儀), 대전통편(大典通編), 홍재전서(弘齋全書) 편찬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효의왕후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黙)의 딸로 英祖 38년(1762) 세손빈(世孫嬪)이 되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정조가 돌아가시고 純祖(1800)가 즉위하여 왕대비가 되었다.
정조가 49세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 후 순조21년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따라서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고 하자 훗날 딸이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됨으로써 영안부원군에 오르게 되는 영돈령부사 김조순이 현재의 건릉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길지를 물색한 결과 현륭원 서쪽의 산줄기를 찾아냈으며, 1821년(순조 21) 정조의 능을 현 위치인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효의왕후의 능호는 정릉이라고 하였다가 위와 같이 건릉으로 합장하게 됨에 따라 능호를 따로 쓰지 않게 되었다.
융릉(隆陵)은 사도세자(思悼世子)와 그의 비(妃) 洪氏(1735-1815)의 능이다. 장조(莊朝)는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로 1735년에 태어났다. 영조(英祖) 12년(736)에 세자가 되었고 10세에 혼인하였다. 영조 38년(1762) 뒤주 속에 같혀 28세로 창경궁에서 돌아가셨다. 뒤에 영조가 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도(思悼)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훗날 아들 정조(正祖)가 즉위하여 시호(諡號)를 장헌세자(莊獻世子)라 하였다. 고종(高宗) 광무(光武) 3년(1899) 장조(莊祖)로 추존(推尊)하고, 같은 해 11월에 황제(皇帝)로 추존하였다.
헌경왕후(獻敬王后) 洪氏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로 영조 20년(1744)에 세자빈이 되었고 순조(純祖) 15년(1815)에 창경궁에서 돌아가셨다. 광무 3년(1899) 10월에 왕후로 같은 해 11월에 황후로 추존하였다.
23代 純祖 - 仁陵
인릉(仁陵)은 조선 제23대 순조(純祖)와 왕비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1789-1857)의 능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정조 24년(1800)에 11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大王大妃) 정순왕후가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순조는 재위 34년(1834)에 승하하였다.
순원왕후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의 달로 正祖 13년(1789)에 태어나 순조 2년(1802)에 왕비가 되었고 제24대 憲宗이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로서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철종 8년(1857) 창덕궁에서 69세로 승하하셨다.
24代 헌종 - 景陵
조선 24대 헌종(憲宗, 1827~49)과 원비 효현왕후(孝顯王后, 1828~43) 김씨 및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 1904) 홍씨를 모신 삼연릉으로, 조선시대 왕릉 가운데 유일하다. 헌종은 요절한 문조의 아들이며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8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삼정이 문란해지고 계속 된 홍수로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해졌다. 헌종은 혹독한 천주교 탄압정책을 폈으며,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로 많은 신자들이 학살당했다. 후사 없이 보령 23세로 승하하여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장사지냈다.
효현왕후는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의 딸로 1837년 왕비가 되었으나 6년 만에 승하했다. 효정왕후는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의 딸로 효현왕후의 뒤를 이어 헌종 14년(1844) 왕비가 되었다. 헌종이 승하하고 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1908년 헌종은 성황제(成皇帝)로 추존되고 효현왕후, 효정왕후도 성황후로 추존되었다.
25代 哲宗 - 睿陵
조선 25대 철종(哲宗, 1831~1863)과 그의 비 철인왕후(哲仁王后, 1837~78) 김씨의 능이다. 철종은 장조(사도세자)의 증손자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9세에 순조의 비 순원왕후에 의해 왕으로 즉위하였다. 처음 3년간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졌고, 그 후에 친정을 하긴 했지만 왕후 집안의 세도정치로 왕권은 약했다.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세도정치에 휘둘렸던 철종의 삶과는 달리,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은 철종의 능을 매우 거창하고 웅장하게 꾸미게 된다. 이는 왕실의 오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강화를 꿈꾸던 대원군의 뜻이기도 하였다. 부덕이 높은 여인이었던 철인왕후는 1878년(고종 15)에 승하 후 철종 곁에 안장되었다.
26代 高宗 - 洪陵
洪陵은 제26대 고종(高宗)과 황후인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의 능이다. 고종은 철종 3년(1852)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63년 철종이 자손이 없이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창덕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나라를 다스렸으나 정치적 실권은 명성황후의 친인척 민씨 일족이 장악하였다. 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光武라 하여 자주족립국가로서의 면목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1907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고자 세계만국평화회담이 열리고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일본은 이 일을 이유로 삼아 황제위를 순종에게 넘기도록 강요하였다. 고종이 재위하던 44년간은 외세의 침략이 잇달았던 격동기였다. 고종은 이를 막아내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1919년 1월 21일 67세로 덕수궁 함령전에서 승하하셨다.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에는 적국에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명성황후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고종 3년(1866) 16세에 왕비가 되었고, 고종 11년(1874) 왕자인 순종을 낳았다. 고종의 친정 이후 황후의 친인척인 민씨 일족이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정치활동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 때에는 충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다. 명성황후는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와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들여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정책른 일본을 자극하였고 결국 일본공사가 보낸 자객에게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건천궁에서 암살되었다.(乙未事變)
광무 원년(1897)에 명성황후로 추존되었으며 919년 고종이 승하하시자 처음 안장하였던 청량리 홍릉에서 구리시로 이장하였다.
27代 純宗 - 裕陵
裕陵은 조선 최후의 황제인 순종(純宗)과 황후(皇后)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閔氏(1872-1904), 계후(繼后)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尹氏(1894-1966)의 능이다. 순종은 高宗 11년(1874) 고종의 둘째 아들로 창덕궁에서 태어났다. 광무 원년(1897)에 황태자가 되었고 광무 11년(1907)에 고종의 뒤를 이어 창덕궁에서 황제위에 올랐다.
황제위에 오른 후 연호를 융희(隆熙)라 정하고 기울어 가는 국운(國運)을 바로 잡으려 하였으나 재위 4년 만인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순종은 단지 이왕(李王)으로 불렸고 1926년 53세로 창덕궁에서 돌아가셨다.
순명효황후 민씨는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딸로 고종 19년(1882)에 세자빈이 되었고 광무 원년(1897)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광무 8년(1904) 33세로 돌아가셨다.
순정효황후 윤씨는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로 광무 10년(1906) 12세의 나이로 황태자비에 책봉되었고 그 다음해 순종이 황제위에 오르자 황후가 되었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으려 조약 체결을 서두르자 황후가 옥새를 치마속에 감췄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황후는 1966년 72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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