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명성황후 (1851 ~1895년) 솔새김남식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은 일본이 내전까지 처 들어가
한나라의 왕비를 시해(暗殺)하고 방화까지 한 끔직한 사건으로 조선을 아니 우리나라를
얼마나 얕 봤으며 그랬을까 정말 잊으면 안 되는 역사에 치욕적인 일이다.
조선의 역사를 이끈 철의 여인 또는 외교 전략이 탁월하다고 명성황후를 추종하는데
하지만 그녀는 구한말 근대화 과정에서
민씨 일가의 세도정치와 부패정치로 우리나라에 비극(終末)을 자초한 인물이다.
문정왕후(중종繼妃) 윤씨와 정순왕후(영조終妃) 김씨와 명성황후(고종妃) 민씨는
조선을 망가뜨린 세여자 세여걸(三女傑)로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명성황후의 실질 통치 기간은 1873년에서 1895년까지 22년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치명적 위기에 처한 민비는
청나라를 끌어들여 권력을 다시 회복하여 청일전쟁 때까지 청나라의 간섭에 들어가야 했다.
원세개는 조선 왕처럼 행세하며 심지어 조선을 청에 합병시키려 까지 했으며
1894년 민비는 일군과 청군과 함께 불러 들여 진주를 허가 함으로써
일본에 통치를 허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종과 명성황후릉
그후 청나라에 힘을 빌려 일본을 몰아내려 했으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다시 러시아 세력을 불러 들여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다.
그러자 일본은 조선 침략을 위해서 명성황후가 제거되어야 한다 생각하고는 시해를 감행했으며
1904년 노일전쟁에서 다시 일본이 승리하자 1910년 강제합병으로
조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을미사변 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는 어처구니였고
이로 인하여 일본의 침략이 일시 머뭇 거리기는 했으나 러시아에 의해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이 매우 손상되고 말았다.
민비는 시해된 후 일본에 의해 廢妃가 되었으나 고종에 의해
즉시 嬪으로 복구 되었고
그리고 다시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왕을 황제로 왕후를 황후로 추존하게 된다.
국가존망의 岐路에서 고종은 王을 皇帝로 바꾸는 게 중요 했을까
구한말시대는 사리사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혀
오직 쇄국정책으로 외부세력에 충분히 대처할수 있는 준비가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 대원군과 부인 명성황후 눈치를 살피며 줏대없이
국정을 논하고 대처하는 고종과
민비의 內政 권력유지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데 기여했다는 堅志解析이다
인조나 선조보다 나라를 잃게한 고종의 책임은 무한이며 다시는 이런 역사가
뒤풀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명성태황후 민씨 (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 1895년)
아명은 자영(玆暎) 본관은 여흥. 출신지는 경기도 여주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최익현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하였다.
민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정권을 부활시켰다
1882년(고종 19)에 임오군란으로 무기고를 탈취한 군인들이 별기군을 창설하고 교육하던
일본인 교관을 살해하고 공사관까지 공격하는 한편 대궐에 난입하였다.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지는 가운데 민비는 기적적으로 충청도의 장호원으로 피신하게 된다
다시 집권한 대원군은 중전의 국상(國喪)을 발표하여 죽음을 기정사실로 했지만
장호원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민비에게 찾아온 한 무당(眞靈君)의 예언대로 군란은 청나라에 의해 진압 되었고
대원군은 텐진으로 압송되자 명성왕후는 51일만에 환궁하게 된다
그후 청나라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 당하자 다시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였다.
그러자 친일 성향을 띤 급진 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고
흥선대원군과 주조선 일본공사 미우라고로의 공모에 의해서 일본인 병사와 낭인들에게 암살 당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淸日戰爭에서 淸이 敗退하고 東學 농민군의 敗北가 거의 확실시되어가고 있을 때,
日本 政界의 巨物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大韓帝國 公使로 부임해 왔다.
- 내가 朝鮮을 우리 大日本國의 手中에 넣고 말 것이다!
- 그러기위하여 內治를 便하게 할 수 있도록 제도를 새로 만들고 他國이 朝鮮에 간섭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
이노우에 가오루는 淸國과 密約을 도모한 大院君을 끌어 내리고 王妃의 정치개입을 막는 한편으로
甲申政變 때 일본으로 避했던 朴泳孝 等, 親日 인사를 대거 발탁하여 內閣을 구성한다.
이노우에는 高宗에게 洪範 14條(甲午경장 이후 추진된 정치혁신을 위한 강령으로, 閔氏 일파를 몰아내는데 성공한
開化派의 金宏集<김굉집>을 首반으로 내각을 꾸리는데 크게 기여한 우리나라 최초의 憲法的 성격을 갖는 강령.
他意<日帝의 强壓>에 의하여 선포된 점이 흠)를 반포하게 함으로써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한 각종 조치를 취하고,
淸나라를 제압한 후 시모노세키 (下關)조약을 체결하는 등 植民地化를 위한 계획을 착착 진행해 갔다.
- 遼東半島는 淸에 돌려주라. 우리가 나누어 먹게..
日本은 아까웠지만, 우선 朝鮮을 통째로 먹기 위하여 遼東 半島를 淸에 돌려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 尊心이 좀 傷하기는 하지만, 때가 아니매 참는다 -
三國의 간섭과 일본의 후퇴를 눈여겨 본 高宗과 王妃는 생각했습니다.
- 러시아가 이 정도로 强할 줄 몰랐다. 러시아를 잘 활용만 한다면 일본의 魔手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다. -
高宗은 러시아 公使 베베르를 불러 親러 政策을 펼칠 뜻을 傳하는 한편 日本에 대해서는
눈에 띄게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親日 實勢의 하나인 朴泳孝를 내보내고 李完用 閔泳煥 등, 親러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식 군대인 訓練隊를 해산하는 등, 발빠르게 親러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本國의 입장을 高宗은 알지 못했습니다.
- 시베리아 鐵道가 완공될 때까지는 일본과 부딫치지 않는다. -
러시아를 가까이 한다고해서 힘이 없는 朝鮮의 未來가 갑자기 달라질 수는 없었지만,
朝鮮 朝廷이 親러시아 정책으로 방향전환을 틀자
大陸침략을 위해서 朝鮮을 무조건 손에 넣어 교두보로 삼으려했던 일본이 드디어 本色을 드러냈다.
- 지금 朝鮮을 확실히 장악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國際與論이고 나발이고 신경 쓰지 마라! -
- 朝鮮이 러시아를 통해 日本을 견제하려는 정책을 쓰고자 하는 것은 왕비의 책략일 것이다.
왕비는 나아가 친일 개화당을 없애려고도 하고 있다. -
- 지금 王妃를 없애지 않으면 朝鮮을 保護國化하는 데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왕비를 죽였다는 국제적 비난은 수를 써서 벗어나거나 그냥 그대로 감수할 수 있다. -
일본은 뜻밖에도 이노우에 公使를 미우라 고로로 교체합니다.
미우라는 일본육군 中將 출신으로 조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조선 公使로 부임해왔고, 무슨 음모를 꾸미고있었는지 이노우에는 보름 넘게 公館에서
미우라와 함께 지낸 후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미우라란 者가 모종의 특수 임무를 부여받고 조선에 왔음을 의미하며,
이노우에가 미우라와 더불어 왕비 시해 작전을 치밀하게 준비하였고,
바로 일본 정부의 지령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미우라는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에서 왕비 시해를 모의합니다.
미우라의 참모 ‘시로’는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고급 지식인 출신인데,
그는 조선에 나와 있는 일본의 極右 浪人 단체와 긴밀하게 움직였습니다.
일본 낭인들은 고도로 훈련되고 의식화된 智的으로 무장된 전문 테러리스트 들입니다.
실제로 浪人 중에는 東京帝國大學 출신등, 高學歷者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미우라 등은 다음과 같은 음모를 꾸미는데..
- 弑害의 主役은 日本의 浪人들이 맡고, 外觀上으로는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
- 일본인 가담자는 浪人(떠돌이무사) 자객과 일본 守備隊 軍人, 일본 公使館 巡査들로 구성한다.
(浪人 자객의 首魁는 漢城新報<大韓帝國 시대, 日人 들이 발행한 日本語 및 國 漢文 혼용 신문으로
1895년 경 창간된 것으로 추측됨>社長으로 아다치 겐조<安達謙藏>라는 인물이다)
- 擧事日은 1895년 10월 10일 새벽으로 하고, 作戰名은 ‘여우사냥’으로 한다.
그런데 조선 조정이 예상보다 일찍 日本 訓練隊를 해산시키기로 결정하자,
미우라는 해산 결정 당일인 10 월 8 일을 거사일로 定하고 일을 진행합니다.
일본은 擧事에 앞서 大院君을 찾아가 협조를 요청합니다.
- 곧 王妃를 끌어내릴 것이오니 협조해 주십시오. 國太公 殿下!
이 일로 인해 大院君이 왕비 시해에 협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일부 있으나
정확한 사실 여부는 알수가 없고 죽은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一國의 王妃를 半 公開리에 殺害하려는 日本! 앉아서 당하는 朝鮮!
이것이 불과 100여 년 전에 일어난 朝鮮의 일이다
미우라는 擧事 날짜를 10월 8일 새벽으로 바꾸고 용산으로 무장한 浪人들을 집합시켰습니다.
또한 日本軍, 巡査, 조선인 몇명을 규합하여 공덕리의 대원군 별장을 찾아 大院君을 景福宮으로
강제로 모셔와서 주동자를 대원군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술책으로..!
새벽 4시경, 이미 일본인 敎官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약 250~300명과 日本軍 兵力이 宮闕을 포위한 상태였고,
시경 대원군이 당도하자, 일본군 수비대는 미리 준비한 긴 사다리를 건넸고
일본인 巡査들이 담을 넘어와 빗장을 풀었습니다.
이어서 日本의 浪人들과 이들에게 부역하는 조선인들이 광화문을 넘어 경복궁 앞에 도착했고,
곧 春生門, 秋成門 등으로 일본군과 조선인 근위대 병력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들어 경복궁을 포위하였습니다.
그 전에, 美國人 將軍이 지휘하는 朝鮮人 경비대 500 여 名이 景福宮 입구를 지키고 있었으나,
이들은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避할 수 밖에 없었고, 訓練隊長 洪啓薰이 시위대 병사와 함께 막아섰으나
현장에서 모두 살해됩니다.
日本軍이 宮闕을 완전히 봉쇄하고, 동원되었던 訓練隊 朝鮮人 병사들이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日本의 浪人들은 朝鮮의 王妃를 찾아 나섰습니다.
景福宮에서 明成皇后를 찾지못한 일본 浪人들은 황후가 기거하던 경복궁 북쪽에 있는
乾淸宮(景福宮의 香遠亭 뒷편에 있는 건물로 王과 王妃의 거처나 外交사절의 접대장소로 쓰였음)으로
몰려가 閤門을 포위하고 殿堂으로 들어가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명성황후의 처소를 대라며 난폭하게 위협했으나
宮女들은 두들겨 맞고 목숨을 잃으면서도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습니다.
이때 宮內部 大臣 李耕稙이 달려와 앞을 가로막다 그 자리에서 日本刀에 의하여 몸이 베어져 나가 죽었고,
浪人들은 곧 宮女와 上宮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누가 황후인지 색출하던 중 變服한 皇后를 찾아 냈습니다.
日本의 浪人들은 궁녀들 사이에 있다가 도망치는 황후를 잡아 넘어뜨린 후 구둣발로 차고 짓밟으며
수 명이 무수히 칼로 찔러 죽입니다.
이어 宮闕로 들어온 미우라는 황후의 시체를 직접 확인한 후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태울 것을 지시했고,
낭인들은 건청궁 동쪽 녹원 숲 속에서 장작더미 위에 皇后의 屍身을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우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할 수없는 蠻行을 저지릅니다.
日本軍이 景福宮을 포위하자 外國 公館에 구호 요청도 해보았으나 별효과가 없고.
高宗은 皇后를 보호할겸 浪人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보고자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방문 앞으로 직접 나섰으나
미친 망나니 日本의 浪人들은 무도하게도 칼을 휘두르며 一國의 國王인 高宗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했고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손을 얹어 바닥에 주저앉히기까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太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冠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 줄기를 얻어맞는
수모를 當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일을 벌인 그날 오전 9시 20분, 일본 공사관에서는 본국의 육군참모부에 '극비'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전문 한 통을 보냈는데 이 電文에는 ‘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짧게 적혀 있었습니다.
朝鮮의 심장을 무참히 유린한 망나니 미우라는 兪吉濬 等으로 親日 내각을 구성하고,
각국에 皇后 弑害는 일본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强辯합니다.
- "王妃의 政敵인 大院君과 訓練隊 해산령에 분개한 군인들이 合作해 벌인 일인듯 합니다". 라고 항변
그러나 事件의 全貌가 점차 드러나고 국제 문제로 비화되기 시작하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미우라를 소환해 재판에 회부합니다.
일본의 御用 재판부는 "미우라 개인이 訓練隊 해산에 불만을 품고 大院君의 요청을 받아들여
浪人을 동원해 저지른 일" 이라고 판결을 합니다.
허나, 그 이후 殺人魔 미우라가 계속 승승장구하였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日本의 明成皇后 시해 사건 이후 高宗은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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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youtube.com/embed/GuUjLTmW1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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