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려조선

조선시대 비운의 여인 4명

시인김남식 2016. 3. 15. 19:59

조선시대 비운의 여인 4명           정리솔새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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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윤씨,장록수,상궁김개시.장희빈이 조선시대에 천민에서 왕의 총애를 받아

신분 상승을 꾀하고

권세를 부리다가 비명에 간  비운의 여인이 네명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의 제물이라고 말 한다

 

 

1. 폐비윤씨(1445년~1482년)

낮은 신분에서 나라의 국모까지 되었으나 불안한 국모자리를 지킬려다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권력싸움에서 밀려나 

결국은 폐비가 되어 사약을 받고 한많은 생을 마감한 참으로 불쌍한 여인이다.

여자 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

남편과 말싸움 중 남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고 하는데

그는 죽어가며 흘린 피의 손수건이 그의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피나는 복수가 시작 된다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가 소생없이 승하하자 숙의에서 연산군을 낳고 1476년 왕비로 책봉되어

3년만에 1479년 폐위되어 1482년 성종의 사약을 받았다.

폐비윤씨는

능참 갈 때 먼발치에서도 남편 성종의 모습을 보겠다는 유언으로 망우리에 묻힌후

16년을 무명묘로 있다가 1498년 양주 천장산(지금 경희대)으로 이장을 하게 된다

그래서 폐비 윤씨가 묻히고 난 뒤 이 일대는 회묘(懷墓)’ 라는 지명을 갖게 되는데...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윤씨 묘를 회릉으로 휘경동 경희대 안에 있었는데

대학병원이 생기면서 서삼릉으로 이전했다

 

 

폐비윤씨의 넋두리 (恨詩)

돌담 둘러처 발길 끊어진 산기슭에 이름 모를 새들 솔바람 따라 들락거려도

발치 아래 시앗들 치켜뜬 눈 감을 줄 모르는 구나

말없이 지내는 처소를 옮기고도 모자라 후궁들마저 따라 오게 했는가

세상 여인네들이여 열두살 어린 지아비를 받들어 왕자를 생산하고 여덟살 많은 시어머니 발아래

숨소리도 못낸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졌다고 사약 받아야 하는가

명문세가 여식들이 열둘이나 들어와밤마다 혼자 지내야 했던 고통을 그대들은 알리오

보잘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나인으로 지내다 만난 어린 임금 사랑을 독차지 하려 했다고 죽어야 하는가

금삼에 쏟아낸 피 식기 전에 넋은 궁궐 담장 밑에 떠 돌았다가

아들에 의해 능을 얻었지만 두해도 못되어 다시 버림받은 몸낯선 땅 서삼릉에 묻혀 잠들지도 못하는구나

누명 벗어 낼수 없어 흐느껴도 눈 앞에 엎드린 후궁들이 아직도 눈을 번뜩이며 질투한다네.

 

2. 장록수(?~1506년)


연산군 하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인물 장녹수(張綠水, ?~1506)는

흥청(興淸)이라는 기생 출신으로 제안대군의 가노(家奴)와 혼인했기 때문에 그도 자연히 노비가 되었다.

어느날 연산군이 제안대군 집에 방문하여 인연이 되었다.

뛰어난 미모와 가무로 인하여 나이 30에 연산군의 눈에 들어서 궁궐에 들어 온 장녹수는
연산군을 때로는 어린아이 같이 때로는 노예처럼 대 할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모든 상과 벌은 그녀의 입에서 행하여 졌다고 전한다.

 

1503년(연산군 9) 종 3품인 숙용(淑容)에 봉하여지고 이듬해는 그녀의 집 주변 민가를 모두 철거하여
새로이 단장시켰으며 피봉, 무수한 금·은·주옥·노비·전택(田宅) 등을 하사 받았다.
왕이 그녀를 보면 즉시 희색을 띨 정도로, 교태스럽고 요사스러워 연산군 실정의 한 요인을 만들었다
후궁의 반열까지 들어 온갖 권력과 부귀 영화를 누리다가

1506년 중종반정 때 참형(斬刑)에 처하여 지고 전재산을 기록 대장에서 삭제하고 몰수 되었다.

제안대군은 예종의 하나뿐인 적자였지만

나이가 어려 왕위를 잇지 못하고 4촌형 자을산군(성종)에게 갔으며 연산군과는 당숙질간이다 

 

 

장록수 노래 전미경

가는세월 바람타고 흘러가는 저 구름아 수많은 사연담아 가는곳이 어드메냐 구중궁궐 처마끝에 한맺힌 매듭엮어

눈물강 건너서 높은 뜻 걸었더니 부귀도 영화도 구름인 양 간곳없고 어이타 녹수는 청산에 홀로 우는가

한조작 구름따라 떠도는 저 달님아 한많은 사연담아 네 숨은곳 어드메냐 곤룡포 한자락에 구곡간장 애태우며

안개강 건너서 높은 뜻 기웠더니 부귀도 영화도 꿈인 양 간곳없고 어이타 녹수는 청산에 홀로 우는가 ;                  

 

 

3.상궁 김개시 (?~1623년)

 

김개시는 선조, 광해군 때의 상궁으로, 본명은 김개시(金介屎)이며 그녀의 출신에 대해서는

천한 노비의 딸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한때 선조의 눈에 띄어 승은(承恩)을 받아 특별 상궁이 되었고

민첩하고 꾀가 많아 선조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으며 권신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위해 추종하는 세력들과 손잡고 반대 세력을 숙청했으며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는 선조의 유일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내 몰고

그 어머니인 인목왕후를 유폐하는데 성공하였다.

추후 인조반정이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자

그녀는 결국 광해군을 배신하고 반정의 주력 인물인 김자점에게 뇌물을 받고

반정후에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반정을 묵인했다,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 반정이 일어난 뒤 인조 반군에 의해 요부로 지목되어서 참수되었다.
김개시와 광해군은 연인사이는 아니었다는 게 정설이다 

 

 

4. 장희빈 (1659년~1701년)

장빈장씨(禧嬪 張氏)는 조선의 제19대 숙종의 빈(嬪)으로, 제20대 경종(景宗)의 어머니이다.

숙종 임금보다는 2년 연상으로 본명은 장옥정(張玉貞) 본관은 인동(仁同) 이다

무술이에서 왕비까지 올랐으나 암투에 의해 사랑하고 사랑 받았던 남자 숙종에게 사약을 받은

비운의 여인이 바로 장희빈으로 그의 아들 경종에 왕위에 올랐지만
당파로 치열한 정권 다툼에 항상 피바람에 휩싸였던 시기에

생모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생모에 대하여 무엇하나 해놓지 못할 정도로 나약 했다. 
1701년(숙종 36년) 숙빈최씨(영조의 모친)의 발고로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원하는

저주굿을 한 혐의를 받고 숙종에게 자진을 명 받았다.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알고있는 장희빈의 악행은

노론편에서 집필한 '인현왕후전'에서 묘사 한 것으로 숙종 신록에서는 사실과 다르다.

다시 말해서 반대 급부에서 밀고 들어 온 악몽으로 일생을 마친 비운의 여인이었다

 

장희빈 묘는 원래 경기도 광주에 풍수적으로 좋은 자리에 있었는데

도시 개발로 인하여 1969년 서오릉으로 옮겨지게 된다  

숙종과 장희빈 그들은 한 때는 사랑했고 사랑했던 부부간인데

정말 죽어서도 묘하게 한 곳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원한이 없을지 궁금하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구석진 곳 그래서 가장 빨리 해가 지는 

과히 좋지못한 자리에 장희빈 묘가 자리를 잡아서 홀대를 받지 않나 문득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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