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대역사

대조영과 발해역사

시인김남식 2016. 3. 22. 21:11

대조영 고구려유민과 함께 발해를세우다

 

발해라는 이름은 713년 당(唐)이 건국자인 대조영 (大祚榮)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해 그 국가적 실체를 공인한 데서 비롯했다

건국 초기에는 스스로 진국 (震國)이라 칭했으며

일본과의 사절 교환시에는 고구려의 계승을 강조하며 '고려'(高麗)로 칭하기도 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아울러 나라를 세운 대조영 (?~719, 재위 698~719)

 

그러나 발해는 오랫동안 우리 역사에서 잊혀 진 나라 입니다.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 발해의 유민들은 강제로 이주가 되었고 동경성은 불타버리면서

발해인들의 역사는 후세에 전하여 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만주.연해주.북한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발해,

독립된 연호를 사용하였었고

황제국을 칭했던 발해가 분명히 고구려인이 세웠었고 고구려인이 이끌고 고구려를 계승했던

우리 역사임을 분명히 밝혀 나가고 있다.



 

이러한 발해 연구의 최전방에는 대조영 이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다.

668년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게 무너진 이후 고구려 옛 영토 대부분은 신라와 당나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힘의 공백 지역으로 남아 버렸다.

신라는 평양 이남을 차지했을 뿐이고 당나라 또한 만주지역을 장학하지는 못했고

당나라는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나서 그 유민들을 국외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시 이곳에는 거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원주민은 거란족 그리고 이주해온 고구려 유민 또 고구려에 예속 되었거나 협력해온 말갈족 등은

영주지방에 섞여 살다가 696년 당나라에 대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말갈인 걸사비우는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이동을 할수 있었다.

대조영은 걸걸중상의 아들로 이 때 아버지와 함께 고구려 유민을 이끌면서 나라를 세웠다.

 

발해는 현재의 만주 동부 지역에 중심을 두면서 남쪽으로는 한반도 북부지역 북쪽으로는 흑룡강

서쪽 으로는 요동 동쪽으로는 동해안에 이르는 지역까지

만주 연해주 북한을 아우리는 아주 넓은 땅에 걸쳐 있던 대 제국 이었다.

[신당서] 라는 서적을 보면 발해 전성기의 영토가 사방 5천리에 달했다고 기록 하고 있다.

 

.

중국,러시아,북한을 아우르는 지역에 있던 나라이다보니 현재까지도 중국 러시아 한국 세 나라 모두 발해가

자기들의 역사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말갈 사람 이고 말갈 족 후예가 만주족으로 써 현재 중국 민족의 일원이니

발해는 자신들의 역사라고 목소리 높여 말하고..

러시아는 대조영이 역시 말갈사람으로 그 후예가 러시아 민족의 일원이 된 연해주 소수민족이니

발해가 본인들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물론 남한과 북한은 대조영은 고구려인이고 발해는 우리의 역사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대조영은 고구려 인인가? 아니면 말갈인인가? 라는 의문점에 서게 되고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 우리나라와 중국은 각기 다른 기록을 전한다.

[구당서]는 대조영을 '고려별종'이라 하여 고구려계로 전하지만

[신당서]는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붙은 자 라고 기록 하고있다.

한편 [삼국유사] 의 '발해전' 을 살펴보면 '신라고기'에서는 고구려의 옛 장수라 하여 고구려인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대조영이 말갈 출신인지.. 또 고구려 출신인지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정도로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입니다.

물론 대조영이 고구려인이라고 발해가 한국사에 속하고 말갈인이라고 중국사나 러시아사에 속하는 것은 아닐것

고구려만해도 고구려인과 말갈족 을 비롯한 여러 종족이 섞여 있던 나라 였다

대조영이 어느 민족 출신인지 보다는 더 중요한 점 은 발해를 이끌어갔던 집단이 고구려인들이고

이들이 고구려를 잇고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는 사실 일 것이다.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무왕)가 그의 뒤를 계승하여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이면서 북동 방면의

여러 종족을 정복 하였고 737년 무왕이 죽고 대흠무가 제 3대 문왕이 되었다.

이 무렵 어느정도 국가기반이 확립 되었다고 판단한 문왕은 내부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데 주력하였으며

그는 먼저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3성 6부 제도를 시행하는 한편,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겼다.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의 묘비가 1980 년 만주 길림성 和龍縣 龍頭山에서 발견 되었는데

비문에는  "공주의 부왕과 조상을 황제라 칭하다" 이는 발해가 황제국임을 입증하는 아주 소중한 자료이다.

 

신당서 [Hsin T'ang shu, 新唐書] 총 225권으로 당(唐)의 건국(618)부터 멸망(907)까지의 사실(史實)을 기록했다


발해 망국후 유민은 3갈래로 나뉘여짐

왕건의 고려국으로 간 사람들, 거란에 끌려간 사람들, 원지역에 남은 사람들. 원지역의 말갈인들은 후에 여진(女眞)으로 불리움. 

주요 사건 년대

- 기원 698년 료서에 끌려갔던 고구려(고려)유민들과 말갈인들 반란하여 동으로 이동, 대조영이 천문령전투에서 당군 격파
   동모산에서 “진국”을 건립. 
- 기원 713년 대조영이 당으로부터 발해군왕의 칭호를 받음. 이후 발해로 일컬어짐.

- 기원 727년 녕원장군 高仁義를 대표로 한 24명 사절단 일본 파견
  국서에서  <<고려의 옛땅을 되찾고 부여의 유속을 가지고 있다>>고 소개.
- 기원 732년 무왕, 장문휴를 보내 당의 등주(登州)공격,
- 기원 9세기 접어들면서 발해는 '해동성국'의 전성기를 누림

- 926년 거란의 공격으로 멸망. 발해 유민 부분적으로 거란에 끌려감.
- 부분적인 발해 유민들의 남하 고려와 합류. 928년 金神의 60호로부터 시작하여
  934년 발해국 태자 大光顯의 이끈 유민 수만명이 고려로
  朴升이 이끈 유민 3천여호가 고려로 979년 수만명이 고려로 유입등 이민사건이 사서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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