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멸망이 주는 교훈 정리 솔새김남식
1. 간추린 백제역사
백제가 건국후 234년 고이왕까지는 성장기를 지나서 346년 근초고왕 때가 최대 전성기를 맞는다
그후 차츰 쇠퇴기를 맞이하여 455년 개로왕이 아차산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면서 위례성이 화염에 쌓이게 된다
눈물을 머금고 위례성을 버리고 웅진천도를 해서 501년 무령왕때 부터 중흥을 꿈꾸었지만
결국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백제는 678년으로 문을 닫게 된다
황산벌 싸움에서 출진에 앞서 자기 손으로 처자식 목을 벤 계백장군의 각오도 비장하지만
잔혹하기는 오히려 어린 관창(官昌)을 희생의 제물로 삼아 신라군의 사기를 돋운
김유신의 책략이 더 야비한지도 모른다
백제의 최대의 전성기 346년 13대 근초고왕 40년간 요동반도.일본. 대만은 물론 중국남부 지방까지
영토를 넓히고 고구려를 침입해 평양성에서 근수구왕이 371년에 고국원왕의 목을 베게 된다
그후 104년이 지난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남침해서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아차산 전투에서 개로왕을 죽이게 되는데
500년의 백제 도읍지 위례성을 불태우며 조부 고국원왕의 한을 풀어 주게 된다.
문주왕이 신라 지원병을 이끌고 위레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잿더미가 되었고 후일을 기약하며
475년에 웅진천도를 해서 백제를 재건하려 했지만 권력 암투로 문주왕은 물론 그 아들 삼근왕까지
웅진시대 63년 동안 3명의 왕이 피살되는 혼란을 겪었고 24대 동성왕 때 부터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웅진시대를 여는 25대 무령왕(개로왕 아들)은 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제동을 걸어
약 67년간 백제를 강국으로 재 도약시겼으며 이어 등극한 26대 성왕은 매우 영리하여 백성에게
사랑받는 왕으로써 잃었던 한강유역을 되찾자 새로운 시대를 열고저 538년 사비로 천도하게 된다
그러자 위험을 느낀 신라는 나제동맹을 깨고 554년 신라와 관산성(옥천)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게 된다
.
27대 위덕왕 (554~598)은 성왕의 아들로 아버지가 전사 하자 죄책감으로 중이 되려고 하자 신하들이 말려서
뜻을 굽히고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가야와 왜와 함께 신라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으로 다시 밀리게 되면서 가야가 오히려 신라에 흡수하게 된다.
그후 28대 혜왕 , 29대 법왕도 왕위에 올랐으나 피살 되는등 왕들이 일찍 내분으로 불운을 맞게 되면서
그때 부터 백제의 조짐이 더 좋지 않았던 것 같다
.
이어서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 30대 무왕이 왕위에 올라 뛰어난 외교를 통해서
우리가 많이 알고있는 '안시성싸움'과 '살수대첩' 양만춘과 을지문덕등 수나라와 고구려가 서로 싸우게 되는데
계속되는 전쟁으로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백제에게 뺏았끼게 된다 .
.
당시 중국은 고구려 전쟁에서 패한 수나라를 당나라가 618년 흡수 통일을 하게 되는데
이때 백제는 당과 등을 돌리고 새로운 동맹국인 고구려와 왜와 함께 신라를 더욱 박차게 공격하여 승전 하지만
향후자만심에 향략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방심한 틈을 탄 신라는 김춘추에 외교력으로 당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소정방 13대군이 출병하고 계백의 5천 결사대는 김유신 5만의 신라군과 황산벌에서 백제의 운명이 달린
풍전등화같은 전투에서 성충,흥수의 충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항전하는 의자왕에게 태자들 사이에서도
알력이 생기고 대신들과 논쟁하는 사이 사비성은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
의자왕은 사비성이 포위당하자 웅진성으로 피신하여 후일을 기약했지만 백제 역신 '예식진'이라는 자가
의자왕을 잡아다 당에게 넘겨 주자 소정방 앞에서 술을 따르며 굴욕적인 항복식을 하게된다
칼로 목을 찔러 자결을 시도 하지만 이제와서 후회 한 들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해 8월 의자왕은 13,000명 포로들과 함께 소정방에 의해 당나라로 끌려가게 되는데
지친 여정과 나라를 빼앗겼다는 허망감에 병사를 하게 된다.
그의 시신은 낙양성(시안) 망산에 어딘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며 1400년이 지난
지금은 흔적도 찾지 못하고 현대에 와서 능산리 고분에 태자와 함께 가묘가 만들어져 있다.
망산은 흔히 사람이 죽으면 북망산천을 간다고 하는 바로 그 산 이다
백제가 멸망할 즈음 대략 20만명의 백제인이 일본으로 건너 갔다고 하는데 세자 부여풍도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왜의 도움을 받아 백제 부흥을 도모 했지만 663년 백강 전투에서 패전하게 된다
부여용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가는데 백제 패망은 663년 31대 부여풍으로 기술 하기도 한다.
2. 백제의 패망이 주는 교훈.
커다란 대륙에서 뻗어 나온 작은 한반도에서 팻권을 서로 다투던 삼국시대
신라는 태백산맥이 가로 박혀 북으로 영토를 넓히지는 못 했지만 백제는 중국. 일본으로 영토를 넓혔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게 된 이유는 그 당시 신라는 약소국으로 대륙을 꿈꾸는 백제나 고구려가
그들에겐 껄끄러운 존재였기에 동맹을 거절했고 하늘에 신은 결국 신라의 삼국통일에 손을 들어 주었다.
피나는 전쟁 끝에 삼국통일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피폐해진 백성의 굶주림에
인명이 살상 되거나 포로로 잡혀가고 또한 광활한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잃어 버렸다.
승자는 어부지리를 챙긴 당나라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며
어리석은 민족사의 복판에서 백제의 패망이 재 조명되어 민족의 비극을 반성돼야 한다
.
당시 백제로썬 충분히 버틸수 있었으나 내분과 함께 역신의 반란도 한몫을 했으며
김유신, 김춘주를 삼국통일 위업을 달성한 영웅이라 배웠지만 왜 삼국이 연합해서 당을 격파하지 못 했을까?
그 시대를 살지 않았기에 그 참 뜻은 모르겠지만 지금도 우리는 같은 것을 껵고있다
.
특히 찬란했던 고구려의 후예 230년 발해 역사에서도 고려와 연합해서 옛 북방 영토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 중원을 지배할 야망과 의지를 우리 민족은 왜 불 태우지를 못 했을까 잠시 걱정을 해본다.
특히 500년 하남 위례성 등 678년 백제 역사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불행한 역사는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주절주절 kns
3. 부소산성 솔새김남식
부소산성은 부여를 대표하는 관광지이며 유적지로써
538년 26대 성왕때 사비천도 이래 660년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역사를
사비성과 함께 했으며 패망과 동시에 사비성은 모두 불에 탔다.
찬란했던 백제문호를 세계에 알리고자 1994년부터 2010년까지 총 17년간 7000억을 들여서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옛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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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은 해발 106m의 낮은 산이지만 사계절 짙은 녹음을 만들어 맑은 공기와 살랑거리는 강바람을 느끼며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 평시에는 왕궁의 후원이었으며 전쟁시 도성을 방어하는 역사적인 장소였다
부소산성 관람시간은 2시간여 필요하며 고란사까지 내려와서 되돌아 가지않고
나룻배를 타고 구드래나루터까지 나오게 되는데 산성 입장료 2000원 뱃삯 편도 4000원이 필요하다
부소산에 올라가 낙화암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백제의 역사가 아련하게 떠 오르고
다른 왕조와 달리 곳곳에 패망의 상흔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서
상상력이 빈약한 사람이라도 가슴속으로 흘러드는 애절한 역사에 젖지 않을 도리가 없는 곳이다..
부소산 성문을 들어서서 10여분을 지나면 삼충사 사당을 만나게 된다.
삼충사는 계백과 성충 흥수의 세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이다
성충은 좌평으로 왕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바로 잡기 위해 애쓰다 투옥되었으며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과 백강과 지키라고 귀양지에서 간곡하게 당부했다고 전한다
군창지(軍倉址)는 백제시대 군량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로 1915년 땅속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됨으로써
660년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사비성이 공격을 받고 망할 때 모두 불에 타버린 것으로 짐작되고 있으나
현재 정확한 증거는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바위 절벽에 서있는 백화정 그 아래 낙화암은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될 때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으로 당시 삼천궁녀라는 말은
궁녀를 포함하여 적에 쫓기는 민초들과 아군들에 참혹한 모습을 표현하지 않았나 그리 사료된다.
고란사는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세웠다고 하며
그 뒤 벼랑에서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여 고란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백마강 유람선
우리의 옛가요 '추억의 백마강'과 '신라의 달밤'의 가사를 보면 패망의 역사가 어떤 것 인가를 잘 표현해 주는데
부여에서는 슬픔을 노래할 당시, 서라벌에서는 술잔으로 흥을 노래하고 있었을 것으로 사료가 된다.
그러나 때로는 패망의 역사를 드라마 소설에서 일부 과장된 표현도 없지않아 있다
추억의 백마강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아래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데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
신라의 달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옥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 신라의 밤이여 아름다운 궁녀들 그리웁구나 대궐뒤의 숲 속에서 사랑을 맺었던가.
님들의 치마 소리 귀속에 들으면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부소산성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의자왕 백제 제31대 [재위 641∼660년]
그는 왕의 시호가 없으며 의자(義慈)는 휘(諱)이다
신라의 선화공주와 무왕의 맏 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33)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었다.
642년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이어 윤충(允忠)으로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함락시켜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 품석(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듬해에도 당항성(黨項城:남양)을 빼앗아 신라가 당(唐)나라로 가는 입조(入朝)의 길을 막는 등 국위의 만회에 힘썼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성충(成忠) ·흥수(興首) 등 충신의 간(諫)을 듣지 않고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660년 나 ·당(羅唐) 연합군의 침공을 맞게 되었다.
계백(階伯)의 황산벌싸움을 마지막으로 백제의 방어선이 모두 무너져 수도 사비성(泗沘城)이
나 ·당 연합군에 포위되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하여 후일을 기약했지만
백제 역신 '예식진'이라는 자가 의자왕을 잡아다 당에게 넘겨 주자
소정방 앞에서 술을 따르며 굴욕적인 항복식을 하게된다
그는 태자 등 1만 2000여 명과 함께 소정방(蘇定方)에게 끌려 당나라에 압송 되었다가
그 곳에서 병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백마강(1976년) 노래주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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