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조민수 장군

시인김남식 2006. 3. 22. 10:32

조민수 장군

 


 

 

조민수 장군(曺敏修 將軍)의 유적(遺跡) < ? ~ 1339 (공양왕 2) 고려말기의 무신. 본관은 창녕 (昌寧),

1361년 (공민왕 10년) 순주부사로 있을때 여러장군들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쳐 2등 공신에 올랐다. 

이듬해 양광도 도순문사를 거쳐 전리판서. 동지밀직사사 등을 역임하였다.

1368년 명나라가 원나라의 서울인 연경(燕京)을 포위 하자 좌상시(左常侍)로서

의정주등처안무사(義靜州等處安撫使)가 되어 명나라의 위협에 대비하였으며,

충근보리공신(忠勤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다음해에  밀직부사로서 전라도 조전원수를 겸임했고,

1385년 판문하부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 왔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 이북지역의 회수를 위해

이른바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하자 이에 대항해 고려 정부는 요동정벌을 계획 했는데,

이때 그는 요동정벌 군의 좌군도통사(左君都統使)를 맡았다.

 

 

우왕 초 경상도 도순무사로서

김해, 진주 등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고, 지문하부사. 서북면 도체찰사를 거쳐 1379년

(우왕 5년)엥 문하평리, 1383년에 문하시중에 올랐다.

이때 軍費를 위해 모든 사급전(賜給田).

구분전(口分田). 사사전(寺社田)의 전조( 田租)를 거둘것을 건의 하였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으며,

얼마 뒤에 파직 되어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결국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해

우왕을 폐위 시키켰고, 그 공으로 좌시중에 올라 우시중인 이성계와 함께 

조정을 주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종실(宗室) 가운데서 사람을 택하여

왕으로 삼으려 한 데 대해 그 는 당시 명망이 높던 이색(李穡)의 도움으로

우왕의 아들 창(創)을 왕으로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공으로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의 호를 받고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 서해도, 교주도 도통사에 임명 되었다.  

그러나 이미 군사면 뿐 아니라 신진사류들과 손을 잡아

정치적 기반을 다져 놓은 이성계는 1389년(창왕 1년) 사전(私田) 개혁문제를 제기했고,

이에 반대하던 그는 대사헌 조준(趙浚) 등의 탄핵으로

창녕에 유배 되었다.

 

그해 창왕의 특사로 풀려 나왔으나,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우왕의 철통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성계 일파에 대항 하다가 서인(庶人)으로 강등 되었고,

다음해에 다시 창녕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조민수 장군의 위패 사당

사당의 출입은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고 관리를 위해서 문중에서 출입을 금하고 있으며

제례때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문을 연다고 하였다.

역사 속에 묻히어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찾지를 못하고 근대에 와서 알게 되어

아직도 문화재로 서의 등록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보존상태:

묘가 실전되어 근대에 사료와 구전을 바탕으로 되찾게 되어 지금은 그의 사당도 묘역 근처에 있고

관리인도 있어 보존이 아주 잘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은 되지 아니 하였지만 우리 역사의 비중 있는 인물의

묘역이니만큼 소중한 토자원으로 생각된다.

 

 

○찾아 가는길: 중부내륙 고속도로 창녕 인터체인지 내려서

좌회전->오리정사거리에서 좌회전-> 우포늪 방향으로 약5킬로 지나서 대합면 신당마을에서

약500 미터 운행후 조민수장군 묘역으로 우회전 하면 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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