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흥선대원군묘

시인김남식 2014. 4. 20. 19:45

흥선대원군(1820∼1898년) 솔새김남식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원래 신후지지(身後之地, 살아생전에 정해둔 묏자리)로 마련한 初地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 (現 마포구 공덕동)에 1898년 묻혔으나 이후 1908년 파주시 운천리로 옮겨지게 된다.


공덕동에는 대원군이 1870년 수장(壽藏생전에만들어놓은무덤)을 겸하여 만들어 놓은 별서 아소당(我笑堂)이 있었다

1898년 운현궁에서 대원군 내외가 세상을 뜨자 이곳에 合葬墓가 만들어 졌다가 1908년 파주로 이장되었다.


아소당(我笑堂) 건물은 1962년 해체되었고 일부가 봉원사로 옮겨졌다. 

아소당터 알림 표지석은 현재 공덕동 디자인고등학교內 있지만 찬밥신세이다.   


그런데 도시 팽창으로 인하여 학교와 아파트에 떠밀려 문화재가 사라져 잃고 있어서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러나 표지석 역시 제자리를 잡지않은 모습으로 學校內 있어서 안타깝다. 


그리고  "공덕리금표" 표지석, 역시 공덕역 3번 출구 바로앞에 있는 롯떼캐슬아파트숲 작은공원 한쪽에 있다.   


마포 지역에는 대원군을 별장을 기억 할 수 있는 '아소정' 이름을 이용한 식당들이 있다  

.

1908년 파주로 옮겨간 대원군묘는 군사시설이 들어 서면서 다시 1966년 다시 마석으로 옮겨지는 등

세번의 移住가 말년에 격었던 파란만장한 생애와 무관치 않을수 없다


흥선대원군묘는 마석역 1번 출구를 나와 경춘가도 마석사거리를 건너서면 찾아가는 이정표가 있어서 찾기가 쉽다 


흥선대원군 묘는 화도읍 창현리에 가족과 함께 있으며 마석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강화도령으로 왕위에 오른 철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고 흥선군의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살아있는 대원군에 봉해지고 정권을 잡게 되지만 後에 며느리 명성왕후와 정권 다툼을 하면서 빛을 잃게 된다   .

 

세제를 개혁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펴기도 하였으나 경복궁을 중건하느라 국력을 소비하고 

서구 열강의 강화 요청에 쇄국정책으로 맞서다가 1873년 집권 10년만에 명성황후 알력으로 정계에서 물러났다가


1882년 임오군란으로 복귀하나 청에 납치 되었다 풀려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이어오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마석 사거리 대로변에서 山 골짜기 끝 안부쪽까지 1.5키로 걸어 들어 가서야 뒤쪽 구릉위에 산소가 우뚝 나타난다


대원군의 묘 좌우로는 아들, 손자등 그의 가족 왕족들 묘를 알려주는 비석들이 여러개 있다.


흥선대원군 신도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 ~ 1898년)


본명은 이하응(李昰應)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상태에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1843년 흥선군에 봉해졌으며 1846년 수릉 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똑똑한 왕손을 제거하자 일부러 건달 노릇을 하며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10여년간 국정을 이끌었다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왕권의 재확립을 위해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했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쇄국정책으로 대응하였으며 또한 서원을 철폐 및 정리하고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고 박해했다.



특히 추락한 왕권 바로세우기 위해 1865년 경복궁 중건공사를 시작해서 1868년에 완성했다. 이때 원납전을 강요했고 악성화폐인

당백전을 발행하고 통행세까지 거두자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지만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 법궁으로 경복궁이 완성된 것은

일괄된 정책과 용기있는 결단 때문이었으며 지금의 대한민국 관광 일번지가 된 것은 순전히 대원군 덕분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 경복궁이 없었다면 내세울수없는 관광 볼모지가 아니었을까. 목숨과 바꾼 중국에 만리장성이 있듯이 .... 


그러나 1873년 민비의 요청으로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면서 흥선대원군은 10년의 권세를 접고 운현궁으로 물러났다

이때부터 명성왕후가 정치 전면에 나서 민씨일가의 세도정치가 시작이 되었고

민비는 일본.청나라. 러시아 세나라 틈에서 중심을 잃은 외교정책을 펴 나가다가 일본에게 미움을 받고 불운을 맞는다       


한편 대원군은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과 고종을 폐출하는 정변을 기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부왕이라는 이유로

문책은 유보되었고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이를 갈았지만 모두 헛일이었다.

어느덧 칩거한 지 10년 1882년 임오군란으로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민비의 술책에 청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1885년 3년만에 귀국한 대원군은 운현궁에 칩거하며 재기를 다시 노렸으나 고종이 왕도를 지키지 못하고

명성황후에게 잡혀산다하여 고종 폐위를 시도하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동학란과 갑오경장을 거처 1895년 을미사변에 까지 깊숙히 관여를 하게되자 그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을 정하여

대원군은 유폐 생활을 강요 당하게 된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은퇴를 해서 다시 양주로 가서 은거하다가

1898년 1월 부인 여흥부대부인의 죽음을 본후 그해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 정침(正寢)에서 

민비가 죽은 지 3년뒤 79세의 나이로 망해 가는 왕국을 바라 보며 여한의 숨을 거두게 된다


명성황후의 죽음을 조정했던 비정한 아버지의 장례식에 아들 고종은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권력의 세계에서 맴돌던 풍운아 흥선대원군은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되었고, 헌의(獻懿)를 시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었다.


조선 말기에 개혁정치를 실시한 흥선대원군 이정표가 있어서 인지 찾아 오는 이도 많았고

누군가 가져 온 꽃다발도 놓여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정치적인 야망과 뚝심이 있었기에 재정혼란 속에서도 경복궁을 재건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관광자원이 부족한 오늘날 조선국에 면보를 보여 줄 수 있어서 이것은 대원군의 큰 치적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이 파헤친 경복궁의 원형 복원은 2045년까지 마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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