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 화진포와 역사의 세 인물 별장 솔새김남식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 호수 둘레를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 별장, 이기붕 별장. 김일성 별장 세곳이 있다.
공교롭게도 한시대 남과 북의 지도자가 화진포라는 동일한 장소에 별장을 두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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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 호수
화진포는 군청 소재지인 간성읍에서 7호선 국도를 따라 현내면 통일전망대로 가는 중간에 있다
해수욕장의 뒷쪽 화진포 호수는 넓은 갈대밭 위에 수천 마리의 철새와 고니가 날아들고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주변경관이 빼어나 옛부터 주변에 유명한 별장들이 많았던 곳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별장과 이기붕 전 부통령별장, 북한 김일성 별장이 안보 전시관으로 남아있다
강물에 실려온 모래가 바닷물에 부딪히면서 길게 모래톱을 형성하여 생긴 자연호수로서 면적 72만평 둘레가 16㎞나 되는 동해안 최대 호수로 호수 주위에 피어 있는 해당화는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어
고성군의 꽃으로 지정되어 있다
넓은 백사장과 아름다운 송림으로 유명한 화진포는 동해안에서 모래빛이 하얗기로 유명하며
최적의 해수욕장으로서 수심이 얕고 해저가 청아하여 주옥같은 백사장이 명사십리(明沙十里)를 이루고
있는 모래톱을 사이에 두고 호수와 해수욕장이 나누어져 있다
겨울이 되어 호수가 얼고 무성했던 갈대가 쓰러지면 황금벌판과도 같아 옛날에 봉이 김선달이 서울부자에게 큰 평야라고 속여 이 호수를 팔았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화진포는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 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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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별장은 바다를 등지고 화진포호가 가까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별장은 1954년에 신축된 뒤 1961년에 폐허가 되었다가 1999년 전시관으로 복원 외벽이 자연석으로 꾸며진 89m²(약 27평)의 단층 건물로 별장답지 않게 아담하고 소박하며 약간은 허름하게 보인다. .
내부는 침실과 집무실로 쓰이던 방 두개와 거실로 구분되어 있으며 유족들에게 기증 받은 물품들로
전시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기거하던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옛 별장터에 원형대로 신축, 복원한 이승만 별장은 청소년 시절부터 해외 독립운동 전개시기, 초대 대통령 취임이래 6.25전쟁을 치르고 퇴임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기까지 관련 역사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 대통령 부부가 사용했던 침대, 낚시도구, 안경, 장갑, 여권, 편지 등 유가족이 기증한 유품 53점이 전시돼 있다. 단출한 가구와 소박한 물건들 그리고 생전의 사진들로 그 당시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사용했던 침대와 서재, 두루마기, 석사와 박사 학위증서, 친필휘호 등 유가족이 기증한
유품이 놓여 있어 그의 애국심과 검소한 생활상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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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은 1910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뒤 선교사를 만나러 화진포에 왔다가 풍광에 반했는데 6·25전쟁 이후 이 지역을 되찾자 선교사 집이 있던 자리에 별장을 지었는데 1954년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가 단층 27평으로 신축, 이 대통령에게 헌사했고 이 대통령 부부는 수시로 이 곳에서 여름 휴가를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용하지 않아 건물이 낡아 크게 훼손되어 1961년 철거 되었다가
1999년 육군이 바로 위쪽 언덕에 58평 규모로 복원해 전시관으로 운영 중이다.
별장 건물은 소박하고 단출하지만 별장안에서 밖을 바라보면 주변의 울창한 송림과 한데 어우러진 화진포의 두개의 호수가 한눈에 보여 화진포의 세 별장 중 가장 경치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國富兵强 永世自由(국부병강 영세자유)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면 영원히 자유를 누리리라
이승만대통령의 자작 한시
김일성별장 화진포의 성
화진포는 38선 이북 지역이기 때문에 6·25전쟁 이전에는 북한 땅이었다.
김일성 별장은 화진포콘도 오른쪽 바닷가 언덕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바다와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김일성은 1948년부터 50년까지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 등 가족과 함께 하계 휴양지로 화진포를 찾았다고 한다. 48년 8월 당시 6살이던 김정일이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제프 소장의 아들과 별장입구에서 어깨 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이를 입증한다
1937년 일제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별장이 있던 원산의 휴양촌을 비행장 부지로 사용하기 위해 강제 철거하기로 결정하고 그 대신 그들에게 제공한 장소가 이곳 화진포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한 캐나다 선교의사 셔우드 홀이 1938년 히틀러 공포정치를 피해
망명해 온 독일인 건축가 베버에게 화진포 암벽 위에 별장을 짓게 했다.
회색돌로 지은 작은 원통형의 집인데 그 모습이 ‘독일의 성’을 닮아 ‘화진포의 성’이라고도 불렸으며 6·25전쟁 때 훼손된 것을 고성군이 2005년 3월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6·25전쟁 북한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이기붕 부통령 별장
화진포 사구의 숲 속에는 부통령을 지냈던 이기붕의 별장이 있다.
1964년에는 육군사령부의 휴양소로 운영되다가 1999년 7월 전시관으로 개수하여 운영되고 있다.
192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어 선교사의 주거 공간이었고, 해방 이후 북한 공산당 간부
휴양소로 사용해 오다가 휴전후에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가 개인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
박마리아는 생전에 인근 고성군 대진읍에 대진교회를 세우고 자주 이 곳을 찾았다고 한다
집은 각진 일자형의 평면은 단순하게 구간을 나누어 집무실과 응접실 등을 갖추어 놓았으며
주전자, 촛대, 문갑 등이 보관돼 있다.
이기붕 호는 만송(晩松).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오와 주에 있는 데이버대학 문과를 졸업했다. 뉴욕에서 허정 등과 함께 〈삼일신문 三一新聞〉을 발간했으며 1934년 귀국했다. 1945년 이승만의 비서가 되었고, 1946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대한적십자사 등의 이사가 되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 시장, 1951년 국방부장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 자유당 창당에 참여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민의원 의장을 거쳐, 1960년 3·15선거에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관계·정계에 재직할 때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을 등에 업은 그의 정치적 전횡(專橫)은 민원(民怨)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청년학생들의 4·19혁명으로 부통령을 사임하고 경무대(景武臺)에 피신해 있다가 장남 강석(康石)의 권총으로 전가족이 자살했다
화진포 전설이야기
화진포 자리는 옛날 이화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자의 땅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한 스님이 그의 집에 와서 시주 하기를 권했지만 이화진은 시주 대신 똥을 퍼부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며느리는 시아버지 몰래 쌀을 퍼다 주었는데 이때 스님은 며느리에게 이곳에 있으면 화를 입을 것이니 자신을 따라 오라고 하였다. 스님을 따르던 며느리가 송정리 고청고개에서 뒤를 돌아보니 자신이 살던 집과 그 일대는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스님은 온데간데 없었다. 절망한 며느리는 그곳에서 목을 매었다. 그렇게 생긴 호수는 이화진의 이름을 따 화진호가 되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바람이 자고 물결이 일지 않을 때는 물속에 담과 집이 보인다고 하네요.
(옛날에 많이 듣던 내용)
금구도(金龜島)
금구도는 화진포 해변에서 40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1,000여평 면적의 바위섬으로 거북 모양을 닮아서
거북섬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여름에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너가 해초, 전복 등을 따며 해수욕을 즐기고
겨울철에는 천연기념물 201호인 고니를 비롯한 철새의 휴양지이다.
이곳은 신라시대 수군의 기지로 사용해 해안을 지키던 금구도성지(高城金龜島城址)로 섬의 정상부인
약 45m 높이의 고지를 중심에 두고 해안선의 자연 지형을 따라 화강암을 이용 석축으로 축조하고, 성벽 상단은 흙을 깎아내고 길을 낸 흔적이 200여m 가량 뚜렷이 남아 있고 북쪽의 암석 저지대는 잔돌끼움 쌓기의 협축법으로 석축한 외성이 3개 구간에 남아 있는 현재 남아있는 석축의 길이는 약 60m, 높이 170~230㎝, 협축 벽간 거리 약 350㎝이라고 한다. 해송 군락이 있는 부근에서 확인된 건물지(建物址)는 대나무가 우거져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으나, 건물의 주초석(50cm× 50cm)과 기와편, 토기편들이 확인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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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광개토대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으나
좀 더 학계의 연구가 필요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