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김남식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 (1875.3.26 ~1965.7.19 )
이승만 박사는 황해도 평산군 능내동에서 조선왕실의 후예 양녕대군(세종대왕의큰형)
16대 손으로 선비 집안 이경선옹의 6대 독자로 탄생하였다.
어머니 김씨가 이승만의 나이 두살 때 이승만을 잘 교육 시키고 훌륭히 성장 시키기 위해
한성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동작동 지덕사(양녕대군사당)옆에서 살며 비가 오지않아
가물때 기우제를 지내던 우수현의 우자와 남녁남(南)자를 따 호를 우남이라 지어 주었고
그의 어머니 김씨는 이승만을 18세까지 가정과 서당에서 철저한 유교적 정신교육과 한학을 가르쳤다
그럼으로 해서 이승만은 서예와 한학에도 통달했다.
이승만의 교육
1895년 이승만이 만 19세가 되던 해 서울의 배재학당(지금의 배재고등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서재필박사와 배재학당 설립자인 아펜젤러(Appenzeller)) 등 빼어난 교사들에 의해 영어교육과
신학문을 접하게 되면서 서구의 민주적 정치사상에 눈 뜨게 된다.
당시 구한말 봉건사회를 반대하는 사회개혁운동을 하다 1899년 한성감옥에 투옥되어
5년 동안 죽을 운명에 처했으나 민영환 선생의 도움으로 출옥하였다.
1905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죠지워싱턴 대학에서 국제법학 학사학위, 하버드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
프린스턴 대학에선 종교철학 석사학위와 1910년 동대학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 5년반 동안에
초 일류대학에서 석사학위 3개와 박사학위 1개를 받는 진기록을 수립 하였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1910년 이승만은 한국으로 귀국하여 YMCA 학감직을 맡아 기독교 청년운동과 교육에 전념 서재필 박사와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가 체포하려 하자 또다시 미국으로 탈출하여
1913년 하와이로 정식 망명하게 된다.
이승만은 그당시 하와이에 거주하던 조선인 동포 5,000 여명을 단합시키기 위해 제일 먼저 민족학교(民族學校)를 세우고 한인기독교회를 창립하였고 1939년까지 하와이 호놀룰루를 근거지로 교육자 내지 준교역자로서 한인동포지도자 역할을 할때 1차 세계대전이 종결후 3.1운동이 터지자 해외 한국독립운동 최고 지도자로 부상.
1919년3월29일 로령(현 블라디보스톡)에 수립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겸 외무총장으로
같은해 4월23일 서울에서 선포된 임시정부(세칭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로그리고 1919년9월6일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되어 상해를 방문하자
이승만을 체포하기 위해 30만 달러 현상금을 걸어 일본의 체포를 모면하기 위해 중국인 복장으로 위장
하와이행 화물선 갑판 밑창 시체실에서 20여일 견디며 하와이로 돌아온 후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의 심한 분열상(당파싸움)에 환멸을 느끼며 1939년 그의 정치무대를
하와이에서 워싱턴 D.C.(Washington D.C.)로 옮기게 된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Korean-Commission to America &;Europe)를 설치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미국 및 유럽국가들의 정계를 누비며 수많은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고
1942년엔 미국정계를 깊숙히 파고들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해방을 절규하며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밀고하자 미친사람 취급당하며 문전박대하자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영문으로 발간하여 1942년7월에 미국 정계에 뿌렸는데
예언이 적중하여 갈은해 12월에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미국이 이승만에 대해 깜짝 놀랐다.
미.일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이승만은 미국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내는 외교활동에 전력하였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과 반탁운동
1946년 10월16일에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은 조선독립촉성 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반탁운동을 벌리던 중 1947년 2월14일에 미국 군정청의 최고 자문기구인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 민주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어 중앙방송을 통하여 모범적 독립국가 건설과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 이라는 연설문을 발표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1948년5월10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제헌국회가 구성되자 이승만은 제헌국회 의장에 당선되어 헌법 제정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아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심의 및 채택에 중요한 역할을 행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 1948년7월에 이승만은 국회의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 그 당시 득표율은 이승만 82%, 김구 18% 였다.
이승만은 1948년7월24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 및 같은해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에서 개회사를 하였다.
반공보루의 구축
이승만의 반공의식은 미국유학 및 망명생활 하는 동안 체질화 되었으며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에 공산정부가 들어서며 반공의식은 더욱 강화되었고 1949년 5월에 민족내 계급간 알력을 조장하고 계급투쟁을 선동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공산주의에 대항할 일민주의(一民主義)라는 정치이념을 제창하여 반공이 대한민국 국시가 되었다.
평등사회의 실현
광복후 이승만은 ‘모범적 독립국을 건설하자’ 라는 방송연설에서 독립국의 건설은 민중의 빈부귀천 남여간의 평등이라고 부르짖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평등주의 이상은 그 후 대한민국 헌법에 국민의 평등권 부분에서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하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라는 조문으로 법제화 하였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에 임하여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자유경쟁을 조장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이상으로 삼아 상공업을 육성시킴으로서 나라의 부강을 조속히 달성시키려는 경제 발전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1954년 이승만박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당시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의 국빈초청을 받아
6.25 전쟁시 미국과 미국민의 성원에 감사하기 위해 미합중국 (USA)을 방문하여
7월28일 미국의회 상,하(상, 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명연설을 하여 열렬한 기립박수를 포합해
33번의 박수를 받는 기록을 남겼다.
6.25사변과 이승만 그리고 맥아더 장군
1950년6월25일 대한민국은 전군에 휴가령이 내려진 아침을 틈타 김일성이 남침을 감행한 것이 6.25 동족 살상의 전쟁이었다.
대구까지 후퇴했던 국군은 1950년9월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간곡한 제의로 북진하다 압록강에 이르러선 쓰고 있던 철모를 벗어 압록강 물을 가득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주던 맥아더 장군의 감격스러운 장면을 우리는 역사속에 영원한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맥아더 장군이 평양에 입성하여서는 군령을 어기고 중국 본토에 폭격을 감행하려다 세계3차 전쟁을 우려하던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 의해 함상에서 해임 당한 후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The Old Soldier never die just feud away) 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하야
1960년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 대통령이 모르는 사이 부패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4.19가 터지게 되자 국방부 장관이 “각하, 데모대는 약간의 피를 보면 금시 진압할수 있으니 작전명을 내려주십시요.” 하자 “내가 국민이 원해서 대통령을 했는데 이제 국민이 원하질 않는것 같으니 내가 물러나면 돼. 피를 보면 안돼. 부정을 보고 항거하지 못하는 국민은 죽은 국민이야.” 하며 하야 성명에 결재후 “각하, 걸어서 가시면 절대 위험하십니다.” 라 경고하던 경호실장을 향해 “나는 내발로 걸어서 이화장까지 갈꺼야.” 하며 걸어서 중앙청 부근에 이르자 돌을 던지며 데모하는 군중들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게 했던 그는 물러날 줄 아는 용단은 오랜 미국생활에서 체질화 된 인애(人愛)주의자 였다.
건국대통령의 서거
1960년 망명이 아닌 한 3개월간 휴양차 하와이를 찾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여행용 가방 4개에 인삼 몇봉지와 선물 받은 금수저 한벌이 전재산으로 하와이에 도착하여 교포의 집에 기거하며 “돈 아껴쓰라, 돈 떨어지면 한국 못가.”하며 이인수 양아들을 독려하던 그가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개인 자격으로 병문안차 방문했을 땐 기력이 소진되어 무슨 말인가 하려고 애를 쓰지만 목만 덜컥 덜컥하고 양눈에서 눈물만 주르르 흘리시던 상황을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국무회의에 보고하는 순간 1965년 7월19일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께서는 승하하셨고 하와이 미 정부에서는 이날을 공휴일로 선포하였으며 건국대통령의 유해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장례식에는 전국에서 수백만의 인파가 모여 애도하던 장례식은 민심(民心) 그대로 였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그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국립묘지에 영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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