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鄭道傳 1342(충혜왕3)~1398(태조7)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학자
태조 7년(1398) 8월 정도전이 남은(南誾)의 소실(妾)에서
대신들과 담소하고 있을 때 이방원이 한밤 중에 쳐들어가 살해된다.
1398년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태조로 하여금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이방원을 전라도로, 이방번(李芳蕃)을 동북면으로 보내려 했으나,
그는 조선건국 공로에도 불구하고, 태조 7년(1398) 8월 26일 이방원이 난을 일으켜
이방원의 배다른 형제 방번·방석·남은·심효생(沈孝生) 등과 함께 살해되어서
종친을 모해(謀害)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정도전은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를 국왕으로 추대 옹립한 다음
국호를 조선으로 변경 조선건국 일등공신으로서
조선왕조의 문물 대부분 만들어 고려와 차별화 하였다.
이러한 차별화를 하게 된 근본 동기는 당시 국제적인 내정간섭과 외침
국내적인 관료사의 부정부폐와 왕조의 국정 수행능력 부재
사원경제의 팽창과 승려의 타락 등으로 고려왕조의 총체적인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조치였다.
결과적으로 새나라를 건설 토지의 국유화를 통한 조세의 안정적 확립과
자립경기반을 구축하여 피폐한 민생을 구제하는 한편
강력한 자주국을 건설하는 것이 그의 평생의 꿈이었다.
짐이 곧 국가라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나라의 주인임을 주장한 정책이라 하겠다.
정도전은 신정제정일치 사회를 꿈꾼 인물이다.
조선개국과 개혁정치 1392년 4월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에게 살해되고 반대세력이 제거되자,
7월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했으며 개국 직후 17조목의 편민사목(便民事目)에 관한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했다.
이어 개국공신 1등으로 문하시랑찬성사·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
지경연예문춘추관사·겸의흥친군위절제사를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장악했으며
같은 해 10월 사은사 겸 계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알렸다
조선은 고려왕씨 왕족과 귀족 25만명을 학살하고 집권하게 된다.
1394년 고려왕족 왕씨일족과 왕후 일족인 전남장흥 임씨일족들이 모두 몰살을 당하는데
이성계에게 건의하여 이를 주도한 인물이 정도전이다.
살아 남은 왕씨는 全氏, 田氏, 玉氏등 여러성으로 이름을 바꿔 살게 된다.
정조대왕은 1791년(정조15) 정도전의 학술을 높이 평가하여 시문집을 간행해 주었고
고종은 1865년(고종7) 경복궁 중건을 계기로 그의 모든 훈작을 복권시겼다.
그래서 정도전의 위대한 정치가, 학술가로서 평가 받게 된다.
정도전 생가 경북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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