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패망과 안보의식
제 1차 제 1차 베트남 전쟁 1946년 ~ 1954년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제 2차 베트남 전쟁 1959년 ~ 1975년
미국과의 독립전쟁을 베트남에서는 30년 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간첩, 빨갱이들 때문에 자유월남이 망한 전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건 틀린 말입니다. 베트남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베트남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베트남은 왕조국가였는데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1885년 베트남 전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속하게 됩니다.
1940년 프랑스는 독일 나치에 패해서 베트남에서의 프랑스 입김은 약해졌는데 이 틈을 타서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치민은 베트민(베트남 민주공화국, 월맹)을 세우고 독립 운동을 전개합니다.
베트민은 1945년 8월 혁명을 통해 프랑스를 쫓아 냈지만,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니
베트남은 다시 프랑스 지배를 받아야 한다며 극동 원정군을 파견합니다.
프랑스 극동 원정군은 사이공에 베트남 괴뢰국을 세워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려 했고
호치민은 이에 맞서 하노이에 북 베트남을 세워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됩니다.
그리하여 1954년 제네바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양측은 치열하게 싸웁니다.
북베트남은 민족의 독립을 주장했고,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제를 폐지하고
국민들에게 공평하게 토지를 분배했습니다.
자신의 땅을 갖게 된 베트남 국민들은 북베트남을 절대적으로 지지했고,
그 결과로 프랑스가 쫓겨 남으로써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는 공식적으로 해체됩니다.
제 1차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제네바 협정에 따라 총선거를 통해 베트남 정부를
탄생시키기로 했는데 프랑스 앞잡이 노릇을 하던 남베트남의
고딘 디엠 장군은 총선거를 거부하고 스스로 남베트남 대통령이 됩니다.
그리고 토지개 혁으로 땅을 분배받은 농민들로 부터 다시 땅을 빼앗고
남베트남의 민족주의 운동가들과 공산 당원들을 대학살합니다.
고 딘 디엠 정권의 이러한 횡포는 미국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남베트남 국민들은 고 딘 디엠 정권에 저항하면서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한 대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며 무장 투쟁을 벌입니다.
1963년 사이공에서 불교 승려가 고 딘 디엠 정권에 항의하며 분신자살을 하였고
미국 내에서도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것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아집니다.
미국의 지원이 약해지자 고 딘 디엠은 군부에게 살해되고
새로 집권한 남베트남의 군사정권이 북베트남과 유화 분위기를 조성하자
베트남을 잃을 것을 염려한 미국은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일으켜 베트남에 대규모 군사력을 투입합니다.
( * 통킹만 사건 : 남지나해를 거쳐 통킹만에 접근한 미 해군 구축함을 북베트남군이
공격했다고 미국이 날조한 사건.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직접적 대규모 군사개입을 위한
구실을 얻기 위해 이 사건을 날조했다.
1971년 미국 뉴욕타임스가 1945년부터 미국이 베트남에서 정치군사적인
공작을 벌여왔음을 기록한 기밀문서인 펜타곤 보고서를 폭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은 북베트남에 100만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하고, 55만명이 넘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베트남 국민들의 게릴라 전술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내에서는 미국은 베트남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 단순한 침략자라는 것과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분노해 반전여론이 높아졌습니다.
결국 미국과 베트남이 정전협정에 합의 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1975년 끝나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6만명이 넘는 군인이 목숨을 잃었고
베트남은 민간인을 포함해 2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나라 군인들도 5천여 명이 전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