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영부인 프란체스카여사
Francesca Donnere (1900. 6. 15 오스트리아 빈 ~ 1992. 3. 19 서울) 향년 92세
오스트리아의 사업가 루돌프 도너의 셋째딸로 상업전문학교를 마치고스코틀랜드에 유학하여
국제 통역과 속기사의 자격을 취득 독어와 불어를 구사하고 무역과 청량음료 공장을 운영한
아버지 사업 후계자로 현장 수업을 받아서
행정과 사무 능력으로 학식과 교양을 갖춘 부잣집 셋째 딸이었다.
1933년 2월 당시 발간된 서적을 통해 한국을 처음 알게 되었으며 어머니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던 중 스위스 레만호반의 뤼씨 호텔에서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사람들로
호텔 식당은 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프란체스카 모녀가 앉은 4인용 식탁 빈자리로
이승만 박사가 합석하여 인연이 된다.
이틀 동안 국제연맹이 다루는 일본의 만주침략 건과 관련하여 만주의 한국동포들이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는 사연을 홍보하고 극동의 평화를 위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러 미국에서 도착하여 각국 대표와 신문기자들과의 면담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이었다.
프란체스카가 다음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전면 인터뷰 기사와 사진을 보고 이승만을 위해 스크랩해서 호텔 안내에 전하고 또 다른 신문에 난 기사도 잘라서 보내자 답례의 차 대접으로 발전했고 어머니는 여행을 중단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 갔으나
프란체스카는 제네바에서 이승만과 서신 연락을 계속하였고 7월 초에는 소련 입국비자를 받으러 비엔나에 온 이승만과 재회 할수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일손과 돈이 한없이 필요한 독립투사를 위해 자기의 시간과 능력을 제공하였고 마침내 1년 3개월후 두 사람은 34살, 59살로 가족의 반대와 동지와 한국 동포의 반발을 받으면서 1934년 뉴욕에서 결혼반지도 여자가 준비하는등 가난한 독립 운동가의 아내로 험난한 인생 행로를 시작하였다.
그녀는 이승만의 내조자로서 미국 본토와 하와이 일대있는 청소년들의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에
힘 썼으며 한인 기독학원의 교사로서도 큰 공헌을 하였으며 1945년 8·15 해방 후
한국에 왔으며 정부가 수립되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령부인으로 검약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조용한 생활을 했다.
남편과 사별한 뒤 고향인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가 지내다가 1970년 5월 16일 환국하여
이화장에서 양아들 이인수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다정하고 이해심 많은 한국 할머니로 살았으며
검소해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해방후 귀국하면서 '이부란' 이름으로 한국인으로 귀화 했으며
오스트리아 수도 빈 중심부 도나우공원 옆에 '프란체스카 도너리 여사길'로 명명된 도로가 있다
한편 오랫 동안 남편의 병 구환을 하다가 졸도했던 관계로 유해와 함께 고국에 올 수 없었던
프렌채스카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 사후에도 하와이에 잠시 거주하다가 그후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친정 동생과 언니의 집을 전전 하다가 1970년 5월 정부의 배려로 永久 귀국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 내한 1967년 07월 17일
이후 청와대가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귀빈으로 초대 되었으며 양자 이인수 내외와 함께
동작동 국립묘지에 남편 이승만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1990년 엠배서더 호텔에서 90회 생일 축하연 때는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던 친지 방문도 받았다.
프란체스카 이승만대통 영부인 영결식 1992년 3월 23일
그리고 1992년 3월 이화장에서 향년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정동 제일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국립현충원 이승만 대통령 묘소 옆에 안장 되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위대한 이승만,
세계인들은 그를 처칠과 드골의 거물 지도자로 칭송하지만 유독 그가 세운 이 나라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그에게 끝없는 증오를 던지고 있다. - 옴긴글 / solsae k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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