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의후궁 숙의윤씨묘 솔새김남식
권좌에서 물러나 최고로 편안한 세상을 즐기며 살다 간 정종 그의 후궁들 묘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젔지만 최근에 발견된 숙의 윤씨 묘가 근처에 있다기에 찾아가 봤다.
숙의 윤씨(1368~1417)는 정종대왕의 6번째 부인이며, 빈으로는 4번째이고,
해평윤씨 대사헌 윤방언의 딸이다.
1368년(공민왕 17) 1월 14일에 태어나 1417(태종 17) 10월 1일 별세하였다.
숙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독정리 (현 고양시 신도읍 오금리) 매현 임좌원에 있다.
재실은 최근에 새로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이 흐로고 여러 차례 병화를 겪어 오는 동안 후손들 모두 흩어져 사는 바람에
정종대왕의 5빈 묘소가 모두 실전 되었으므로 15군 후손들이 개풍군 풍덕 광덕산상
오숙의 단을 봉축하고 춘추로 제향을 받들어 왔다고 전 한다.
그런데 숙의 윤씨 묘소만은 1백여년 전 1886년(고종 23) 봄에 4군파 후손들이 보첩에 의거하여
독정리 일대에 모여 부근 산중을 탐색하던 중에 그 곳에 사는 한 늙은이가 말하기를
"전설에 윤빈 묘소가 인천옹주 묘소 위에 있었는데, 옹주의 외손 함양 박씨가 누대에 걸쳐
입장하였다는 말이 있다."고 하므로 그 인천옹주 묘소를 찾아 보니
그 묘비 후면에 '공정대왕 후궁 해평윤씨 묘 재후좌측 오십보허 즉 방언녀이 군주모야(恭靖大王 後宮 海平尹氏 墓 在後左側 五十步許 卽 邦彦女而 君主母也)'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발견 하였다고 전한다.
이에 봉분을 재봉축하고 매년 음력 9월 29일 4군파 후손들이 모여 향사를 받들고 있다.
위 내용이 비문에 적혀 있다.
정종과 숙의 윤씨의 자녀 인천옹주묘가 이곳에 같이 있다
인천옹주는 아버지 정종의 15남 8녀 중 7녀로 정종의 여섯번째 후궁이었던 숙의 윤씨에서
4남 1녀로 태어났으며 옹주의 남편은 행부사 이관식인데
이관식과의 사이에서는 아들 다섯 명(이인문, 이의문, 이예문, 이지문, 이신문)과
딸 세 명(김기의 처妻, 박중검의 처妻, 정석화의 처妻)을 얻었다
.
찾아가기=> 구파발역에서 장흥행 버스타고 효자동 삼막골 하차 (삼송역 도보 25 분)
조선국 2대 正宗
조선 2대 정종(正宗)과 정안왕후(定安王后)가 묻힌 후릉(厚陵)은 개성(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소재하여 방문이 불가하고 문화유산 등재에도 제외되어 있다.
정종은 2년 2개월의 짧고 불안한 권한 대행 왕 노릇을 마치고 19년을 편하고
자유로운 상왕이 되어 62세의 천수를 누렸다. (부인10명, 17남 8녀를 두었다.)
그는 죽은 후 묘호도 없었다가 1681년(숙종)때서야 비로서 '정종'이란 묘호를 얻었다.
즉 왕으로서의 지위를 상당 기간 인정 받지 못 하였다.
실권도 없고 짧은 재위기간 탓에 내세울 치적도 없다.
정종은 무능한 소인배인가 ?
아니면 자신의 한계와 시대의 코드를 미리 읽은 현명한 선택일까?
좌우간 그는 욕심을 버리고 천수를 누렸다.
정종은 정안왕후 김씨에게서는 사손이 없었으나, 후궁 5인에게서 15왕자 8옹주를 두었다.
즉 대군이나 공주를 생산하지 못했다.
ㅇ, 성빈 池씨 자손으로 ㅡ의평군, 선성군, 덕천군, 임성군, 도평군,
ㅇ, 숙의 奇씨 자손으로 ㅡ순평군, 금평군, 정석군, 무림군,
ㅇ, 숙의 文씨 자손으로 ㅡ종의군,
ㅇ, 숙의 李씨 자손으로 ㅡ진남군,
ㅇ, 숙의 尹씨 자손으로 ㅡ수도군, 임언군, 석보군, 장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