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가요칼럼

단장의 미아리고개 이해연

시인김남식 2013. 2. 23. 20:55

단장의 미아리고개   정리 솔새김남식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625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사람 또는 생사를 모르는 사람 다같이 남편을 그리는 마음은 하나다.

단장의미아리고개는 지금도 많은 국민들이 애창을 하고 있다.

그러기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이 노래를 들으면 서러움에 북받쳐서 울지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전쟁 직후 우리나라에서는 여러개의 예술단체가 왕성한 활동을 하게된다.

연극의 소재는 전쟁을 배경으로한 작품으로 연출하여 무대에 오르게 된다. 
연극이며 악극단이며 써커스 국악단체 등 수 많은 예술단체들이 전쟁에서 받은 상처를 잊고자함에서

아니 우리들의 아픔을 달래고저 함에서 더욱 왕성한 활동을 하지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후 연극무대는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약방에 감초같이 빠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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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거주하며 숨어서 활동하던 공산당원들 인민군이 서울를 침입하자 우후죽순과 같이 여기저기서

지방마다 공산당원들이 팔뚝에 붉은 완장을 두르고 천하에 제세상을 만난 듯이 활개를 치면서

선량한 주민들을 선별하여 인근 산이나 아니면 들판에서 구둥이를 파고는 그곳에다 뾰족한 대나무 창으로 찔러

이는 인간으로서는 차마 볼 수 없는 만행들이 자행되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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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 미아리고개는 야산이었고 공동묘지였으며 인민군과 서울을 뺏기지 않으려고 치열한 전투를 하다가

우리 아군이 많이 전사를 했으며, 또 남쪽으로 피난길에 고개를 넘다가 폭탄을 맞고 희생된 사람도 많았던 고개다.

그래서 한 많은 미아리 고개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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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게 숫한 아픔을 준 이 고개는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으며 옛 모습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졌고 전쟁 미망인들도 긴 세월을 자식들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한 맺힌 슬픔속에 억울하게 살아왔다

돈암동에 위치한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원이름은 '되너미고개'라 합니다.

되너미란, 병자호란때 되놈들이 이 고개를 넘어 쳐들어 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또 다른 말은 이 고개가 의정부까지

통하는 길목에 있는 마지막 고개로 지금은 많이 낮아 젔지만 워낙 험하고 높아 일을 마친뒤 한양으로 오려면

되넘을 수밖에 없어 그렇게 부르게 됐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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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일제 때 미아동에 공동묘지가 생기면서 사람이 죽으면 상여에 실어 이 고개를 넘어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히니

가족들에게는 더없이 한스런 고개였으며 6.25때는 수많은 저명인사, 애국지사들이 이곳을 통해 북으로 끌려가서

다시는 못 돌아오게 된 고개가 되기도 했다 .



단장(斷腸)의 미아리고개에서 단장이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의 슬픔을 말하는데 그때가 1950년 9월초였다고 한다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내는 할 수 없이 어린 딸과 피란길에 나섰다.

서울 미아리고개를 막 넘었을 때였다.

허기를 견디지 못한 어린 딸이 자욱한 화약연기 속에 숨을 헐떡이다 그만 명줄을 놓고 말았다.

오열을 토해내던 아내는 정신을 차려 딸의 시신에 간신히 흙을 덮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남편과 재회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였다

6·25전쟁이 끝날 무렵인 어느 겨울날 남편은 아내와 함께 딸이 묻힌 미아리고개 근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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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딸의 무덤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얕게 묻어서 이리 저리 발끝에 차이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을 것이라고 여겼다.

남편은 비통한 마음에 아내의 손을 붙잡고 한참동안 흐느꼈다. 저절로 한 편의 시가 만들어 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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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고개는 한국 전쟁 당시 서울 북쪽의 유일한 외곽도로였기 때문에 전쟁 발발 초기에 인민군과 국군 사이의 교전이 벌어진 곳

인민군이 후퇴할 때 함께 데려간 사람들도 가족들은 이 곳에서 마지막으로 배웅해야 했다.

작사가 반야월은 자신의 어린 딸을 전쟁 중 피난길에 잃은 개인적 경험과 연결지어 이별이라는 주제로 가사를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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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떠난 이별 고개로 시작되는 이 노래의 가사는 매우 구체적이며 애닯은 사연을 담고 있는데 

철사로 손을 묶이고 맨발로 다리를 절면서 뒤를 자꾸만 돌아보며 북조선으로 가는 남편의 모습을 묘사하고,

기다리는 부인은 남편이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란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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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돈암동 미아리고개 정상에 위치한 소극장 아리랑아트홀에 노래 가사를 새긴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노래 이해연


1절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메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꼭꼭
      묶인채로 뒤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끌려 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대사 - 주로 연극무대에서 많이 사용함)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던 그 때 그날 나는 당신이 떠나시는 모습을 뒤로 한 채 어린 것을 등에 업고
    폐허가 된 거리를 헤메이면서 한없이 흐르는 눈물로 어린것의 두 뺨을 적시곤 했답니다
    여보! 우리는 왜 한 핏줄이요 한 형제이거늘 왜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를 증오해야만 한단 말입니까?
    우리들의 젊은 날들은 아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채 이젠 백발이 되었어요
     여보 !  제발 백발이 되었드래도 좋으니 꼭 살아만 계세요
     머지 않아 우리 민족이 서로 만나 한 자리에 모이는 날 우리는 서로를 얼싸 안고

     마음껏 자유를 외치면서 행복하게 살 날을 다짐하면서 다시는 이 땅 위에 우리와 같은 비극이

     없기를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빌겠어요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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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 섣달 기나긴 밤 북풍 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 오소 울고 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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