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김씨 파벌 씨족史 |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의 아들들 중 셋째 아들 영분공(永芬公) 김 명종(金 鳴鍾)과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 은열(金 殷說)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성씨다. 여기에 세계(世系)는 알 수 없는 장군 김순웅(金順雄)의 후손들도 경주(慶州)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김(金)씨는 크게는 수로왕계(首露王系)의 김씨(金氏)를 제외하고는 모두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다. 신라에서 김(金)씨 왕계(王系)가 내려오면서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인 강릉김씨(江陵金氏)처럼 도중의 인물을 분관조(分貫祖)의 세계(世系)는 정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중요한 문제로써 처음에 차지하게 된 위치에 의하여 고려시대 5백년간 더 멀리는 조선 5백년 간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왕건(王建)은 큰 딸 낙랑공주(樂浪公州)를 경순왕 김부(金傅)에게 부인으로 주었고, 김부(金傅)는 백부(伯父)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왕건(王建)의 후비(신성왕후(神成王后))로 들여 보낸다. 두 나라 왕실간의 정략결혼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안종(安宗)(욱(郁))의 아들 현종(顯宗)이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더욱 굳게 된다. 경종(景宗)의 비 헌숙왕후(獻肅王后)는 김부(金傅)의 딸이었다. 이에 경종(景宗)은 즉위하자 상부(尙父)ㆍ도성령(都省令)의 호를 더하고 식읍(食邑)을 1만호로 늘린다. 신라의 왕족은 고려조에서도 큰 세력을 형성,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고려 왕실이 현종(顯宗)의 후손에서 이어졌으므로 고려왕실은 신라왕실의 외손이라고 한다. 고려 인종조의 김부식(金富軾)대에 이르러 가문의 성세는 절정에 달하였다. 문신(文臣)의 관을 쓴 자는 남김없이 죽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주김씨(慶州金氏)도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무인정권 수립 후인 명종조에 경주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신라 부흥운동이 무인정권에 의해 진압되어 신라계 출신 세력들은 큰 피해를 보아 세력이 위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당수의 문벌 귀족은 무인정권과 혼인관계 등으로 맺어져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김균(金稛)이 이성계(李成桂)의 혁명에 동참, 개국공신(開國功臣) 52명에 참가 하였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이성계(李成桂)의 휘하 출신인 김인찬(金仁贊)도 경주김씨(慶州金氏)의 후손인데,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오늘날에 까지 대표적인 문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그 숫자도 1백 80만명 이상 이므로 분파도 많다.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이 대안군파(大安君派), 김순웅(金順雄)의 후손이 장군공파(將軍公派)로 3분(分)된다.
11세손 김인경(金仁鏡)을 파조(派祖)로 하여 명암공파(明庵公派)라 한다. 김인경(金仁鏡)의 후손에서 김충유(金冲裕)의 후손이 두계공파(杜溪公派), 김충한(金冲漢)의 후손이 수은공파(樹隱公派), 김충보(金冲保)의 후손이 시어사공파(侍御史公派), 김충익(金冲益)의 후손이 참찬공파(參贊公派). 김충원(金冲源)의 후손이 밀직공파(密直公派), 김천서(金天瑞)의 후손이 월성부원군파(月城府院君派), 김생수(金生水)의 후손이 호조참의공파(戶曹參義公派), 김상한(金相漢)의 후손이 부사공파(府使公派), 김정심(金正深)의 후손이 현령공파(縣令公派), 김남보(金南寶)의 후손이 병조판서공파(兵曹判書公派), 김남분(金南賁)의 후손이 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公派), 김남길(金南吉)의 후손이 평장공파(平章公派), 김남귀(金南貴)의 후손이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이다.
김장유(金將有)의 후손이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이고, 거기에서 다시 김황(金黃)의 후손이 참교공파(參校公派), 김적(金赤)의 후손이 사직공파(司直公派), 김광(金光)의 후손이 장암공파(壯菴公派), 김정(金淨)의 후손이 충암공파(冲菴公派)이다.
김경손(金慶孫)의 후손이 문간공파(文簡公派) 김덕재(金德載)의 후손이 병판공파(兵判公派),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 백촌공파(白村公派), 김존일(金存一)의 후손이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김인찬(金仁贊)의 후손이 익화군파(益和君派)로 나누어졌다. 김인관(金仁琯)의 후손은 태사공파(太師公派)이다. 거기에서 다시 김자정(金子汀)의 후손이 전서공파(典書公派), 김자수(金自粹)의 후손이 상촌공파(桑村公派), 김자공(金自恭)의 후손이 우재공파(愚齋公派), 김수량(金遂良)의 후손이 송재공파(松齋公派)이다. 상촌공(桑村公)의 후손은 다시 손자대에서 4개 파로 나누어졌는데 김영년(金永年)의 후손이 판관공파(判官公派), 김영원(金永源)의 후손이 좌랑공파(佐郞公派), 김영전(金永湔)의 후손이 사승공파(司丞公派), 김영유(金永濡)의 후손이 공평공파(恭平公派)다.
조선 개국공신 김균(金稛)의 후손이 계림군파(鷄林君派), 김후성(金後誠)의 후손이 현령공파(縣令公派), 김영로(金榮老)의 후손이 연동공파(蓮洞公派), 김순(金恂)의 후손이 춘고공파(春皐公派)다.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은 고려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조선 개국공신 3등이 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ㆍ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역임했다. 후손이 경주 김씨의 대표적인 일문(一門)을 이루고 있다. 김인찬(金仁贊)은 우왕 2년에 북청천호(北靑千戶)였다. 북청(北靑)의 토착세력이었던 듯하며 이성계(李成桂)의 개국 후 중추원사(中樞院使)ㆍ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義興親軍衛同知節制事)가 되었고 죽은 후 개국공신 1등으로 익화군(益和君)에 추봉되었다. .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는 세종 8년 문과에 급제, 이조판서(吏曹判書)에까지 이르렀다. 세조 2년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꾀하다가 영월현감(寧越縣監)으로 있던 아들 현석(玄錫)과 함께 살해되었다. 자손들은 각 처로 은신하여 김해김씨(金海金氏)로 행세하고, 수백년을 지내다가 수로왕계(首露王系) 김해김씨(金海金氏)와의 혼동을 피하고자 조정의 윤허(允許)로 경주김씨(慶州金氏)로 환원하였다.
김정(金淨)은 연산군 10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 도승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을 거쳐 형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역임했다. 조광조와 더불어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해 미신의 타파,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한 향약(鄕約)의 전국적 시행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제주에 안치(安置), 후에 사사(賜死)되었다. 시문(詩文)은 물론 그림에도 능하여 새ㆍ짐승 등을 잘 그렸다.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우참찬 등을 지내고 1531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호조판서를 거쳐 좌찬성(左贊成) 겸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 시호는 공절(恭節)이다.
김광원(金光遠)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 때 문장(文章),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승문원문습독관(承文院文習讀官)이 되었다. 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가 죽자 장흥 월봉산에 들어가 학문에만 전념했다.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2년 종성부사(鍾城府使)가 된 후 내외직을 역임하고 1587년 좌참찬(左參贊)으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했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수습하는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라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김여로(金汝老)는 인조조의 무신(武臣)이다. 병자호란을 당한 후 소현세자, 봉림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갈 때 용만(龍灣)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뽑혀 두 왕자를 수행했다. 그 후 금주위(金州衛), 산해관(山海關) 두전투에서 별시위(別侍衛)로 호종, 1644년 청군(淸軍)이 북경에 입성함으로써 이듬해 귀국 허락을 받은 두 왕자의 소식을 앞질러 조정에 전달했다. 후에 別軍職을 지내고 자산, 덕천의 군수를 역임했다. 문장에 뛰어나 ‘거가기문(居家紀問)’, 수사답록(隨事剳錄)‘, ’산언(散言)‘, 수곡집(壽谷集)’ 등을 남겼다. 김사목(金思穆) (순조조(純祖朝)ㆍ우ㆍ좌의정), 김정집(金鼎集)(헌종조(憲宗朝)ㆍ좌찬성(左贊成)ㆍ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등은 그의 후손들이다. 김정집(金鼎集)의 아들이 고종조(高宗朝)에 대사헌ㆍ양관(兩館)대제학 등을 지낸 김창희(金昌熙)다.
한편 좌의정 김사목(金思穆)의 조카 김영작(金永爵)은 철종(哲宗) 때 대사헌ㆍ이좇마판을 지냈으며 시문(詩文)에 능하여 ‘소정집(邵亭集)’이 전한다. 그의 아들이 유명한 한말(韓末)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이다. 그의 자손에서 3명의 상신(相臣)(영ㆍ좌ㆍ우의정)과 왕비 1명을 배출, 가문의 세력기반을 다졌다.
김노경(金魯敬)은 순조(純祖) 때 문과에 급제,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거친 명신이다. 그는 순조 말엽에 권력을 전횡했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헌종(憲宗) 때 강진(康津)의 고금도(古今島)에 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당했으나 철종(哲宗) 때 관직이 복구되었다. 그는 글씨로 유명했는데 그의 아들이 바로 조선조의 명필 김정희(金正喜)다. 금석학자(金石學者)로도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이다. 제 2차 김홍집 내각이 조직되었다. 이 때 총리대신으로 홍범(洪範) 14조를 발표하는 등 새로운 국가의 체계를 세우고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수행했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 극단적 친일파와의 대립으로 내각은 와해되고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탄생했다. 김홍집이 개화파의 일원으로 세 차례나 내각을 조각, ‘갑오경장’을 비롯한 근대적 개혁을 시도한 것은 사실이다.
김준(金準)은 광무(光武) 10년(1906) 나주(羅州)에서 김제율(金弟律) 등과 함께 의병을 모아 광주(光州) 등에서 항일에 앞장섰던 의병장이다. 호남차으이회맹소의 선봉장이 되어 고창, 광주, 동복 등지에서 싸웠다. 그는 한 대 창평을 점령했으나 체포된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일본군을 추격하다 전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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