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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릉 가는길

시인김남식 2009. 4. 12. 17:43

경순왕릉 가는 길  솔새김남식

 

위치 ; 사적 제244호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 - 1

경순왕은 경주김씨 시조로 신라 제56대왕 재위 927∼935. 본관은 경주(慶州).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 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다시 결혼했다.

 

왕릉은 사적 제244호

연천군 장남편 고랑포구가 눈 앞에 보이는 야트마한 산골자기에 묻혔 있다.  

이곳은 역사에서 여러가지로 의미있는 곳이다. 

 

경순왕릉 가는길은 서울서 자유로를 따라 가다가 당동나들목에서 전곡 연천 방향으로 직행해서

적성 가기 전에 경순왕릉 이정표를 발견하면 따라 들어가면 된다.

전곡으로 가는 왕복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는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해서 생긴지도 얼마 되지 않는다. 

 

장남교를 건느기전에 있는 두지나루에는 황포돗대 승선하여 임진강을 조망할수 있는곳으로 

다리밑에는 여름한철 철렴하기에 딱 좋은곳이다.

저멀리 보이는 저 다리는 전곡을 거치지 않고 연천으로 직접 이여지는 새로운 다리를 지금 놓고 있었다.

 

임진강 장남교를 건느면 민통선으로 예전에는 출입이 통제 되었던 곳이라 그런지 다른 세상에 온듯 

한적한 도로가 너무 조용하여 

마을이 을씨년스럽지만 간간히 보이는 매운탕 집에서는 관광객들에 입맛을 채워준다. 

 

임진강이 흐르는 고량포는 개성에서 신라로 가는 지름길로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국경 분쟁이 잦았던 요새지역으로 

경순왕도 백료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 할 때 이곳을 지났지만 죽어서는 건너지 못하고 이곳에 묻혔다.

특히 한국 동란때는 유명한 고량포 전투는 최전방 방어 진지로 천연의 요세였다고 한다.

 

전쟁초기 38도 분계선 지역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하던 사단장 대령 백선엽이 이끄는 제1사단이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에 기습 공격을 받아 치른 전투로 열세한 전력으로 북한군의 2개 사단을

6월 28일까지 4일간 한강 북쪽에서 저지시킴으로써 미군이 참전할 때까지 남하속도를 지연시킨 데

그 의의가 컸다고 한다.

 

임진강 방어선이 헐어지면 서울은 풍전등화로써 이곳 고량포는 전시중에 서부전선의 요새로써 임진강을

사수하기 위해 휴전이 될 때까지 많은 피를 흘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철새 도래지로 유명하다.  

 

얼마전까지 만해도 이곳 고량포 나루터에서 경순왕릉까지 2키로의 거리를 군인들이 직접 인솔해서

경순왕릉을 관람했는데 지금은 직접 승용차로 들어 갈 수가 있으며 주차 시설도 아주 잘 되여 있다.

그리고 경순왕릉이 일반에게 공개되면서 2005년 부터 민통선에서 해제 되었다.

 

남방한계 철책선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 있는 경순왕릉 비석에는 6발의 총탄을 맞는 비운을 겪는다
천년 신라를 바치고 묻혀버린 恨  비무장지대, 민통선. 남북분단의 산물로 한민족의 아픔을

상징하는 분단은 역설적으로 이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많은 지성인들이 매일 수십명씩 이곳을 찻아 오기에

연천군에서는 해설가를 상시 주재하여 관광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철책 경호를 받은 경순왕은 얼핏 보면 누워서도 편치 않은  망국의 왕다운 기구한 팔자이다.

그 이유는 무덤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능의 존재가 실전(失傳)됐다가 조선 영조때

후손에 의해 겨우 되살아나 왕릉의 대우를 받아 오다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향사(享祀)제도를 폐지하자

다시 존재를 잃었다.

그리고 8·15 해방과 분단,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순왕릉은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똘똘한 군인덕에 극적으로 부활 하는데 1973년 육군 25사단 관할 중대장이던 여길도 대위는 무덤 주위에서

총탄에 맞은 비석을 확인 하고는 즉각 상부에 보고했고, 이 소식은 경주김씨 대종회로 통보됐다.

두세번씩이나 사라졌던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릉이 국가사적(1976년 지정)으로 다시 환생한 것이다.

 

왕은 망국 후에도 무려 43년이나 더 살았고, 왕건 보다도 35년이나 장수한 82세(97살 설도 있다)를 살았으며 

왕건은 경순왕에게

“영원한 구생(舅甥·장인과 사위)관계를 맺었고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가 경순왕의 신부가 되었으며 경순왕은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을 왕건에게 시집 보내어 고려 왕통(3대현종)을 이여 주었다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신라 김씨의 분파가 450여개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약 90%가 경순왕의 후손이다

해마다 봄·가을(개천절날)에 이곳에서 벌어지는 제사에 2,000명이 넘는 김씨들이 경순왕을 기리고 있어서

그는 자손복이 많은 임금으로 특히 나라는 망 했으나 백성은 살렸으며, 나라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후손들이 고려를 이어 갔다고 한다.

 

신라 55대 경애왕은 신라 박씨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던중 후백제 견훤이 침략해 오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채 왕건에게 구원 요청을 하고 자결을 한다,

이어서 왕위를 이어받은 56대 경순왕은 속절없이 무너져 가는 천년 왕국의 운명을 결정지어야 할 순간을 느낀다 

930년 고려가 고창 전투에서 견훤을 꺾자 발빠르게 왕건에게 접근하여 931년 왕건을 초청하고

잔치를 열면서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경순왕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후백제와 결별을 선언하고 고려를 선택한다.

 

이때 왕건은 무려 93일간이나 신라 왕경에서 머물며 경순왕과 고려 귀부와 관련된 끈질긴 협상을 하는데

신라의 정치세력은 고려에 ‘신라의 정통성을 넘기는’ 조건으로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했고 

왕건으로써도 아무런 희생없이 민족 통합의 위업을 쌓은 것이니 경순왕의 존재가 얼마나 고마웠을까마는

당시 신라땅에서는 반역의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이 증명한다고 전한다.

 

중국의 경우 한나라 이후 300년을 넘긴 왕조가 없었으며 반면 신라(992년)는 천년을 버텼다.

왕조도 인간의 일생처럼 창업-쇠퇴-중흥-쇠운-망국이라는 흥망 성쇠를 걷게 된다고 하는데 그 안에서

내부 모순과 갈등이 생기고 자연스레 왕조 교체의 기운이 생기게 마련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라에 고려에 바친 경순왕을 위한 변명이 될수있을지언정

어찌 되었던 망국의 원죄까지는 벗어나지 못 할것으로 사료된다.

다만 평화적인 조국 통일을 선택한 경순왕의 용단은 지금의 남북경색에서 본받을 일이다

 

왕릉이 고랑포구가 눈앞에 보이는 야트마한 산에 묻혔을까?

옛 문헌을 보면 왕의 장례를 옛 신라 도읍인 경주로 정하고 신라 유민들이 따라 나서자 송도가 텅빌 정도였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긴급 군신회의를 열어 왕의 운구는 100리를 넘지 못한다(王柩不車百里外) 고 명하고

운구의 임진강 도하를 막았다고 한다.

 

발견당시 지뢰등으로 왕릉에서 직접 제사를 하지 못하고 별도 제단을 마련 했던 곳으로 왕릉 입구에 있다 (윗 사진)

 

전설에 따르면 향수병에 걸린 경순왕이 장단에 있는 도라산에 올라가 고향을 바라보면서 눈물 흘렸다고 해서

이름을 붙은 민통선 도라산(都羅山)에는 도라산역과 도라전망대가 있다. 

 

왕릉을 참관하고 돌아오는 길에 매운탕집에서 먹는 얼큰한 매기 매운탕 점심은 꿀맛 이였다

 

경순왕 아홉 아들 중 마의태자로 잘알려진 김일은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금강산)으로 입산 하였고
둘째 김황은 나주김씨,
셋째 김명종은 경주 김씨의 영분공파,
넷째 김은열은 경주 김씨 대안군파,
다섯째 김석(錫)은 의성김씨,
여섯째 김건(騫)은 강릉김시
일곱째 김선(鐥)은 언양김씨,
여덟째 김추(錘)는 삼척김씨,
아홉째 김덕지(德摯)는 울산 김씨 등이 되었다.
이 중에서도 넷째 아들 김은열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구안동, 청풍, 금녕, 도강, 전주, 양근, 영광, 안산등이 모두 김은열의 후손인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외에 선산(善山)·상산(商山)·수원(水原)·안로(安老)·연안(延安)·순천(順天)·고령(高靈) 김씨 등이 경주김씨계이다.
그리고 알지계에서 다른 성으로 갈라져나간 성씨도 있다.

김행(金幸)은 안동권씨로,
김순식(金順式)은 강릉왕씨로,
궁예의 후손 순백(珣白)은 광산이씨로,
궁예의 17세손 세광(世光)은 감천문씨(甘泉文氏)로,

경순왕의 아들 은열(殷說)의 13세손 영규(永奎)는 수성최씨(隋城崔氏)로 분리되었다.

 

 

2000년 11월 기준으로 실시한 2000년 주택인구총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김씨(430만), 밀양박씨(323만)

전주이씨(279만), 이어 4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신라계 김씨에서 인구가 가장 많아

173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김씨는 가야계(김해김씨)와 사성 김해김씨(시조 김충선)를 제외하면 대부분 신라계 김씨이다.

신라계 김씨는 대보공 김알지를 시조로 하며

전체 인구는 김씨 인구 1072만명(2010년 인구센서스) 중 630만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같은 뿌리이면서 다른 성씨를 쓰는 안동권씨, 수성최씨 등 9개 본관의 인구를 더하면

신라계 김씨는 700만명이 넘는다.  

 

 

경순왕릉 사적 제244호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 - 1, 18 - 2번지 일대
신라 제56대왕. 재위 927∼935. 본관은 경주(慶州).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다시 결혼하였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견훤에 의해 신라 56대 왕으로 옹립되었으나
난폭한 견훤보다 온건한 왕건쪽으로 마음을 돌려서 935년 신하들과 더불어 국가를 고려에 넘겨 줄 것을 결의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했다.
백료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 할때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쳤다고 하며
왕건은 그를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했는데, 그 지위는 태자의 위(上)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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