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난히도 날씨가 봄부터 가물더니 여름이 와도 장마의 기색은 아직이네요
그래서인지 들녁에 피여있는 꽃들도 색이 예전만은 못합니다
겨우내 잠자던 대지에 새싹을 틔우고 다투어 들과 산에 꽃을 피워
기대와 설레임으로 희망을 얘기했던 봄은 겨우 몇일의 꽃날로 그리도 부산을 떨며
잔치를 하더니 지난 밤 후득후득 빗줄기와 함께 뚝뚝 꽃잎만 떨구고
그 꽃잎이 진자리 어느새 앵두가, 자두가, 돌배가, 팥알 만한 열매를 달고
가지에 여백을 푸르름으로 채우고 여린 바람에도 팔랑팔랑 흔들리고 있어요.
살갗을 끈적이게 하는 때이른 더위가 기분을 언짢게 하지만,
묵정밭 귀퉁이 이름 없는 무덤가에서 접동새의 처량한 소리에
진분홍 꽃망울을 막 터트린 개복사꽃, 뻐꾸기가 울 때 쯤이면 꽃이져야 하는데,
아직 생각을 놓고 여직 피어 당신이 우리 동네 들어설 때 동구밖 개울 어귀에서
당신께 손짓하던 진분홍 철쭉 딱히 몇해 전부터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맘때면 마당가 빈터에 자리잡고 잡풀들과 함께 오뚝이 피어 빨갛게
혹은 더 빨갛게 황홀한 색깔로 시선을 끄는 튜울립,
이렇게 비 내리고 마음에 구김이 가는 날은 진하고 화사한 꽃들이
조금은 마음에 위안이 되지만 온전하게 내 마음을 풀어 주는 것은 아니예요.
사실 난 아주 진하고 선명한 빛깔을 좋아하진 않지요.
꽃의 여왕이라고 하는 붉은 장미나 진보라 꽃창포, 그 진한 분홍색 보다는
내 누이 시집갈 때 들고 섰던 하얀 부케같은 찔레꽃, 여기저기 야트막한 덤부살,
어디에 든 피어 유년, 허기를 메워 주던 찔레꽃, 흰색에 가까운 그 미색.
이유도 없이 꽃을 바라보면 그냥 울고 싶어지는
그렁그렁 눈물을 뚝뚝 흘리고 싶어지는_
저 개울 건너 다랭이 논뚝에 팝꼰을 튀겨 뿌려 놓은 듯한
잔잔한 바람 한 줌에도 모듬으로 갸웃 눕혀졌다 제쳐지다 이내 잠잠해 고요해지는
하얀 싸리꽃, 사실 조팝나무꽃인데 편해서 싸리꽃이라고 해요.
어쩌다 밭 가장자리에 뿌리를 내리면 어찌나 생명력이 강한지 금방 고랑까지 뿌리가 뻗어
일일이 뿌리를 제거하는데 애를 먹곤 하지요.
그렇게 순한 미색의 꽃들을 더 좋아해요.
그건 어쩜, 우유 부단한 내성격의 결함인지도 모르겠지만 젊은 날
우리는 어떤 한 순간 끌림을 그걸 사랑이라 믿어
붉은 장미 몇 송이로 그대에 마음을 사러 강렬하게 매달렸던 어리석음,
붉은 꽃들이 쉽게 시든다는 사실,
시든 후에 아물지 않는 그 지독한 상채기를 미쳐 알지 못했었지요.
붉은 장미에는 희고 자잘한 안개꽃이 어울린다는 사실을 나이들어 깨달았지만
그 덕에 첫사랑이라는 추억도 간직하게 되었고
남들처럼 그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도 알았지요.
어떠한 결단의 강요보다는 대충 대충이 더 어울리는 나이가
그러한 애리하고 은근한 색감의 꽃들을 더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구요.
그렇다고 아카시아나, 개망초는 좋아하지 않아요.
아카시아는 꽃줄기를 꺽어 "가위바위보" 하나씩 따서 먹으며 꽃쌈을 하던 배릿한 꽃맛의 기억
하지만, 일본서 귀화한 식물임을 알고 부터는 그리 좋아하지 않지요.
그리고 한뼘의 틈만 생기면 제집, 남의 집 가리지 않고 터를 잡고 꽃을 피우는 개망초,
그 꽃도 미국서 귀화한 식물임이라지요
식물들이야 사람의 감정을 알리 없지만 그렇게 식물에게까지 편견을 갖는 게 좀 우습지요.
꽃들이 딱히, 오월에만 핀다고 규정 지울 수는 없지만 오월에 시작하여 유월
그리고 칠월까지 변함없이 머리맡을 장식해 줄 꽃들을 바라봅니다
줄기를 꺽으면 노란 진액이 흐르는 애기똥풀, 산 비알 등성이에서 진노랑꽃을 피워 멀리 있어도
금방 테가 나는 등황각시원추리꽃, 그리고 보라색 등나무꽃과 칡꽃까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들꽃들을 꺽어서 그대 창가를 장식하고 싶은 날 이예요.
그대가 졸린 눈을 부비며 창문을 열면
화사한 꽃향기에 질식하여 하루쯤 소풍을 나가자고 보챌지도 모르잖아요.
보온병에 따끈한 커피를 담아 어디 두물머리 쯤,
비안개 가득한 강가에서 예쁜 조약돌로 수제미도 뜨며
간간이 물속에 어리는 그대의 흐뭇한 미소를 느긋하게 즐기며
속으로 속으로 "미안하다. 그래, 고생만 시켜 미안하다" 고백 하는 일.
생각이 많았던 이제는 비오는 유월의 아침이어야 합니다.
잔 비 사이로 아기손 같은 은행나무 여린 잎사귀가 제법 파릇하고
멀리서 할미새 깝죽대는 꼬리짓 소리, 상큼한 개울물 소리
그래서 어쩐지 오늘은 아주 반가운 전화나 이메일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늘 함게하는 당신이 되어주세요 solsae
풀잎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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