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님이 누나 이시영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머리, 날랜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보면
흙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 주더니
왜 가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긴밤 베틀에 고개숙여
달그랑 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
빈정지 문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 올것만 같더니
한번가 왜 다시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
『월간문학』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1976년 첫시집
<만월> 간행한 이후 <바람속으로><길은 멀다 친구여>
<이슬 맺힌 노래>등을냄
에필로그 / 김남식
시의 내용이 구수한 시골 된장 맛을 풍기고 있어서
정감있고 맛깔 스럽다
암울했던 60년대의 찌든 삶의 풍경을 엿 보는 것 같아 추억이 그려진다.
마치 내 이야기를 여기에 옮겨놓은 듯 어느때는 피잉~
눈물이 돈다. k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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