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송상현충렬사 솔새김남식
경부고속도로 청주IC 진입하기전 약 1km 지점 가로수길 우측에 송상현선생 충렬사(忠烈祠)가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3개의 정문(旌門)이 먼저 반긴다 좌측에 있는 것이 부위부강(夫爲婦綱) 열녀문이고
가운데가 군위신강(君爲臣綱) 충렬문이며 우측이 부위자강(父爲子綱) 효자문이다.
이 삼강(三綱)의 문을 지나면 홍살문이 있고 마을 안쪽으로 충청북도 기념물 16호인 충렬사가 있다
사당 입구에 선조 28년(1595년)에 건립한 충신문이 있다.
"고성월운 열진고침 군신의중 부자은경(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되었는데 이웃한 여러 진에서는 도와줄 기척도 없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우니 아비와 자식의 은정은 가벼이 하오리다. ' 라는 뜻이다.
천곡은 이 혈서를 아들과 부인에게 주며 고향의 부친께 전하라고 하였다.
송상현은 1551년 (명종 6년) 서울에서 출생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본관은 여산(礪山), 시호는 충렬(忠烈)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 26세에 문과 급제, 승문원(承文院)의 정자(正字) 벼슬을 거쳐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도 다녀왔으며, 1591년 동래부사로 부임, 이듬해(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장렬히 순국하였다
동래부사직을 사임하고 피신하라고 귀뜸해 주었지만 천곡은 오히려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조련하는 등
임진왜란을 대비했었다
왜장이 항복을 요구하자 천곡은 관인(官印)을 오른손에 쥐고 완강히 거부하였으나 팔 다리등 온몸이 난도질 당하여도
송상현은 끝까지 항거하다가 순국하였다.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천곡은 이런 글을 적에게 던졌다.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4월 15일 오시(午時)에 성은 함락되었다
천곡의 충정을 본 왜장이 놀랐다고 하는데 이후 방방곡곡에서 의병으로 일어섰다고 한다,
천곡의 묘는 왕명에 의하여 명당인 현재의 장소에 묻히게 되었으며 자손에게 전면의 십리 전답과 산을 하사하여
대대손손 제사를 봉향케 했다고 한다
1595년 (선조 25년) 동래에서 이곳으로 이장하여 광해군 2년 (1610년) 사당을 창건하여 여러차례 증축과 수리를 했다
묘소는 사당에서 약 1.5 Km 떨어진 충렬사 뒷산에 있다
1980년에 중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의 겹처마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3개의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마당 앞에 삼문을 세우고 주위에는 석축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현종 원년(1659년)에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쓴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