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관한 시詩]
----- 차례 --------------------------------------------------- 봄/정지용 봄/이 일 봄1,2/윤동주 봄/서정주 *봄 I/이영도 봄/한하운 봄/구자운 봄/박용래 봄/이수익 봄/오탁번 봄/송수권 봄/이성부 봄/허영자 봄/유자효 봄감기 들린 둑길/최동호 봄과 봄밤과 봄비/김소월 봄날/엄혜숙 봄날에/황동규 봄날은 간다/안도현 봄날은 간다/김은령 봄밤/김수영 봄밤의 회상/이외수 봄비/이수복 봄비/김용택 봄비/안도현 봄비/문중섭 봄비/이재무 봄비의 저녁/박주택 봄은/김사림 봄의 노동/김광협 4월/문인수 3월/문인수 삼월은/이태극 소주/정진규 *아지랑이/이영도 ========================================================== 봄 정지용(1902-1950)
외ㅅ가마귀 울며 나른 알로 허울한 돌기둥 넷이 스고 이끼 흔적 푸르른데 黃昏이 붉게 물들다.
거북 등 솟아오른 다리 길기도 한 다리 바람이 수면으로 옴기니 휘이 비껴 쓸리다 ▷ <정지용 시와 산문>(깊은샘, 1988)
봄 이 일
봄은 作亂軍 부질없은 作亂軍이오 꿈을 한 구루마 실어 가지고 단닙니다
밤이면 집집이 드나 드지오 한밤에 困하게 잠든 청춘에게 꿈을 잔득 퍼 부어주고 갑니다
그러지 않어도 꿈만은 청춘시절 아츰에 이러나면 어리둥절 할 수밖에 터문이 없는 꿈을 실컷 뀌었으니 혼자 생각하고 싱긋 웃기도 하지오
부질없는 꿈 구루마를 끌고 도적놈처름 살금살금 단니는 놈이 실없는 作亂軍 봄! 청춘을 놀리는 봄이외다 ▷ <현대조선문학전집 시가집>(조선일보사, 1938)
봄 1 윤동주(1917-1945)
우리 애기는 아래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뜨막에서 가릉가릉
애기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소올소올
아저씨 해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봄 2 윤동주
봄이 血管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三冬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는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봄 서정주(1915-2000)
복사꽃 픠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제비 무처오는 하늬바람 우에 혼령있는 하눌이어. 피가 잘 도라… 아무 病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좀 슬픈 일좀, 있어야겠다. ▷ <미당 서정주 시전집>(민음사, 1983)
봄 I 이영도(1916-1976)
낙수 소리 듣다 미닫이를 열뜨리니 포근히 드는 볕이 후원에 가득하고 제가끔 몸을 차리고 새 움들이 돋는가
아이는 봄 따라 가고 고요가 겨운 뜰에 맺은 매화가지 만져도 보고 싶고 무엔지 설레는 마음 떨고 일어 나선다 ▷ 시조집 <청저집>(문예사, 1954)
봄 한하운(1919-1975)
제일 먼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좁은 지역에도 한 포기의 꽃을 피웠더냐.
하늘이 부끄러워 민들레꽃 이른봄이 부끄러워.
새로는 돋을 수 없는 빨간 모가지 땅속에서 움돋듯 치미는 모가지가 부끄러워.
버들가지 철철 늘어진 초록빛 계절 앞에서 겨웁도록 울다 가는 청춘이요 눈물이요.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은 한 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이요. ▷ 시집 <보리피리>(미래사, 1991)
봄 구자운(1926-1972)
손으로 어루만져 사물을 보는 좋지 못한 습관의 희생이 되어 버린 담벼락 흙의 무너진 어둠.
묵중한 사물의 모서리.
꿈틀거리는 그림자. 어둠에 길들이는 일은 언제까지라도 잇달아 일어나는 騷音에 헷갈려서 걸을 수 없이 된
침울한 얼굴 표정을 생각케 한다.
헌 외투. 찢어진 신문지. 빈 병의 쪼각에 찔리어서 오는 바람의 상처 자욱.
거짓말은 여기 살고 있다. 시름 어린 손을 서로 잡는 것은 좋은 일일까?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
그리고 노랫소리는 흐른다. 그러면 아무도 없는 이 틈사리에 나무 이파리들이 일제히 뿌려진다. ▷ <현대한국문학전집 18>(신구문화사, 1967)
봄 박용래(1925-1981)
종달새는 빗속에 울고 있었다
각시풀은 우거져 떨고 있었다
송사리떼 열짓는 징검다리 빨래터
그 길섶
두고 온 日暮. ▷ 시선집 <강아지풀>(민음사, 1997, 개정판)
봄 이수익(1942-)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버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시집 <단순한 기쁨>(고려원, 1987)
봄 오탁번(1943-)
겨우내 살이 오른 딱정벌레 작은 알이 봄 아침 눈을 뜨고 나무 밑둥 간질일 때 그리움 가지 끝마다 새잎 나며 보챈다
버들개지 실눈 뜨는 여울목 아지랑이 눈물겨운 물거울로 꿈결 속에 반짝일 때 이제야 견딜 수 없는 꽃망울이 터진다 ▷ 시집 <1미터의 사랑>(시와시학사)
봄 송수권(1940-)
언제나 내 꿈꾸는 봄은 서문리 네거리 그 비각거리 한 귀퉁이에서 철판을 두들기는 대장간의 즐거운 망치소리 속에 숨어 있다
무싯날에도 마부들이 줄을 이었다. 말은 길마 벗고 마부는 굽을 쳐들고 대장간 영감은 말발굽에 편자를 붙여가며 못을 쳐댔다.
말은 네 굽 땅에 박고 하늘 높이 갈기를 흔들며 울었다 그 화덕에서 어두운 하늘에 퍼붓던 불꽃 그 시절 빛났던 우리들의 연애와 추수와 노동
지금도 그 골짜기의 깊은 숲 캄캄한 못물 속을 들여다보면 처릉처릉 울릴 듯한 겨울산 뻐꾸기 소리..... 집집마다 고드름 발은 풀어지고 새로 짓는 낙숫물 소리 산들은 느리게 트림을 하며 깨어나서 봉황산 기슭에 먼저 봄이 왔다. ▷ 시선집 <지리산 뻐꾹새>(미래사, 1991)
봄 이성부(1942-)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시집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다>
봄 허영자(1938-)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시장기,
죽은 나무도 생피 붙을 듯 몸을 풀어라 죄스런 봄날
피여, 피여. 파아랗게 얼어붙은 물고기의 피,
새로 한번만 미쳐라 달쳐라 ▷ 시선집 <암청의 문신>(미래사, 1991)
봄 유자효(1947-)
봄은 축제일의 한바탕 불꽃놀이. 오래 사는 삶을 지겨워 말기 삶은 언제 시작해도 축제인 것을. 나는 내 인생의 제왕 내 집은 나의 왕궁 자연은 나의 영지. 왕궁의 불꽃처럼 나의 영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자연의 풀꽃. 오래 사는 삶일수록 오히려 축복하기 봄은 생명의 축제이므로. ▷ 시집 <지금은 슬퍼할 때>(시와시학사, 1996)
봄감기 들린 둑길 최동호(1948~)
조청같이 진한 녹차 한 잔 마시고 빈속에 한 줌 찻잎을 씹는다
바늘 돋은 혀 찻잔에 대고 언 강 속에 흐르는 푸른 물로 은빛 아가미 같은 가슴을 적신다
버들피리 비늘 같은 까치 소리 풀잎 편지 전하며 강 언덕 너머에서 감기 들린 목구멍 같은 봄 둑길을 걷자고 한다
봄과 봄밤과 봄비 김소월(1902-1934)
오늘 밤, 봄밤, 비 오는 밤, 비가 햇듯햇듯 보슬보슬 회친회친, 아주 가이업게 비가 내린다. 비 오는 봄밤, 비야말로, 세상을 모르고, 가난하고 불쌍한 나 이 가슴에도 와주는가? 한강, 대동강, 두만강, 낙동강, 압록강, 보통학교 삼학년 오대강의 이름 외이든 지리시간, 주임선생 얼굴이 내 눈에 환하다 무쇠다리 위에도, 무쇠다리를 스를 듯, 비가 온다. 이곳은 국경, 조선은 신의주, 압록강, 철교, 철교 위에 나는 섰다. 분명치 못하게? 분명하게?
조선 생명된 고민이여!
우러러보라, 하늘은 가맣고 아득하다. 자동차의, 멀리, 불붙는 두 눈, 소음과 소음과 냄새와 냄새와,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몇 명이나 될꼬……. 지나간다, 지나를 간다, 돈 있는 사람, 또는 끼니조차 빠뜨린 사람
사람이라 어물거리는 다리 위에는 전등이 밝고나 다리 아래는 그늘도 깊게 번듯거리며 푸른 물결이 흐른다, 굽이치며, 얼신얼신. ▷ 시선집 <진달래꽃>(미래사, 1991)
봄 날 엄혜숙
사람들은 동그라미 하나씩 빚으면서 살고 있다 둥근 식탁과 저 붉은 무덤이 맞닿아 가둔 만큼의 바람과 햇살을 향유한다는 것을 葬地에서 보았다
안개 속에 수많은 소리들이 웅성대고 있다 세상 끝 어슴프레 내려다보이는 길섶 허연 소금꽃 같은 아버지 비틀거리며 걸어가신다 허공에 기대어 땅 밀쳐내던 마지막 잎새의 젖은 눈과 마주친다 파랑에 지친 빈 바랑 내려놓고 돌아가 쉴 곳 두리번거린다
바스락 소리 낼 것 같은 굽어진 허리 햇살은 더 큰 햇살 속으로 숨어 버리고 움켜쥐어 봐도 바람만 가득 담긴 손이 힘없이 떨린다 굽어보이지 않던 날들이 일제히 고개 디민다 생과 사의 문지방 너머 개나리꽃 노랗게 웃고 있다 ▷ 시집 <도문>(한국문연, 2008)
봄날에 황동규(1938-)
이제 너와 헤어지는 건 강물이 풀림과 같지 않으랴 어두운 한겨울의 눈이 그치고 봄날에 이월달에 물이 솟을 제 너와 나 사이의 언짢음도 즐거움도 이제 새로 반짝이리 봄 강물같이 ▷ <황동규 시전집>(문학과 지성사, 1998)
봄날은 간다 안도현(1961-)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 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나는 흐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 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 척의 커다란 범선을 보았다 살구꽃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작과비평사, 2004)
봄날은 간다 김은령
오봉순, 삼십 대, 나이 정확히 모름 경북 경산시 하양읍 동서3리, 이장님의 눈총과 배려 속에 마을회관에서 2년째 살고 있는 여자 남편, 가끔 보이기도 함 출생내력, 알지 못함 한글을 모를 뿐더러 숫자 개념이 없어 시간제로 일하는 단순노동의 임금을 종종 떼어먹히는 줄도 잘 모름 유일한 희망이자 낙은 그 날 번 일당으로 마을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맥주 한 병 사 마시는 일 아이 셋, 또래와 같이 학원도 보내야 하고 컴퓨터 사 달라고 졸라 당분간 맥주 한 잔 포기한다고 구멍가게 집 아줌마와 이장님께 선언함
대추꽃 피는 마을 마을회관 높은 방 벽과 벽 사이 삼각의 꼭지점 거미, 집을 짓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막 기진맥진한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투명한 알 지금 부화 중이다 ▷ 시집 <통조림>(모아드림, 2002)
봄 밤 김수영(1921~68)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 <김수영 전집 1 시>(민음사, 1981)
봄밤의 회상 이외수(1946-)
밤 새도록 산문시 같은 빗소리를 한 페이지씩 넘기다가 새벽녘에 문득 봄이 떠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네 내 생애 언제 한번 꿀벌들 날개짓소리 어지러운 햇빛 아래서 함박웃음 가득 베어물고 기념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 본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풍경들은 언제나 흐림 젊은날 만개한 벚꽃같이 눈부시던 사랑도 끝내는 종식되고 말았네 모든 기다림 끝에 푸르른 산들이 허물어지고 온 세상을 절망으로 범람하는 황사바람 그래도 나는 언제나 펄럭거리고 있었네 이제는 이마 위로 탄식처럼 깊어지는 주름살 한 사발 막걸리에도 휘청거리는 내리막 어허,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네 별로 기대할 추억조차 없는 나날 속에서 올해도 속절없이 봄은 떠나가는데 무슨 이유로 아직도 나는 밤 새도록 혼자 펄럭거리고 있는지를 ▷사이트-2003.4.22 작
봄 비 이수복(1924-1986)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 시집 <봄비>(現代文學社, 1968)
봄 비 김용택(1948-)
비가 오네요 봄비지요 땅이 젖고 산이 젖고 나무들이 젖고 나는 그대에게 젖습니다 앞강에 물고기들 오르는 소리에 문득 새벽잠이 깨었습니다 ▷ 시집 <그래서 당신>(문학동네, 2006)
봄 비 안도현(1961-)
봄비는 왕벚나무 가지에 자꾸 입을 갖다 댄다 왕벚나무 가지 속에 숨은 꽃망울을 빨아내려고
봄 비 문중섭
잊었던 누나의 수줍음같이 조용히 내리는 비 자우룩한 젊음의 對岸에 초롱불빛 향수가 껌벅인다.
솜털처럼 포근한 어머님의 손길이 오늘따라 봄비 되어 내린다. 흙내음에 겨운 꽃망울을 열고 환히 비쳐드는 모습 연푸른 창살에 자장가로 번진다.
아쉬운 사연들이 명주실에 매달려 온몸에 젖어 감기면 太古林을 홀로 걷는 내 상념에의 발길은 사뭇 무겁다. ▷ <한국일보> 1974. 4.16
봄 비 이재무(1958-)
1 봄비의 혀가 초록의 몸에 불을 지른다 보라, 젖을수록 깊게 불타는 초록의 환희 봄비의 혀가 아직, 잠에 혼곤한 초록을 충동질한다 빗속을 걷는 젊은 여인의 등허리에 허연 김 솟아오른다
2 사랑의 모든 기억을 데리고 강가에 가다오 그리하여 거기 하류의 겸손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해다오 살 속에 박힌 추억이 젖어 떨고 있다 어떤 개인 날 등 보이며 떠나는 과거의 옷자락이 보일 때까지 봄비여, 내 낡은 신발이 남긴 죄의 발자국 지워다오
3 나를 살다간 이여, 그러면 안녕, 그대 위해 쓴 눈물 대신 어린 묘목 심는다 이 나무가 곧게 자라서 세상 속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가지마다 그리움의 이파리 파랗게 반짝이고 한 가지에서 또 한 가지에로 새들이 넘나들며 울고 벌레들 불러들여 집과 밥을 베풀고 꾸중 들어 저녁밥 거른 아이의 쉼터가 되고 내 생의 사잇길 봄비에 지는 꽃잎으로 붐비는, 이 하염없는 추회 둥근 열매로 익어간다면 나를 떠나간 이여, 그러면 그대는 이미 내 안에 돌아와 웃고 있는 것이다 늦도록 늦봄 싸돌아다닌 뒤 내 뜰로 돌아와 내 오랜 기다림의 묘목 심는다 ▷ 시집 <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
봄비의 저녁 박주택(1959~)
저 저무는 저녁을 보라 머뭇거림도 없이 제가 부르는 노래를 마음에 풀어놓고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봄비에 얼굴을 닦는다, 저 저무는 저녁 밖에는 돌아가는 새들로 문들이 덜컹거리고 시간도 빛날 수 있다는 것에 비들도 자지러지게 운다, 모든 약이 처방에 불과할 때 우리 저무는 저녁에는 꽃 보러 가자 마음의 목책 안에 고요에 뿌리를 두고 한눈 파는 문들 지나 그림자 지나 혼자 있는 강 보러 가자 제 몸을 출렁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은 물을 맑히며 정원으로 간다 구름이 있고, 비가 있고 흰말처럼 저녁이 있다 보라, 일찍이 나의 것이었던 수많은 것들은 떠나간 마음만큼 돌아오는 마음들에 불멸을 빼앗기고 배후가 어둠인 저녁은 제 몸에 노래의 봄비를 세운다
봄은 김사림(1939-1987)
아침 식탁 위의 냉잇국에서 봄은 천천히 다가온다.
한나절 강가에는 겨울을 헹구는 아낙네들이 왁자지껄 …… 원을 그리고
해그름쯤 뒷뜰에는 묵은 독을 부시는 어머니의 손길에서 봄은 활짝 웃는다.
고창 보리밭
봄의 노동 김광협(1941-1993)
우리 서귀포 보리밭에 종달새가 백그라운드 뮤직의 주자(奏者)가 되어 봄의 노동에 끼어들 때, 항구의 연락선 고동 부우부우 울어 귤 팔러 육지 갔던 비바리가 보리밭 색깔 투피스를 입고 허위대 큰 나비처럼 내린다. 우리 서귀포 하늘 위에 귤꽃 향기가 은은한 고전(古典)이 되어 봄의 영화(榮華)에 뛰어들 때 바다에 흰 갈매기떼 볕살같이 선잠에 취했던 젊은 장정(壯丁)은 우거진 녹음의 수염을 하고 향그러운 나무처럼 일어난다. ▷ 시집 <유자꽃 피는 마을>(신원문화사, 1990)
4월 문인수(1945-)
절을 에워싼 산빛이 수상하다. 잡목 사이로 여기저기 펄럭 걸린 진달래. 단청 엎질린 것 같다. 등산로를 따라 한 무리 어린 여자들이 내려와서 마을 쪽으로 사라진다. 조용하라, 조용히 하라 마음이여 절을 에워싼 산빛이 비릿하다.
3월 문인수(1945-)
아직은 바람이 차다 하면서 누가 밤중에 깜깜한, 찬 부엌으로 내려갔다. 군불 한 소끔 더 때고 들어왔다. 잉걸 화롯불도 새로 들여온 것 같았다. 나도 선잠을 걷고 화롯불 앞에 쪼그려 앉고 싶었던 것처럼 방금 자리 뜬 저 아이들처럼 이글이글 올라온 이 한 무더기 동백꽃 쬐보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지금은 또 먼 땅 속에서 두런두런거리는 것 같다. 아직은 때때로 바람이 차다.
삼월은 이태극(1913-2003)
진달래 망울 부퍼 발돋움 서성이고 쌓이던 눈도 슬어 토끼도 잠든 산 속 삼월은 어머님 품으로 다사로움 더 겨워.
멀리 흰 산 이마 문득 다금 언젤런고. 구렁에 물소리가 몸에 감겨 스며드는 삼월은 젖먹이로세, 재롱만이 더 늘어. ▷ 한국인의 애송시 2(청아, 1985)
소 주 정진규(1939-) 봄에는 살냄새가 진동해서 자꾸 도망만 다닌다 머물 수 없다 이미 지쳤다 어제는 井邑까지 가는 동안 새살 드러낸 들판의 흙들도 그냥 지나쳤다 살냄새가 너무 짙었다 구름처럼 피어 있는 벚꽃나무 하나도 그냥 지나쳤다 살냄새가 너무 짙었다 대숲 하나와 높은 까치집 하나만 공들여 보았다 그들은 살냄새가 없어서 깊게 머물렀다 하루에 한 번씩 술을 마셔야 하는데 술도 소주 2홉이 가장 적당했다 소주는 언제나 깡마른 사내였다 ◁ 시선집 <말씀의 춤을 위하여>(미래사, 1991)
아지랑이 이영도(1916-1976)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춘삼월 아지랑이
장다리 노오란 텃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 1966년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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