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파평윤씨 명재고택과 노강서원
솔새김남식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있는 중요민속자료 제190호인 논산 명재 고택은 숙종때의 학자 윤증(尹拯 :1629~1714) 선생의
고택으로 선생의 호인 명재(明齋)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노강서원
논산 노강서원은 조선 숙종 1년(1675)에 윤황(명재의조부)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후
1682년(숙종 8)에 ‘노강(魯岡)’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 윤문거(尹文擧)를 추가 배향하였다.
그 뒤 1723년에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명재)을 추가 배향하고 1790년과 1883년에 중수하였다.
노강서원 강학당(보물 제1746호)
서재 경송재(經誦齋)
동재 송덕재(頌德齋)
내삼문
사우에는 윤황(조부)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윤문거(백부)·윤선거(부친) 윤증(명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안에서 본 외삼문
노성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어서인지 건물이 입구의 대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입구에는 좌측으로 장방형의 연못이 있다.
윤황(명재의조부)선생 고택 사랑채
윤황선생은 조선 후기의 학자요 정치가에 사상가이며 서인이다
소론의 영수인 백의정승 명재(明齋) 윤증의 할아버지로 선조때 태어나 광해군 시대를 지나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얻은 인조17년 1639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며 사후에 영의정까지 추증되었다
사랑채 뒷쪽
윤증선생 숙종때 소론의 지도자였으며 윤선거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당시 윤증 선생의 부친 윤선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갔는데 강화가 함락되자 윤선거의 부인이씨는 자결을 택했지만
부친 윤선거는 강화도를 탈출했다고 전해지는데 ...
이로 인하여 관직을 추탈당하고 향리에 묻혀 살았으며 그후 1782년 英祖때 복권 되었으나
이후 高宗대까지 관작추탈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윤증선생 역시 관직에 몸담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고 하는데 .......
관직에 임명되어도 그는 조정에 나가서 벼슬 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순절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며 사양했다고 한다
사후 1723년(경종) 문성(文成)의 시호가 내려지고 그해 의정부 좌의정에 증직되었다
명재고택을 들어가는 입구에는 윤증선생의 모친 공주이씨 열려 정려각이 있다
당시 강화도에 사대부들이 피신했으나 끓려 가서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 자결로 순절을 지켰다고 한다
사랑채가 안채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사당
윤황선생 재실
직사각형의 인공 연못에는 둥근 모양의 작은 인공섬을 만들고 섬에는 배롱나무에 붉은 꽃이 방문객을 호사해 주었다
고택뒤 소나무 숲에는 조부 윤황선생 묘소와 부친 윤선거 백부 윤상거 그리고 윤증 선생의 묘소가 있다
윤황선생 신도비
윤증 후손들이 집안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장류를 상품화하기 위해 놓아둔 장독대가 안성 서일농원에 보았던
장독대 만큼이나 있었다.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이 2008년 10월 이곳을 방문했다가 기념식수한 꽝꽝나무(남해바닷가서 자라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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